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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 방랑자, 집시의 시간, 러브어페어

오래 걸으면
장화 속의 공기가
붉은 솜처럼 젖어들었다

공터 폐타이어에 앉아
검은 무릎 위에서
불꽃을 날리는 작은 아이들
지붕의 암탉들
양철 처마 끝으로 따듯하고 하얀 달걀이 굴러 떨어진다

그는 천천히 지나간다
막사의 해진 빨래줄 아래
배배 꼬인 채
물방울 흘리는
여자들의 푸른 스타킹으로 이어진 국경을 따라

검은 숲은
몽상하는 자들의 어두운 초록빛 방패를 번쩍이며
도시에서 날아오는 대답을 막아내고

너도밤나무의 잘린 팔 같은 침목 위를
짓누르며 달려가는 기차바퀴
부서지며 날아오르던 잎새들
고요하게 떨어진다
모노레일 가로지르며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의 주변을 맴돌며
-저 기다란 두 개의 은빛 젓가락은
무얼 집으려는 거지?

회색의 축축한 풀들
수채 구멍 위의 머리카락처럼 붙어 있는 시냇가
들릴 듯 말 듯 흘러가는

징검다리. 십이월 초. 흠뻑 젖은 양말로
이 별에서 저 별로
한 소녀에서 다른 소녀에게로
영원한 녹색에서 영원한 회색으로
건너뛰면서

대답해보아
나는 누구의 연인인가?
얼어붙은 자신의 발들에게
마지막으로 그는 물었다

 

ㅡㅡㅡ


검교 뾰족한 모자를 쓴 여자, 교훈을 싫어하는 여자다
권태로 새하얘진 아이들의 혓바닥을 칼로 긁어내며
자두향기 쏟아지는 그늘로 데려갔다

그녀는 우리의 작은 귓속에 술을 부었다
처음 마신 포도주 같은 이야기들
보랏빛 가죽주머니에선 날카로운 시간을 꺼내주었다

없을 땐
마시던 술병을 내리쳤지
그녀와 함께 누운 모래밭의 밤하늘
검은 미꾸라지들이 반짝이는 유리조각에 찔리며
파닥거렸다

더 캄캄한 날엔
그녀가 쏟아졌지. 사내아이들의 몸속으로
어두운 복도에 달린
단 하나의 좁은 창문으로
달빛이 쏟아지듯

또 무엇을 훔칠 수 있을까?
불은 꺼졌고 공기는 한없이 차가운데

아이들의 흰 목덜미에 은하수처럼 길게 빛나는 스카프를
칭칭 감아주고
검은 기차를 타고서 그녀는 떠났다

선 밖으로 몸을 내미는 것은 위험합니다
플랫폼 푯말을 쓰러뜨리며
창밖으로 가슴을 내밀어 마지막 인사를 해주었지

우리는 하늘처럼 파란 젤리를 씹으며
오래 묵은 담배냄새가 피어나는 꽃잎무늬 소파에 앉아
그녀가 보낸 엽서들을 큰 소리로 따라 읽었다

얘들아, 도시가 점점 납작해져
끈적거리는 누런 기름접시처럼 납작해지면
내가 준 참나무 설거지통에
담가주길

또는, 새로 만든 도시의 카탈로그를 동봉한다

밤공기의 부드러운 혀를 찢고
그녀의 모자가 별처럼 솟아오르길

작은 아이들은 공책 밖으로 삐져나오는 글씨 연습을 하고
조금 자란 아이들은 황도대 밖으로 새들을 쫓으며

계속되는 추위 속에서
우리는
그녀가 두고 간 탬버린처럼 몸을 떨었다

 

ㅡㅡㅡ

 

그런 남자랑 사귀고 싶다
아메리카국경을 넘다
가슴에 총맞은 흰 셔츠의 멕시코청년
너와
결혼하고 싶다
바그다드로 가서
푸른 장미
꽃봉오리 터지는 소리가
폭탄처럼 크게 들리는 고요한 시간에
당신과 입맞춤하고 싶다
학살당한 손들이 치는
다정한 박수를 받으면서.

크고 투명한 물방울 속에
우리는 함께 누워
물을 것입니다
지나가는 초록 물고기에게,
학살자의 나라에서도
시가 쓰여지는 아름답고도 이상한 이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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