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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니, 유령의 몫

무수한 실선들 사이들 떠돌고 있는 무수한 점선들을 바라보고 있었지. 잿빛 로비에 서서. 나는 여기에 있었어. 아니 너는 여기에 있었떤 적도 없었던 적도 없었어. 우리들은 있는 척하는 것에도 없는 척하는 것에도 서툴렀지. 아니, 있는 척하는 것에도 없는 척하는 것에도 지친 거겠지. 잿빛 로비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어. 바람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지. 여긴 창문이 없다, 없어요. 정말 바람이 말을 하는 것 같구나. 너는 고귀함을 몰라, 고귀함을. 역시 바람의 목소리야. 위의 입이 달싹였지, 들썩였지. 어딘가엔 창문이 있을 거야. 우리는 창문을 찾았지, 찾는 척했지. 딱히 할 일이 없기도 했어. 우린 자신에게만 골몰하는 사람이라는 걸 서로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것이 우리의 생을 고독하게 만들었지. 너로부터 나로부터 우리로부터 우리자신을 달아나게 만들었지. 아름다움이 막 시작되는 순간에. 아름다움이 막 사라지려는 찰나에. 우리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미 벌써 모든 걸 깨달았지, 모든 것을. 우린 평생 고독할 거야, 고독해질 거야. 고귀함은 어떤 순간에 도착하는 걸까, 고귀함은, 누구와도 닮지 않은 내밀한 외연을, 어쩌면 천상의 자질을, 자신도 모르게 드러낼 때. 그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떤 망각과 환각에 의해, 외부로부터 날아드는 타인의 시선의 힘으로. 진흙탕을 구를지라도 고귀함. 흙탕물을 뒤집어쓸지라도 고귀함. 그래, 고귀함, 고귀함. 그러니까 우리에게 더 많은 진흙탕이 필요해. 오랜 시간도 필요하지. 오해될 시간. 오해받을 시간. 창문은 없었어. 창문은 없는 척했어. 창문은 다른 모든 사물들의 특성을 그대로 갖고 있었지. 한마디로 특성 없는 특성을 간직하고 있었어. 사물이, 그 물질 고유의, 보이지 않는 소립자적인 차원에서, 물성을,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건 거짓말이야. 사물은 다만 거울처럼 반영할 뿐이야. 무엇을? 너는 물었고. 그걸 모르겠군. 나는 대답했고. 거울은 우리의 밖에 있지 않아, 거울은. 언제나 그렇듯 결정적인 말은 내 입속에만 머물러 있었고. 너는 입술을 깨물었지. 잊고 있었던 상처를. 잊고 있었던 결함을. 잊고 있었던 과오를. 잊고 있었던 우둔함을. 너 혹은 나의. 빨강 혹은 파랑의. 잊고 있었던 경멸과 환멸의 그림자를 목격한 사람처럼. 너는 입술을 깨물었지. 냉소의 빛이 입술을 푸르게 물들였지. 나중엔 잿빛으로. 너는 질렸고. 그래, 질렸다 질렸어. 너의 입술엔 피가 맺혔어. 우린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던 것 아니었나. 아마도. 이미. 벌써. 오래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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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빌 언덕이 없으면 독립하는 과정이 근사하지 않아. 그럼에도 청춘스러움, 아름다움, 우아함 같은 것이 제 삶에도 있다고 믿곤하지. 생계을 위해 많은 시간을 보내고, 별 상관도 없는 사람한테 상처 받으면서도, 잘하고 있다고 믿으면서 다시 힘을 내고, 비슷한 처지의 평범한 친구와 시시한 대화 속에 위로도 받고 서로를 인정하려 애쓰며 고귀함을 잃고 싶지 않아하지, 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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