제3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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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에게 있어서는, 냉대받는 수치스러움, 거절에 대한 두려움, 벗을 몸의 빈약함, 성기의 외관상의 무례함, 그 상태에 대한 불안, 무기력에 대한 공포,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할까봐 생기는 근심, 그들이 느끼는 이런 것들이 사랑의 본질을 이룬다. 어떤 여자들은 이런 수치감을 사랑하고, 이런 두려움을 사라지게 하며, 이 나체에 감동하고, 이 공포에 동참하고, 남자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동시에 그들을 지나친 성급함, 치근대기, 때로는 난폭함으로부터 미리 보호하는 이런 근심의 여왕 같은 존재가 된다. 여자들은 눈을 감는다. 그리고 흔적을 남기지 않는 공모, 생물학적이지도 혈통적이지도 않은 최초의 눈을 감아주기 (내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에 접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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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히 작은 방 안에 틀어박히고 싶은 우리의 심리는, 나뭇잎의 그림자가 그러하듯, 피부 위에 어른거리는 유년기의 잔여물처럼 우리를 감동시켰다.
제41장 두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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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언어는 매우 제한되어 있다.
언어는 단지 언어 자신의 분열과 동시대의 것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을 뿐이고, 또 그로 말미암아 분열 번식하는 세계들의 분열만을 환기시킬 수 있을 따름이다. (성의 계보학에서처럼 이 세계들은 하나의 뿌리에서 갈라져나온 분기들이다.)
수사학과 사변은 동일한 것이다. 라틴어 speculatio는 산 높은 곳에 있는 망루, 즉 결핍된 매혹을 의미한다. 기회를 노리기, 그것은 별자리의 공백을, 즉 적의를 품은 자의 발성되지 않은 형태의 저장고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일이다. 이 망루는 사냥에서의 매복장소였다.
진정한 말, 그것은 현존하는 동시에 부재하는 타인이다.
암흑으로 둘러싸인 빛의 패러독스(바라보지 않음을 바라보기). 불면의 밤의 패러독스(밤이면서 낮). 검은 색인 동시에 흰색. ((불면의 밤은 프랑스어로 la nuit blanche 직역하면 하얀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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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얗게 지새운 밤이란 무엇인가?
진정으로 욕망하는 자는 잠들 수 없으며 이미지를 이용하지 않는다.
잠들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옆구리에 기댄 여자를 사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잠을 자면서 이미지들로 타아alter를 속이느라 삶에 할당된 시간의 절반을 소비한다.
아지자는 아지즈가 꿈꾸기를 원치 않는다. 사랑받는 여자는 연인이 꿈꾸기를 원치 않는다...
사랑은 추억이 되기도 환영이 되기도 원치 않는다. 사랑은 여기 현존하는 유일한 육체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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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입 봉하고 있어! Motus et bouche cousue! Motus는 침묵이다. 봉한 입Bouche cousue은 비밀이다.
침묵과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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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에는 닫혀있지만 비언어적 의사 소통에는 열려 있는 입.
나체의 어렴풋한 모습을 향하여 열려 있는 감은 눈.
어둠이자 빛인 것, 잠속의 불면, 지각이면서 꿈인 것.
이곳 안에 저곳을 가두고 있으며 현재를 그 흐름의 상류에 투영시키는 내밀한 공간, 말없는 의미, 그들에게 개별 분화의 원인이었던 장면으로부터 테어난 두 존재들의 만남. 그 원인이란 다시 말해서 육체가 태어난 원인, 모체로부터 이탈된 원인, 숨막힘 속에서 언어를 작동시킴과 동시에 무엇보다도 눈부신 빛 - 세계와 시선을 작동시키는 빛, 그때부터는(태어남 이후에는) 흐름의 하류에 불과한 언어와 바라보기를 무효화시키는 빛-을 작동시키는 울음 소리의 원인이었다.
그때 비로소 절대적이고 모호하고 말없는 감동의 문이 열리는데, 그것은 태어나는 순간 오관이 뚫릴 때까지 닫혀 있었던 문이다.
사랑은 이런 비상,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출구, 황홀경ekstasis, 세계와 다른 끝에 접착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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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절대로 혼자가 아니다.
인간은 개별적 존재가 아니다(사회 역시 그렇다.) 인간은, 남녀간의 성적인 것을 분리하는 것의 결실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 안의 사회성을 찢어내는 것과 대립한다. 인간은 그로 인한 우연한 결과물로서 두 세계 사이에 있다.
개체성은 이미 찢어진 사회성이다.
인간은 두 삶을 가진, 두 세계를 가진, 하늘과 땅 사이의, 남자와 여자 사이의, 출생 이전과 죽음 이후 사이의 존재로 정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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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세계 하나가, 바라보기는 하지만 세계를 바라보지 않는 시선 속에 자리잡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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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고정되지 못했던 시선.
...
내가 무엇보다도 사랑했던 여자의 마지막 시선, 내가 그 내부에 있던 공간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그녀의 마지막 시선. 그녀는 아직 살아 있었다.
끔찍하게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훨씬 더 내면적인 시선들.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것으로 인해 이미 괴로워하고 번민하는 사람들의 시선들.
그들을 불안에 빠뜨리는 것을 피해 언제나 한사코 다른 곳에 머무르려는 시선들.
은밀히 죽음을 보았기에, 이미 죽음의 궤도를 돌고있는 시선들.
자기 자신 밖으로 삶이 빠져나가 이미 다른 곳에, 영원히 다른 곳에 가 있는 사람들의 시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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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는 자신의 내부로부터 온다. 외부 세계에서는 패배가 없다. 자연, 하늘, 밤, 밤의 어둠의 저편, 비, 열대의 숲, 사막, 화산, 바람, 그것들은 오래 걸리는 눈먼 승리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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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적인 것의 뒤를 보려는 불안한 동요가 지니는 관능성이 호기심을 정의한다. 인간에게는 가시적인 것이 시선을 차단한다.
이 호기심은 볼 수 없는 장면에서 비롯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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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이래로, 어린 시절부터, 나는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집들을 눈으로 보지 않고 시험해보고 싶은 간절한 욕망을 느끼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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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낯선 집에서 더듬거려가며 노는 것은 내게는 혼자 하는 놀이 이상이었다. 그것은 불안이 지배하는 억제할 수 없는 호기심이었다...
내가 어둠 속에서 내 삶의 특수성을 탐사하고 싶었던 듯싶다.
...
글을 쓰는 것, 결별을 고하는 것, 이런 일들은 한밤중에 헤매는 것에 비교할 만하다. 이런 일들은 세계라는 낯선 집에 들어가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고별도 이와 비슷한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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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만큼 생존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없다.
그러나 이제까지 우리가 사랑을 이해하는 바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러하다. 철학자들이 이해하는 방식과도 다르다. 추억으로서가 아니다.사랑에 관한 지식으로서도 아니다. 회환으로서는 전혀 아니다. 이미지들도 절대 아니다. 전혀 향수가 아니다.
그러나 타인. 사랑하던 바로 그 여인, 사라졌지만 사라지지 않은 타인, 말을 건넬 수 없는 여인으로 남아 있는 타인, 그녀를 위해서 나는 살아간다. 이 세계를 떠났지만 내 영혼 속에 들어와 박힌 채로 남아있는 타인.
진주의 영롱한 반사광으로 남아있는 타인. 반사광의 움직임은 대상의 사라짐 너머로 끈질기게 지속되었다.
칸막이 벽 너머의 타인.
기도 너머의 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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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인간은 자신이 불사의 존재가 될 것을 속으로는 믿지 않았지만 영혼을 위해서는 큰 소리로 이런 운명을 소망했다. 오늘날의 죽음에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어지는 꿈이거나 혹은 자신의 탄식을 메아리로 되받으면서 잦아지는 노래조차도 없다. 다른 세계에 속하는 죽은 자들과의 접속은 공포에 이를 정도로 단절되었다.
더 이상 죽은 자들이 없다면, 살아 있는 자들은 아직 존재하는 것일까? 거의 없다. 도피 중. 혹은 은신 중.
살아 있는 자들, 죽은 자들, 성숙한 여자들, 성숙한 남자들도 이제는 많지 않다. 포옹들, 조상보다도 더 떠받드는 아이들, 그 초상화조차도 간직하기 않는 실종자들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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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이전의 세계는 없다. 미래 세계도 없다. 그러나 세계가 하나뿐이라는 사고는 현시대에 유일한 상업 시장이 이 사고를 불가피하는 것으로 만드는 만큼 더욱 진리에 위배되는 허위이다.
첫째, 두 세계가 있다: 자연 언어가 인간에게 개화되자 말을 하는 사람은 각자 두개골 내부에 공명 상자를 가지게 되었다.
둘째, 일원론을 위한 현실적이지도, 노에시스적이지도, 언어적이지도 않은 가능성이란 없다. 명제1. 관계들과 편극 현상들이 있을 뿐이다. 명제2. 기호가 생기자마자 극성(極性), 둘, 변증법, 관계, 성별화가 나타난다.
하나, 단일성, 단성, 비언어는 광기 그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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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둘이다. 연주는 표면과 표면의 닮음이라는 차원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힘의 윤회에 속한다. 힘, 수액, 피, 활력 그것은 원택스트의 내벽 뒤에 있으며, 작곡자는 그것을 형상화시키고 연주자는 표현한다. 전자는 직접적인 지배력으로, 후자는 연기되거나 반복되는 지배력으로.
번역하기, 독서하기, 해석하기, 작곡하기, 연주하기, 글쓰기, 이런 것은 언제나 이미 존재하는 어떤 것을 옮기는 일이다. 하여튼 외부와 내부가 섞이고, 그 둘이 만나는 과정에서 차츰차츰 서로 간의 틈새가 메워지고 밀봉되어, 타인이던 것과 자신이던 것이 구별할 수 없게 되었으며, 게다가 마침내는 외부 혹은 내부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포옹 속에서처럼. 그런 것이 행복이었다: 자연과 자신이 하나가 되어 갑자기 타인 안으로 옮겨갔을 때, 타인과 타인의 동일자가 서로 일치했을 때, 분리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상이한 성별의 두 육체가 합쳐졌을 때, 그것이 행복이었다.
...
어떤 악기나, 영혼의 현시, 어떤 연주자, 또 하나의 자아, 즉 자신이 모르고 있는 자신의 타아를 위해 작곡하는 수가 있다.
이 가능성이 글자 그대로 해석되었을 때, 그것이 글쓰기라고 불렸따.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말없는 세계의 총체를 문학이라고 불렀다.
...
한 없이, 한없는 차이를 향하여.
끝나지도 개선될 수도 없는 차이를 향하여.
...
연주는 고고학보다 더 깊이가 있따. 물론 고고학은 알아차리지 못했던, 더 오래된, 선행하는, 비밀스런 내용을 밝혀낸다. 땅속에 파묻힌 비밀을. 그렇지만 하나의 악보나 악기의 성화된 육체의 진짜 의미는 미래 텍스트라는 사실이다. 하나의 텍스트는 그것에 관한 해석보다 잠재적으로 더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
가장 옛날 사람들이 옳았다.
그것은 하나의 힘이다.
무엇인가가 전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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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대에는 무관심하고, 다른 세계, 즉 언어가 없는 세계, 무한한 세계, 유일한 세계에 대한 추억들만을 내놓는다.
대화를 나누고 눈물을 흘리는 언어가 고안된 것은 포유 동물에게 있어서 생명의 번식이 사멸하는-유성 생식이기 때문이다.
임신이 어두운 내부에어 이루어지는 포유 동물에게 언어로 인해 두 세계가 존재하는 것은 자연이 단일 체계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을 초월하여, 하나의 사랑이 스스로를 완성하려고 애쓴다.
사랑, 죽음, 생명의 벽을 통과해 손을 건네려고 애쓰기, 독서, 질문, 글쓰기, 이런 것들은 이 단계에 이르면 다시 구분되지 않는 것들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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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두 세계로 열리는 존재이다. 인간은 외부와 내보, 정상과 혼돈, 포함된 것과 배제된 것 사이의 칸막이 벽이며 경계이다.
인간은 두 세계일 수밖에 없고, 찢겨진 존재일 수밖에 없다. 인간에게 있어서 사고와 육체는 분리되어 있다. 본성과 사회도 구분되어야 한다; 삶과 언어는 서로 어긋나서 둘로 나뉘며, 자신이 동물과 대립되는 존재라고 믿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하는 인간처럼 동물도 불완전해야한다. 인간은 인간의 약속 이상이 될 수는 없다.
우리를 붙잡는 것을 붙잡기. 그것의 목덜미를 움켜쥐기. 이것이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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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는 태어나는 순간에만 살아 있다. 꿈이 펼쳐지는 밤 자체 같은 꿈에 내가 접합되었다고 느끼는 순간부터, 나는 오직 내 숨결의 바람 소리밖에는 껴안지 못함을 느낀다. 내가 말하는 것은 오직 단어들뿐이다. 나는 넘어야 할 또다른 경계를, 시작해야 할 또다른 태어남을 욕망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향해서, 나를 이방인으로 만드는 그 무엇을 향해 달려든다. 마치 알치 못하는 고향을 향해서처럼, 혹은 내가 되돌아옴으로써, 마치 내가 도망치는 밀물의 바다 -내가 피해서 달아나는-에 대해 판단을 내리 듯이.
제46장 성교
... 새벽은 드러낸다. 새벽은 분할한다. 아침은 창백함 속에서 침묵에 싸인 축축한 형태들을 어둠 한가운데서 하나씩 드러나게 만든다. 빛 자체는 색채를 가져오지만, 새벽빛은 일종의 벌거벗음인 창백함을 실어온다. 새벽빛은 희게 만든다. 나무들을 둘러싸는 안개와 구름을 태어나게 한다. 햇빛이 그 안개와 구름을 걷어가버린다.
희무끄레함이 떠오른다. 냄새들이 떠오른다. 향기들이 떠오른다. 색채들이 색조를 띠기 시작한다. 새벽이다.
나체보다 더 벌거벗은 것이 있다. 그것은 불안이다. 갑자기 한 시선을 찢어버리는 불안은, 그것이 돌연히 생겨나 육체에서 떠오를 때, 나체자체보다 더 외설적인 나체라는 인상을 준다. 왜냐하면 나체는 육체를 드러내는 반면 불안은 정체성을 드러내면서, 정체성의 배후로는 그것이 육체에 뿌리박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불안은 인류의 외설스러운 유일한 나체이다.
그 나머지는 모두가 노출이다.
제49장 결별의 감정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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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그 무질서에 버려두고 그 운명을 우연에 맡긴다는 조건이라면 우리는 떠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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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롱진은, 어디에서든 외국에서 산다는 것은 어디에서나
입을 다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침묵하는 것이다. 침묵하지 않는
다면, 외국인이 아닐 것이다.
자신의 혀를 제어해야 한다.
고국을 떠난 사람이 되는 대로 지껄인다면, 그는 이미 외국인이 아
니라 이제 원주민이다.
외국인처럼 살 작정을 한 사람이라면 외국에서처럼 살아야 한다: 즉 아무것도 이해하지 말 것,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되지도 말 것. 살고 있는 곳에서 침묵할 것, 몸짓을 하고 곧 몸짓도 하지 말 것. 미소를 짓고 곧 미소도 짓지 말 것. 아바 롱진은 이런 태도를 '타향살이(xeniteia)', 즉 이방인의 이질성 속에서인 것처럼 살아가는 현상이라 불렀다. 성직자에게 타향살이는 평신도가 낯선 곳으로 떠나는 것과도 같다. 그것은 어린애에게 태어남과 흡사한 것이다(즉 언어 습득 이전에 그리고 언어를 습득하기 위해 망각해야만 하는 모든 것을 기억하기 이전에).
제51장 사랑의 아름다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 새끼 멧돼지의 털, 벌어진 밤송이 속에서 반짝이는 밤알들, 이글거리는 잉걸불, 장자, 몽테뉴, 겐코, 무질의 책들, 시냇물들의 원천, 말들의 눈, 새벽.
그러나 이미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소스라쳐 놀라는 남자와 여자, 자신들이 이브와 아담의 후손임을 알지 못하면서, 서로의 이름조차 모르면서, 마주 보고 있는 두 육체의 아름다움과 견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들의 표정에 믿을 수 없는 침묵이 흐른다.
반짝이는 땀방울이 온몸을 뒤덮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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