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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이외의 것
삼십 미터 위의 나뭇잎
나뭇잎
기린의 입속 나뭇잎 나뭇잎
나뭇잎도 미치고 말거야
십오 분 동안 나뭇잎
삼일 동안 나뭇잎
그러나 나뭇잎으로 가릴 수 없는 것이 많다
나는 빵 이외의 것은 믿지 않아
빵이 찢어지면서 거짓말이 툭 튀어나올 때
나의 입술은 왜 부풀어 오르는가
이토록 부드럽고 달콤하고 백색이어도 좋은가
네 입속 일까지 관여할 수는 없어서
커다란 손에 입 맞추고
나는 바깥이 된다
안녕
안녕
안녕
그 다음은 무엇이 될까
너의 손바닥에 들러붙어도 좋을까
네 손바닥으로부터
비 오는 골목길처럼 부드럽게 풀려나온다면
빵 이외의 것에 대한 믿음도 솟아오르겠지만
나는 너무 남아돌아서 문제다
굶주린 사자처럼 나뭇잎을 센다
하나
둘
셋
그 다음은 너무 쉬운 것 같다
너는 지켜지지 않는 약속
믿음은 자라고
믿음은 부풀고
믿음은 터진다
동네 빵집을 탐구하듯
오래된 슈크림과 소보로를 무너뜨리듯
너를 무너뜨리고
빠른 속도로 나뭇잎 나뭇잎 나뭇잎
서서 자는 기린의 옆에 눕는다
허공이라는 달콤한 이불을 덮는다
영원토록 떨어지는 나뭇잎이 있다면
나뭇잎의 생도 그럴 듯해지겠지
반듯하고 차가운 병원 건물이 식빵 같았고
군침이 돌고 말았다
저 많은 병의 이름을 입속에 넣고 굴린다면
나의 얼굴과 너의 표정이 하나가 되는 마술이 펼쳐지겠지
대신에 나는 너를 주머니에 넣고 꾹꾹 눌렀다
꺼내서 조금씩 씹었다
목구멍으로 거짓말이 어렵게 넘어갔다
이제 나뭇잎을 주울 차례
네가 검은 새가 될 때까지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끝까지 거울을 본다
긴 손가락으로 빵을 찢는다
제발 조용히
널 위한 것이지만
날 위한 것이기도 해서
마음은 이런 것이겠지
차가워졌다 뜨거워졌다
아침에는 물컹해지고
창문을 열고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그걸 꼭 내 손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
내 목소리로 말할 때만 그런가
네 손에 들려 있을 때는 어떤가
하나의 입술 두 개의 눈동자
나도 인형
코끼리도 인형
구름도 물기가 없다
집도 공장도 바닥에 누워 휴식 중이다
굴뚝의 침묵은 어떡해야 하는지......
건강한 인형이나 아픈 인형
걱정 많은 인형이나 아무 생각 없는 인형
같은 소리를 내며 울거나 웃는다면
조금 무섭고
얼마 후에는 우습겠지
무서울 때나 우스울 때나
입술이 한 방향으로 일그러지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러니 오늘은 조용히 그림을 그린다
한 손에 들고 있는 것과 다른 손에 들고 있는 것이
조금 다르다
그림 속에서
너나 나는 의미가 없다
손을 잡으면
다섯 개 손가락이 하나의 덩어리
침묵이 고이고 뜨거워진다
코끼리도 인형
나도 인형
다다다다다 지붕 위로 떨어진 별들이
나의 그림 속으로 뛰어든다
시끄럽고 다정한 발들이다
물체 주머니
물체주머니 속에는 물체를 대표하는 것들로 가득하다 대표가 쏟아져 나올
때마다 와와 입이 벌어지고
이것이 세상의 물체라고 강조할 수 있어서 좋은데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이
생겨나도 물체주머니는 커질 수가 없다 입술만 늘어날 뿐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
내가 손가락으로 꺼낼 수 있는 일
세상의 물체를 늘어놓고
나는 주머니가 된 기분으로 더 작아지지는 못한다 두 개의 주머니는 될 수
없는 일 그래서 기분이 이런 것이군
모래나 고무, 톱밥이나 가죽을 삼킨 것과 같다 식도를 타고 십이지장을 지
나 위에 이르면 나는 정말 주머니와 같은 기분
장이 약한 사람들은 화장실을 들락거리고 장이 몽땅 빠져 나온 사람처럼
웃는다
내 것을 대신해 빠져나왔지만 둘이 될 수는 없다
시계바늘은 뾰족하지만 더 뾰족해지지 않고
나침반은 빙글거리며 돌지만 영원히 돌 수는 없고
다 잘 될 것이지만
물체는 대표성이 있고 주머니는 크기가 일정하다
너무 늦게 온 사람
오늘은 고무줄 맛이다
신문이 하루 먼저 나왔다 모나미 볼펜으로 미로를 따라가며 오후의 골목
을 풀어 놓는다 나는 친구가 없다
보도블록이 오늘도 발을 붙든다 미로는 열린 듯 흔들린다 흔들리
다가 가장 평범한 얼굴이 된다 나는 정말 친구가 없다
오늘의 문제는 너무 어렵다는 표정으로 별이 몇 개 뜬다
마지막 단계는 지혜를 시험해 네가 오늘 얼마나 착한 일을 했는지 골목에
부딪혀보면 안단다
이마가 먼저 닿을까 코가 먼저 닿을까
한쪽 눈에서 다른 쪽 눈으로 흘러드는 것이 있다면 그건 바닥을 닦으라는
조용한 명령
오늘은 엎드린 자세로 골목길을 빠져 나온다
이곳을 그런 곳이라 누가 정의했는지 언제나 늦게 온 사람들이 즐거운 곳
인데 나는 나의 친구까지 되어야 한다
아무도 잠들 수 없는 가시 철망 이분의 일의 침대 한 영혼과 다른 영혼이
뜻하지 않게 부딪친다
골목길이란 그런 곳 친구를 만나기에 부끄러운 곳
동네사람들이 모여 크게 웃는다면 골목길은 두려움에 빠지고 말거야 전봇
대가 쓰러지고 말거야
미로는 열렸다 닫히면서 나의 친구는 영원히 없다
약상자
알약은 기분이 좋다
길쭉하고 부드럽다
알약은 평등하다
아무도 그 쓴 맛을 모른다
부끄럼 없이
목젖을 사용했다
병신 병신 병신
두 번째는 걸렸다
손가락 맛이 전부다
상자를 닫았다
언제라도 열 수 있지만
어쩐지 부끄럽다
<수상소감>
딱딱하고 가지런한 이름
여러 개의 이름을 갖고 있다면 좋겠다. 날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리면 어떤 기분이 들까, 계절마다 이름을 바꾼다면 이 어수선한 봄날, 내게 어떤 이름이 어울릴까. 이름이 두 글자가 아니라면 또 어떨까. 오늘 나는 ‘고양이 목걸이를 하고 걸어가는 목 쉰 사람’ . 내일은 ‘ 꿈속의 물컹한 손가락’ . 이름이 없으면 좋을 것 같은 날도 있다. 그냥 나를 ‘빵’ 이라 불러 줬으면 좋을 것 같은날도 있다. 내가 쓴 작품들을 나의 긴 이름이라고 하면 어떨까. 그래서 내가길어지거나 뚱뚱해지거나 재밌거나 지루하거나. 그런데 오늘도 내 이름은 가지런하고 삐딱하다. 내 앞으로 우편물이 세 개 도착했다. 우리집 꼬마는 나와 좀 다른 것 같다. 자기가 좋아하는 걸 다 ‘까까 꼬꼬’ 라 부른다. 밥도 과일도 책도 텔레비전도 까까 꼬꼬가 있으면 좋겠다. 즐거워죽겠다는 듯이 아무나에게 손을 흔들고 무엇에게도 다 인사를 한다. 다 사랑할 수 없어서 나는날마다 다른 이름을 꿈꾸고 해매고 멈추고 넘어지는 것 같다. 나의 긴 이름을 불러주신 송준영, 이만식, 이수명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앞으로 좀 더창조적으로 살아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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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화/ 2004년『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칸트의 동물원』(2006),『우리들의 진화』(2009) 윤동주상 젊은 작가상. 김준성문학상 수상.
-계간《시와세계》2011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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