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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 혼자 아픈 날

말라가는 건초향기가 계단을 따라 올라오는 오후야
너를 기다리며 이파리 사이에 달린
검은 버찌알들 전부 빛나게 닦아놓았어 방문 앞엔
바람에 흔들리는 종이별을
문을 활짝 열지는 마, 약봉지들이 멀리 날아가네
먹지 않고 숨겨둔 알약들은
길 잃은 아이들의 손바닥에
가본 길로는 결코 되돌아가지 않을 오누이들에게

그럼 자작나무숲과 새들에게, 너에게만 말해줄게

내 몸엔 점이 여섯 개야 나는 오늘 과일칼을 깎았어
고통과 긴 이야기를 나누었지
그자는 살인에는 관심이 없대
아무래도 미치광이 같아, 아름답게 찌르는 일에 중독된
그리고 나는
검정 속의
오렌지 같아 아무래도 점점 흐릿해지는

이 병에서는 무슨 냄새가 날까?
페스트는 익은 사과냄새 홍역은
막 뽑은 깃털냄새가 난대

초록과 빨강 사이에서 문득 깨어나고 싶다면?
검지 손가락 위의 꿀 세 방울과 성난 말벌의 벌통 사이에서
화려한 접시 장식보다는 푸른 아스파라거스밭의 초조함 사이에서

오늘 밤엔 어떤 병을 앓고 싶니? 어떤 詩를?

내 몸엔 점이 여섯 개뿐이야
달아난 한 개를 찾으러 밤의 손가락이 무한히 길어지고 있어
잘려나간 밑둥들이 송진냄새 뿜어내는
그곳에서
마지막으로 너를 기다릴게





-
오늘 나는 기억을 해야 한다. 프란츠를 기다리는 일을 오늘 그만둘 것이기 때문이다. 기억하기 위해 애를 써야 한다. 애를 쓰면 아마 한 가닥 실이라도 간신히 붙잡을 수 있을 것이고, 그것에 매달려 공허를 통과하고, 거리가 말라 있던 그 밤으로 건너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죽을 정도로 지쳐 있는 것은 잘된 일 같다. 기억하는 일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기억을 막으려고 어떤 일을 하기에는 내가 너무 지쳐 있기 때문에 아마 좀 더 쉽게 기억을 해낼 것 같다. 슬픈짐승, 모니카마론




진은영, 나는


너무 삶은 시금치, 빨다 버린 막대사탕, 나는 촌충으로 둘둘 말린 집, 부러진 가위, 가짜 석유를 파는 주유소, 도마 위에 흩어진 생선비늘, 계속 회전하는 남침반, 나는 썩은 과일 도둑, 오래도록 오지 않는 잠, 밀가루 포대 속에 집어넣은 젖은 손, 외다리 남자의 부러진 목발, 노란 풍선 꼭지, 어느 입술이 닿던 날 너무 부풀어올랐다 찢어진





진은영, 나에게


하얀 소녀의 가슴처럼 머뭇거리며
조금씩 볼록해지는 의문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슬프고 흐릿한 오후들이여 안녕
금관악기들의 아름다운 구멍들이여 안녕
닫힌 책의 검은 표지들이여 안녕


뜨거운 빵의 흠집 없는 표면들이여 안녕
갈라지는 틈에서 태어나는 감각들
모닥불 위에 놓인 거북의 껍질처럼


딱딱한 책을 태워라
무엇인가 점쳐라
우연을 사랑하라


책 속의
불은 꺼졌다
난로 위에 무엇을 올렸는지 기억하지 마라


주사위는 던져졌다
의미보다 넓은 말-무성한 풀밭 위에
숫자는 숨겨졌다 유황냄새로 숲을 감싸고
진동의 발명가가 돼라


마지막 시를 달라
이 사물은 미학적으로 낡았지만 마음을 이동시킨다
저곳에서 이곳으로


흔들리는 물그릇같이 젖는 시인
늘 폐허로 돌아오는 사람
부서진 벽 너머 길게 펼쳐진 하늘 깃털을 좋아하는 사람
파란 깃털들이 천천히 내려앉는다
쟈스민 지뢰, 들장미넝쿨의 낡은 탱크 위에
여자와 아이들의 구멍난 얼굴 위에
깨진 목욕통에
가득 채울 물의 표정을 달라


실패한 시인
실패한 혁명
불꽃
분홍 플라스틱의 고약한 연기 속에서


다시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
물속의 불꽃들


* Aamuel Becket, Nohow On (1989)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키에르케고르가 미성숙함에 대해 말하길 "자연인과 그리스도인과의 관계는 아이와 어른과의 관계와도 같다. 아이에게 무서운 것이 어른에게는 아무렇지도 않다. 아이들은 무엇이 두려운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을 어른은 알고 두려워한다. 아이의 불완전성은 바로가 무서운 것을 모르는 데 있다. 그러기에 아이는 무서워할 필요가 없는 것도 두려워하게 된다. 자연인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는 정말 두려운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공포를 떠나지를 못하고 있다. 아니 그는 전혀 무섭지 않은것을 두려워한다," 

   참으로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다운 말이지만 그말을 달리 생각해보면 사소한 것들에 대한 두려움은 어린 시절의 특권 같은것. 엄마 없는 저녁이 무섭고 달빛에 어른거리는 커튼의 하얀 프릴이, 어둠 속 유리창문 덜컹거리는 소리가 무서웠던 시절. 그러나 가장 무섭던 것은 벼랑이나 나무 꼭대기같이 아주 높은 데서 혼자 떨어지는 꿈.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며 울다 깨면 키가 훌쩍 크는 꿈이란다. 토닥여주시던 할머니. 몸과 마음이 쑥쑥 자라느라 그토록 두려운게 많았던 시절.

   그러나 나이를 먹어서도 왜 두려움은 가시지 않는지. 이 알량한 사회적 지위를, 사람들의 얄팍한 호감을, 아무도 훔쳐갈 일 없는 자존심을 잃게 될까봐 꼭 해야 했으나 하지 않은 말, 진심으로 열망했으나 하지 못한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러므로 어른이 된다는 것은 멋진 다이빙 선수가 된다는 것. 가장 아름다운 포즈로 낮은 곳으로, 어둡고 깊은 곳으로 두려움 없이 떨어지는 법을 알게 된다는 것. 그것이 성장하는 것. 그러니 오늘은, 오늘만큼은 애써 올라간 곳에서 즐겁고 멋지게 추락하는 걸 한 번 연습해보기. 푸르름의 드높은 꼭대기에서 한 시절을 지내고 아무런 주저함 없이, 붉고 노란 손을 흔들며 훌훌 떨어지는 나뭇잎들 사이에서. 





 <두려움 없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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