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o

심보선, 삼십대

나 다 자랐다, 삼십대, 청춘은 껌처럼 씹고 버렸다. 가끔 눈물이 흘렀으나 그것을 기적이라 믿지 않았다. 다만 깜짝 놀라 친구들에게 전화질이나 해댈 뿐, 뭐하고 사니, 산책은 나의 종교, 하품은 나의 기도문, 귀의할 곳이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지, 공원에 나가 사진도 찍고 김밥도 먹었다, 평화로웠으나, 삼십대, 평화가 그리 믿을 만한 것이겠나, 비행운에 할퀴운 하늘이 순식간에 아무는 것을 잔디밭에 누워 바라보았다, 내 속 어딘가에 고여 있는 하얀 피, 꿈속에, 니가 나타났다, 다음 날 꿈에도, 같은 자리에 니가 서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너랑 닮은 새였다(제발 날아가지 마), 삼십대, 다 자랐는데 왜 사나, 사랑은 여전히 오는가, 여전히 아픈가, 여전히 신열에 몸 들뜨나, 산책에서 돌아오면 이 텅 빈 방, 누군가 잠시 들러 침만 뱉고 떠나도, 한 계절 따뜻하리, 음악을 고르고, 차를 끓이고, 책장을 넘기고, 화분에 물을 주고, 이것을 아늑한 휴일이라 부른다면, 뭐, 그렇다 치자, 창밖, 가을비 내린다, 삼십대, 나 흐르는 빗물 오래오래 바라보며, 사는 둥, 마는 둥, 살아간다 



-

어찌할 수 없는 소문


나는 나에 대한 소문이다 죽음이 삶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불길한 낱말이다 나는 전전긍긍 살아간다 나의 태도는 칠흑같이 어둡다

오지 않을 것 같은데 매번 오고야 마는 것이 미래다 미래는 원숭이처럼 아무 데서나 불쑥 나타나 악수를 권한다 불쾌하기 그지없다 다만 피하고 싶다

오래전 나의 마음을 비켜간 것들 어디 한데 모여 동그랗고 환한 국가를 이루었을 것만 같다 거기서는 산책과 햇볕과 노래와 달빛이 좋은 금실로 맺어져 있을 것이다 모두들 기린에게서 선사받은 우아한 그림자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쉽고 투명한 말로만 대화할 것이다 엄살이 유일한 비극적 상황일 것이다

살짝만 눌러도 뻥튀기처럼 파삭 부서질 생의 연약한 하늘 아래 내가 낳아 먹여주고 키워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정말 아무것도 없다 이 불쌍한 사물들은 어찌하다 이름을 얻게 됐는가

그렇다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이 살아 있음을, 내 귀 언저리를 맨돌며, 웅웅거리며, 끊이지 않는 이 소문을, 도대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

웃는다 웃어야 하기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래 

이 집 안에 더 이상 거창한 이야기는 없다 

다만 푸른 형광등 아래 

엄마의 초급영어가 하루하루 늘어갈 뿐 


엄마가 내게 묻는다, 네이션이 무슨 뜻이니? 

민족이요, 아버지가 무척 좋아하던 단어였죠 

그렇구나 

또 뭐든 물어보세요 

톰 앤드 제리는 고양이와 쥐란 뜻이니? 

으하하, 엄마는 나이가 드실수록 농담이 느네요 


나는 해석자이다 

크게 웃는 장남이다 

비극적인 일이 다시 일어난다 해도 

어디에도 구원은 없다 해도 

나는 정확히 해석하고 

마지막에는 반드시 큰 소리로 웃어야 한다 


장남으로서, 오직 장남으로서 

애절함인지 애통함인지 애틋함인지 모를 

이 집 안에 만연한 모호한 정념들과 

나는 끝까지 싸울 것이다 



바람이 빠진 아버지의 자전거를 타고 천변을 달릴 때 

풍경의 남루한 진실이 조금씩 드러난다 

꽃이 피고 지고 

눈이 쌓이고 녹는다 

그뿐이다 

그리고 간혹 얕은 여울에서 

윤나는 흰 깃털을 과시하며 날아오르는 해오라기 


오래 전에 나는 죽은 새를 땅에 묻어준 적이 있다 

그 이후로 다친 새들이 툭하면 내 발치로 다가와 쓰러지곤 하였다 

지저귐만으로 이루어진 유언들이란 얼마나 귀엽던지 


한쪽 눈이 먼 이름 모를 산새 한 마리 

이쪽으로 뒤뚱대며 다가온다 

지저귐, 새의 발랄한 언어가 없었다면 

그것은 단지 그늘 속에서 맴도는 검은 얼룩이었겠지만 



나는 엄마와 가을의 햇빛 속을 거닌다 

손바닥을 뒤집으니 손등이 환해지고 

따사롭다는 말은 따사롭다는 뜻이고 

여생이란 가을, 겨울, 봄, 여름을 몇 번 더 반복한다는 거다 


가을의 햇빛 속에서 

다친 새들과 나와의 기이한 인연에 대해 숙고할 때 

세상은 말도 안 되게 고요해진다 

외로워도 슬퍼도 엄마의 심장은 디덤디덤 뛰겠지만 


빌딩 옥상에서 뛰어내린 한 자살자는 

몸을 던지는 순간에 점프! 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의 심장은 멈추기 직전까지 

디디덤 디디덤 엇박자로 명랑하게 뛰었겠지만 


그늘 속에 버려진 타인의 물건들 

그 흔해빠진 손바닥과 손등들 

냉기가 뚜렷이 번져가는 여생을 어색하게 견디고 있다 

견뎌낼 것이다, 그래야만 하기에 



내게 인간과 언어 이외에 의미 있는 처소를 알려다오 

거기 머물며 남아 있는 모든 계절이란 계절을 보낼 테다 

그러나 애절하고 애통하고 애틋하여라, 지금으로서는 

내게 주어진 것들만이 전부이구나 


아아, 발밑에 검은 얼룩이 오고야 말았다 


햇빛 속에서든 그늘 속에서든 

나는 웃는다, 웃어야 하기에 

지금으로서는 

내게 주어진 것들만이 전부이기에 

지금으로서는 





-

종교에 관하여 


세기말을 지나 휘황한 봄날이다 

귀를 틀어막은 청소부가 실패한 비유들을 쓸어 담고 있는데 

꽃가루들은 사방에서 속수무책으로 흩날린다 

눈물을 획책하고 있는 저 미세한 말씀들, 지금은 

알레르기가 종교를 능가하는 시대라서 

파멸과 구원이 참으로 용이해졌다 



소식이라도 한번 주지 그랬니 

난 너무 외로워서 아무 병에라도 전염되었으면 하다가 

어제는 느지막이 강변에 나가 놀다 들어왔다 

니가 돌려보낸 편지봉투 속에 편지지처럼 

잘게 찢긴 달빛들이 물결 위로 흐르고 

밤하늘에 빼곡하게 뜬 별자리들 

그 하나하나에 일일이 귀의하고 싶더라 

너를 잊기 위해 나 그간 여러 번 개종하였다 



아침에 가출한 탕아가 

저녁밥 먹으려고 귀가하고 있다 

방랑의 증거로 꽃가루를 온몸에 묻히고 

사막에 나가면 눈이 너무 따끔거려요, 아버지 

얘야, 거긴 사막이 아니라 그냥 공원 놀이터란다 

어쨌든 내일 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어요 

필요한 것은 단단한 다짐이 아니라 신용카드 몇 장 



꽃가루처럼 산산이 부서져 흩날리는 생의 신비여 

십자가 위에서 으아, 기지개 피는 낙담한 신성이여 

이제 내 몸엔 구석구석마다 가지각색의 영혼들이 깃들어 있다 

다들 사소해서 다들 무고하다 





'po' 카테고리의 다른 글

david claerbout  (0) 2016.02.14
이제니, 유령의 몫  (0) 2015.11.24
조은, 언젠가는  (0) 2014.07.25
에이드리언 리치  (0) 2014.05.13
고형렬, 밤 미시령  (0) 2013.12.28
이성복, 원장면들  (0) 2013.09.12
장석남, 옛 노트에서  (0) 2013.07.30
부코우스키, 두 명의 술꾼  (0) 2013.06.30
기형도, 위험한 가계-1969  (0) 2013.03.29
아담 자가예프스키, 타인의 아름다움에서만  (0) 2013.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