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
모호함도 할 말이 있다
방 한 귀퉁이 간이침대에 누워
시야에서 벗어나, 담배를 피우며,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는 사람처럼.
햇빛은 채광창을 뚫고 연필꽂이를 만드는 작업대 위로.
타자기 자판 위로 쏟아져 내리고 있다.
그것들에게 실제보다 더한 존재감을 실어준다. 진솔한 빛.
지구가 움찔댄다 이제 빈 커피잔이,
숫돌이, 손수건이, 자세를 잡는다
성스럽고 분명한 태도로, 빛의 요술지팡이로 고정된 채
마치 명상가가 마음속으로 그것들에게 집중하는 것처럼
오 숫돌 속에 담긴, 손가락처럼 쫙 펴진
다섯 개의 연필 속에 담긴 비밀이여!
한 가지를 골라내기 위해서라면 마음속의 열정만으로 충분하다.
모호함은 또 다른 얘기를 가지고 있으니.
폭풍의 경고
오후 내내 창문이 미끄러져 내렸다.
어떤 바람이 머리 위로 부는지,
어떤 잿빛 불안이 대지를 가로지르는지.
관측기보다 더 잘 아는 것 같았다
나는 덮개 씌운 의자 위에 책을 내려놓고
닫힌 창문 쪽으로 걸어간다. 나뭇가지들이
하늘을 향해 쭉 뻗은 것을 보면서
그리고 다시 생각한다. 공기가 방 안으로 들어와
기다림의 고요한 중심을 향해 움직일 때 종종 그러듯이
어떻게 시간은 단 하나의 목적으로 알 수 없는
은밀한 기류를 타고 이 극지까지
흘러왔을까. 바깥의 날씨와
마음속의 날씨는 똑같이 몰아친다
일기예보에 상관없이.
예견하기와 변화를 피하기
그 사이에 폭풍을 통제하는 모든 것이 있다
시계와 대기를 측정하는 장비들도 바꿀 수 없는
시간을 손에 쥐었다고 시간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며,
어떤 도구가 산산이 부서졌다는 것이
바람을 막았다는 증거가 되지도 않는다.
바람은 일기 마련이다.
우리는 다만 셔터를 내릴 뿐.
하늘이 컴컴해지면 나는 커튼을 친다
그리고 유리 덮개를 들어 초에 불을 붙이고 내려놓는다
문 열쇠 구멍으로 불어드는 바람에도, 다 메우지 못한 틈새로
구슬프게 울어대는 바람에도 끄떡없게.
이것은 그런 계절에 대응하는 우리의 유일한 방어기술이다.
이런 것은 우리가 배워야 했던 기술이다
불안정한 지역에 살고 있기에.
양파 까기
이 모든 눈물에 필적할 만큼의
슬픔을 가지고 있다면야!
내 가슴속엔 조금의 흐느낌도 없다.
페르 귄트처럼 바싹 마른 가슴으로
나는 양파 껍질을 깐다, 영웅도 아니고
그저 요리사로.
소리 내어 운다는 것은 일이었다,
내가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을 때는.
걸어가는 동안, 내 두 눈이 머리에 난
쓰라린 상처인 것만 같았다,
그래서 우체국 직원들이, 뚫어져라 쳐다보았던 것 같다.
그들이 짓고 있던 개의 표정, 고양이의 표정이 불로 지진 듯
뇌리에 선명하다
그러고도 남은 것은
연무처럼 뿌옇게 내 양쪽 폐를 채웠다.
양파를 썰어 담는 그릇 속에 떨어지는 이 오래된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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