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릭 모디아노, 지평
기억의 파편들은 영원히 불가사의로 남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는 그것들의 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했고, 어떤 날짜, 특정 장소, 철자가 가물가물한 이름 등 지표가 될 만한 것이나마 찾아내려 애썼다. 될 수 있었으나 되지 못한 것들을 생각한 현기증이 밀려왔다. 짧은 만남들, 어긋난 약속들, 잃어버린 편지들, 오래전 수첩속에 적혀있었지만 이제는 잊힌 이름과 전화번호들, 그리고 의식도 못한 채 마주쳤던 여자들과 남자들. 아, 한때 우리를 고통에 빠뜨렸던 것들이 세월이 흐른 뒤에는 얼마나 하찮아 보이는지. 그리고 우연 혹은 불운으로 인해 우리의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그리고 우리의 호적에 무겁게 자리잡았던 그 사람들 또한 얼마나 하찮아지는지. 그는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했다. 꿈에서는 실재했던 모든 것이, 거리들이,..
레이먼드 카버, 내가 필요하면 전화해
시가 꼭 시작과 중간과 결말이 있는 이야기를 말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내게 있어 시는 계속 움직이고, 생생히 나아가고, 번뜩이는 게 있어야만 한다. 시란 어느 방향으로든 움직여야 한다. 그 방향이라는 것이 과거일 수도 있고, 먼 미래일 수도 있다. 또는 웃자란 오솔길로 방향을 틀 수도 있다. 심지어 지구에 한정된 게 아니라 별들 속을 누비며 머물 곳을 찾을 수도 있다. 무덤 너머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할 수도 있고, 연어, 기러기, 메뚜기와 여행을 할 수도 있다. 시는 정지해 있으면 안 된다. 시는 움직여야 한다. 시는 움직이고, 설사 그 안에서 신비로운 요소들이 작용할지라도, 하나가 다른 하나를 암시하는 본질적인 방식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시는 빛나야 한다. 적어도, 나는 시가 빛나길 바란다. p. 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