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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claerbout Nightscape Lightbox http://davidclaerbout.com/
이제니, 유령의 몫 무수한 실선들 사이들 떠돌고 있는 무수한 점선들을 바라보고 있었지. 잿빛 로비에 서서. 나는 여기에 있었어. 아니 너는 여기에 있었떤 적도 없었던 적도 없었어. 우리들은 있는 척하는 것에도 없는 척하는 것에도 서툴렀지. 아니, 있는 척하는 것에도 없는 척하는 것에도 지친 거겠지. 잿빛 로비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어. 바람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지. 여긴 창문이 없다, 없어요. 정말 바람이 말을 하는 것 같구나. 너는 고귀함을 몰라, 고귀함을. 역시 바람의 목소리야. 위의 입이 달싹였지, 들썩였지. 어딘가엔 창문이 있을 거야. 우리는 창문을 찾았지, 찾는 척했지. 딱히 할 일이 없기도 했어. 우린 자신에게만 골몰하는 사람이라는 걸 서로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것이 우리의 생을 고독하게 만들었지..
심보선, 삼십대 나 다 자랐다, 삼십대, 청춘은 껌처럼 씹고 버렸다. 가끔 눈물이 흘렀으나 그것을 기적이라 믿지 않았다. 다만 깜짝 놀라 친구들에게 전화질이나 해댈 뿐, 뭐하고 사니, 산책은 나의 종교, 하품은 나의 기도문, 귀의할 곳이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지, 공원에 나가 사진도 찍고 김밥도 먹었다, 평화로웠으나, 삼십대, 평화가 그리 믿을 만한 것이겠나, 비행운에 할퀴운 하늘이 순식간에 아무는 것을 잔디밭에 누워 바라보았다, 내 속 어딘가에 고여 있는 하얀 피, 꿈속에, 니가 나타났다, 다음 날 꿈에도, 같은 자리에 니가 서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너랑 닮은 새였다(제발 날아가지 마), 삼십대, 다 자랐는데 왜 사나, 사랑은 여전히 오는가, 여전히 아픈가, 여전히 신열에 몸 들뜨나, 산책에서 돌아오면 이 텅 빈..
조은, 언젠가는 내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땐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는 기억 때문에 슬퍼질 것이다 수많은 시간을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꽃들이 햇살을 어떻게 받는지 꽃들이 어둠을 어떻게 익히는지 외면한 채 한곳을 바라보며 고작 버스나 기다렸다는 기억에 목이 멜 것이다 때론 화를 내며 때론 화도 내지 못하며 무엇인가를 한없이 기다렸던 기억 때문에 목이 멜 것이다 내가 정말 기다린 것들은 너무 늦게 오거나 아예 오지 않아 그 존재마저 잊히는 날들이 많았음을 깨닫는 순간이 올 것이다 기다리던 것이 왔을 때는 상한 마음을 곱씹느라 몇 번이나 그냥 보내면서 삶이 웅덩이 물처럼 말라버렸다는 기억 때문에 언젠가는
에이드리언 리치 초점 모호함도 할 말이 있다 방 한 귀퉁이 간이침대에 누워 시야에서 벗어나, 담배를 피우며,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는 사람처럼. 햇빛은 채광창을 뚫고 연필꽂이를 만드는 작업대 위로. 타자기 자판 위로 쏟아져 내리고 있다. 그것들에게 실제보다 더한 존재감을 실어준다. 진솔한 빛. 지구가 움찔댄다 이제 빈 커피잔이, 숫돌이, 손수건이, 자세를 잡는다 성스럽고 분명한 태도로, 빛의 요술지팡이로 고정된 채 마치 명상가가 마음속으로 그것들에게 집중하는 것처럼 오 숫돌 속에 담긴, 손가락처럼 쫙 펴진 다섯 개의 연필 속에 담긴 비밀이여! 한 가지를 골라내기 위해서라면 마음속의 열정만으로 충분하다. 모호함은 또 다른 얘기를 가지고 있으니. 폭풍의 경고 오후 내내 창문이 미끄러져 내렸다. 어떤 바람이 머리 위로 부는지..
고형렬, 밤 미시령 저만큼 11시 불빛 저만큼보이는 요대리 굽은 길가에 차를 세워도어를 열고 나와 서서 달을 보다가물소리 듣는다다시 차를 타고 이 밤 딸그락100원짜리 동전을 넣고 전화를 걸듯시동을 걸고천천히 미시령으로 향하는밤11시 내 몸의 불빛 두 줄기 휘어지며모든 차들 앞서 가게 하고미시령에 올라서서음 기척을 내보지만두려워하는 천불동 달처럼 복받친 마음우리 무슨 특별한 약속은 없었지만잠드는 속초 불빛을 보니그는 가고 없구나시의 행간은 얼마나 성성하게 가야 하는지생수 한 통 다 마시고허전하단 말도 허공에 주지 않을뿐더러---그 사람 다시 생각지 않으리---그 사람 미워 다시 오지 않으리
이성복, 원장면들 어느 날 당신은 벌겋게 익은 수박 속을 숟가락으로 파먹다가 갑자기 그 수박을 길러낸 식물(그걸 수박풀이라 해야 되나, 수박나무라 해야 되나), 그저 잔가시가 촘촘히 붙은 뻣센 넝쿨과 호박잎을 닮은 잎새 몇 장으로 땅바닥을 기는 그 식물이 불쌍하게 생각된 적은 없는지. 여름날 뙤약볕에 쪼그리고 앉아 땅속 깊이 주둥이를 박고 벌컥벌컥 물을 길어올려 벌건 과즙으로 됫박만한 수박통을 가득 채운 끈기와 정성은 대체 어디서 전수받았으며, 어디서 보상받을 것인가. 단지 쥐똥만한 제 씨알들을 멀리 날라줄지도 모를 낯선 것들에 대한 대접으로는 도에 지나친, 그 멍청한 희생을 무어라 설명해야 하나. 어느 날 당신은 고속도로에서 밤 운전을 하다가 갑자기 흰 눈송이 같은 것이 차 유리창을 스치고 헤드라이트 불빛에 떠오르는 것..
장석남, 옛 노트에서 그때 내 품에는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바람이 풀밭을 스치면풀밭의 그 수런댐으로 나는이 세계 바깥까지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만들 수 있었던가물 위에 뜨던 그 많은 빛들,좇아서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까지 내려와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그때는 내 품에 또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옹색하게 살았던가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
부코우스키, 두 명의 술꾼 나는 글을 좀 써보려고 했는데 생계에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더군. 내가 쓰는 거라곤 대개는 섹스 잡지 따위에나 실릴 그런 쓰레기들만 끼적대는 정도였어. 에디는 좀 그려 보려고 했는데 그런데 그도 별볼일은 없었지. 하지만 그는 나보다는 나은 게 있었는데 커다란 집에서 끝내 주게 예쁜데다가 그를 먹여 살리기까지 하는 애인과 함께 살았기 때문이지. 에디와 나는 항상 함께 술을 퍼마셨어. 우리는 일도 만만치 않게 많이 했지만 술 마시는 것만큼은 정말 확실하게 했거든. 그는 자기 그림을 집 지하실에 모아 두었어. 수백 개의 그림이 거기 겹겹이 쌓인 채 서로 달라붙어 있었지. 그는 언제나 노란색 물감만을 사용했고 거기다가 검은 잉크를 넣어 휘저었지. 노란색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이었고 그래서 나는 그의 그림이 마..
기형도, 위험한 가계-1969 1.그 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 여름 내내 그는 죽만 먹었다. 올해엔 김장을 조금 덜 해도 되겠구나. 어머니는 남폿불 아래에서 수건을 쓰시면서 말했다. 이젠 그 얘긴 그만하세요 어머니. 쌓아둔 이불을 등을 기댄 채 큰 누이가 소리질렀다. 그런데 올해에는 무우들마다 웬 바람이 이렇게 많이 들었을까. 나는 공책을 덮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잠바하나 사주세요. 스펀지마다 숭숭 구멍이 났어요. 그래도 올 겨울은 넘길 수 있을게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실거구. 風病에 좋다는 약은 다 써보았잖아요. 마늘을 까던 작은 누이가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지만 어머니는 잠자코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수건을 가만히 고쳐매셨다. 2아버지. 그건 우리 닭도 아닌데 왜 그렇게 정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