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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루다, 오늘 밤 나는 쓸 수 있다 오늘 밤 나는 쓸 수 있다 제일 슬픈 구절들을. 예컨대 이렇게 쓴다 "밤은 별들 총총하고 별들은 푸르고 멀리서 떨고 있다" 밤바람은 공중에서 선회하며 노래한다. 오늘 밤 나는 제일 슬픈 구절들을 쓸 수 있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도 때로는 나를 사랑했다. 이런 밤이면 나는 그녀를 품에 안고 있었다. 끝없는 하늘 아래서 나는 연거푸 그녀와 키스했다. 그녀는 나를 사랑했고, 때때로 나도 그녀를 사랑했다. 누가 그녀의 그 크고 조용한 눈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늘 밤 나는 제일 슬픈 구절을을 쓸 수 있다. 이제 그녀가 없다는 생각을 하며, 그녀를 잃었다는 느낌에 잠겨. 광막한 밤을 듣거니, 그녀 없어 더욱 광막하구나. 그리고 시가 영혼에 떨어진다 목장에 내리는 이슬처럼. 내 사랑이 그녀를 붙잡아..
이근화 엔진 살아남기 위해우리는 피를 흘리고귀여워지려고 해최대한 귀엽고무능력해지려고 해 인도와 차도를 구분하지 않고달려보려고 해연통처럼 굴뚝처럼늘어나는 감정을 위해 살아남기 위해최대한 울어보려고 해우리는 젖은 얼굴을 찰싹 때리며 강해지려고 해 빵 이외의 것 삼십 미터 위의 나뭇잎나뭇잎기린의 입속 나뭇잎 나뭇잎나뭇잎도 미치고 말거야십오 분 동안 나뭇잎삼일 동안 나뭇잎그러나 나뭇잎으로 가릴 수 없는 것이 많다나는 빵 이외의 것은 믿지 않아빵이 찢어지면서 거짓말이 툭 튀어나올 때나의 입술은 왜 부풀어 오르는가 이토록 부드럽고 달콤하고 백색이어도 좋은가네 입속 일까지 관여할 수는 없어서커다란 손에 입 맞추고나는 바깥이 된다안녕안녕안녕그 다음은 무엇이 될까너의 손바닥에 들러붙어도 좋을까 네 손바닥으로부터비 오는 골목길처..
진은영, 혼자 아픈 날 말라가는 건초향기가 계단을 따라 올라오는 오후야 너를 기다리며 이파리 사이에 달린 검은 버찌알들 전부 빛나게 닦아놓았어 방문 앞엔 바람에 흔들리는 종이별을 문을 활짝 열지는 마, 약봉지들이 멀리 날아가네 먹지 않고 숨겨둔 알약들은 길 잃은 아이들의 손바닥에 가본 길로는 결코 되돌아가지 않을 오누이들에게 그럼 자작나무숲과 새들에게, 너에게만 말해줄게 내 몸엔 점이 여섯 개야 나는 오늘 과일칼을 깎았어 고통과 긴 이야기를 나누었지 그자는 살인에는 관심이 없대 아무래도 미치광이 같아, 아름답게 찌르는 일에 중독된 그리고 나는 검정 속의 오렌지 같아 아무래도 점점 흐릿해지는 이 병에서는 무슨 냄새가 날까? 페스트는 익은 사과냄새 홍역은 막 뽑은 깃털냄새가 난대 초록과 빨강 사이에서 문득 깨어나고 싶다면? 검지 ..
이준규, 내 마당 내 마당에는 매일 잉어 떼가 온다 무언가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며 파도의 산을 넘어 내 마당에는 매일 은행나무가 성큼성큼 다른 길을 내고 마치 사막의 설치류가 오솔길을 만들듯 내 마당에는 매일 청개구리가 폴짝폴짝 담을 쌓는다 담 사이에는 순간순간 이끼가 자라고 봉선화 피고 내 마당에는 담이 없고 내 마당에는 담이 하얗다. 내 마당에는 널 불렀더니 너는 훌쩍훌쩍 마당을 지우고 내 마당에 널 앉혔더니 너는 키득키득 마당을 맛있게 먹었다 내 마당은 너무 넓어 입구가 없고 내 마당은 너무 넓어 자꾸자꾸 죽기만 한다 내 마당에는 매일 잉어 떼가 오고 고통도 없고 절망도 없고 미래도 없고 사랑도 없다 내 마당은 커다란 배가 되고 나는 끝없이 노를 젓고 더 이상 동료도 없고 나는 땡볕에도 녹지 않는 얼음산을 향해 나아..
진은영, 방랑자, 집시의 시간, 러브어페어 오래 걸으면 장화 속의 공기가 붉은 솜처럼 젖어들었다 공터 폐타이어에 앉아 검은 무릎 위에서 불꽃을 날리는 작은 아이들 지붕의 암탉들 양철 처마 끝으로 따듯하고 하얀 달걀이 굴러 떨어진다 그는 천천히 지나간다 막사의 해진 빨래줄 아래 배배 꼬인 채 물방울 흘리는 여자들의 푸른 스타킹으로 이어진 국경을 따라 검은 숲은 몽상하는 자들의 어두운 초록빛 방패를 번쩍이며 도시에서 날아오는 대답을 막아내고 너도밤나무의 잘린 팔 같은 침목 위를 짓누르며 달려가는 기차바퀴 부서지며 날아오르던 잎새들 고요하게 떨어진다 모노레일 가로지르며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의 주변을 맴돌며 -저 기다란 두 개의 은빛 젓가락은 무얼 집으려는 거지? 회색의 축축한 풀들 수채 구멍 위의 머리카락처럼 붙어 있는 시냇가 들릴 듯 말 듯 흘러가는..
다니카와 슌타로, 네로 네로 -사랑받았던 작은 개에게 네로 이제 곧 여름이 온다 너의 혀 너의 눈 너의 낮잠 자는 모습이 지금 또렷이 내 앞에 되살아난다 너는 단지 두 번의 여름을 알았을 뿐이었다 나는 벌써 열여덟번째의 여름을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내 것과 또 내 것이 아닌 여러 여름을 떠올리고 있다 메종 라피트의 여름 요도의 여름 윌리엄즈 파크 다리의 여름 오랑의 여름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은 도대체 이미 몇 번 정도의 여름을 알고 있을까 하고 네로 이제 곧 또 여름이 온다 그러나 그것은 네가 있던 여름은 아니다 또 다른 여름 전혀 다른 여름인 것이다 새로운 여름이 온다 그리고 새로운 여러 가지를 나는 알아차린다 아름다운 것 미운 것 나를 힘차게 만들 것 같은 것 나를 슬프게 만들 것 같은 것 그리고 나는 묻는다 ..
채호기, 박쥐
김수영, 사랑의 변주곡 / 토끼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 사그라져가는 라디오의 재갈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 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3월을 바라보는 마른 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 속삭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 산이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 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우리의 밥찌기 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 이제 가시밭, 덩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 까지도 사랑이다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 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 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절도(節度)는 열렬하다 間斷(간단)도 사랑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심부름하는 ..
진은영, 우리는 어떻게 시를 쓸 것인가? - 생성과 문학 2005 가을 (http://closedbook.blog.me/)
강정 들판을 달리는 토끼 -준규에게 토끼라는 이름을 가진 이 소리는 당신이 밤새 두드리는 머릿속의 열기 한가운데 너른 벌판 을 열고 뛰어나올지 모른다 토끼라는 것이 가벼운 발과 소리나지 않는 입과 가늘게 찢어진 눈 옆에 길고 뾰족한 두 귀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당신은 불만을 표시해도 괜찮고 박수를 치며 환영해도 나쁘지 않다 토끼는 어쩌면 당신이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질문에 대한 대답일 수 있으므로 토끼는 달린다 토끼는 달린다 당신이 원하는 바로 그 대답이 아닌 토끼도 달리고 당신이 원하던 바로 그 토끼도 빠른 발로 대답하며 달아난다 여전히 대답하지 않는 저 먼 시간의 침묵까지 짊어진 토끼는 자기가 토끼라는 사실을 잊기 위해서라도 달린다 자기가 토끼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라도 달린다 토끼가 달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