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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과 시 고요한 오렌지 빛이근화말라붙은 우유 자국과 오래된 과자의 눅눅함은 어디로 가는가 당신의 웃음소리와 눈빛은 별의 것이 되어도 좋은가 시간의 주름 속에서 쏟아진 나비 떼가 찐득한 어둠의 내력을 팔랑팔랑 다시 적는다전쟁 중에는 누구나 기도하는 법을 배운다고 그랬지 별에 입술을 달아 준다면 평화로운 주문들이 골목길에 쏟아지겠지만 동굴 속 사람들의 첫 기도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굴뚝을 통해 별빛과 은혜가 쏟아졌을까 몇 개의 부서진 기둥만으로 신들은 만족하는 것 같지 않아여름밤의 더위가 당신의 이마에 금세 몇 개의 땀방울을 만든다 주름을 타고 모호한 주문처럼 흘러내린다 평범한 연인들처럼 나란히 앉아 노을에 물들까 신발 속 해변이 주머니 속 밤하늘이 좀 더 큰 우리를 낳는다 사탕처럼 추억 하나를 오래 빨아먹는다면아이들..
김행숙, 옆에 대하여 옆에 대하여 1 어느 날 아침 내가 침대에서 본 남자는 죽어 있었다. 더 이상 회사에 출근하지 않아도 되니, 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실컷 자고 오후엔 우리 소풍을 가요. 나는 남자 옆에서 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잤다. 해변은 휘어져 있었다. 그런 옆에 대하여, 노을에 대하여, 화염에 대하여, 그네에 대하여, 손을 흔들며 뛰어갔다. 옆에 대하여 2 이제 말 울음소리는 뚝 그치고, 양호실에 가서 좀 누워 있으렴. 켜튼을 치고, 갈기와 바람에 대해 떠들렴. 나도 언젠가 그런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애. 옆엔 어떤 아이가 누워 있을까요? 왜 모두들 내게 잠을 권할까요? 내 무릎에 알코올을 발라준 여자도 그랬어요. 그녀는 날아갈 것처럼 청결해요. 그리고 나는 앞발을 들고 서 있었어요. 양호실은 쓰러지기 위해..
오탁번 폭설(暴雪) / 오탁번 삼동(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남도(南道) 땅끝 외진 동네에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간밤에 또 자가웃 푹설이 내려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렸다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워메, 지랄나부렀소잉!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온 천지(天地)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하느님이 행성..
최승자 인터뷰 "내가 살아있다는 건 '루머'… 3평짜리 고시원을 전전해" 밥 안먹지만 취미는 요리,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아… 난 기초생활수급 대상자 흘러가지 않는 저 세월은 내게 똥이나 먹이면서 나를 무자비하게 살려둬"어떤 강박감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귀에서 환청(幻聽)이 들리고 내가 헛소리를 마구 내뱉고 있었지요." 시인 최승자(58)의 음성에서 쇳소리가 났다. 살가죽이 겨우 붙은 얼굴과 그 속의 쑥 파인 눈, 마른 막대기 같은 몸피를 숫자로 환산하면 키 149cm 체중 34kg이 된다. ▲ 시인 최승자는“시를 계속 쓸 것이고, 밥만 잘 먹으면 된다”고 말했다. /최보식 기자시인의 외양이 따로 있을 순 없다. 하지만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쪽 다리에 찾아온..
세사르 바예호 너는 아까 다른 일 때문에 여기 왔었지.그리고 지금은 가 버렸구나. 이 구석에서어느 날 밤, 네 곁에서,너의 부드러운 품 안에서도데의 콩트를 읽었지. 사랑이있던 자리야. 잊지 마. -프릴세XV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안데스 산촌의 다정한 나의 리타!늘씬한 몸매에 까만 눈의 소녀.이 대도시에서 나는 질식해 죽어가고, 피는 몸 안에서흐느적대는 코냑처럼 졸고 있는데...하이얀 오후를 꿈꾸며기도하는 자세로 다림질하던 그 손은 어디 갔을까?이 빗속에서 나는살아갈 의욕조차 없는데어떻게 되었을까? 그녀의 플란넬 치마,그녀의 꿈, 그녀의 걸음걸이는.5월의 사탕수수 맛, 그녀.문 앞에 서서 저녁 하늘을 바라보고 있겠지.그러다 오스스 떨면서 말할 거야. "어쩜...... 이렇게 춥담."들새 한 마리 지붕에 앉아서 울고..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 어느늦은 저녁 나는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김이 피어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그 때 알았다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지금도 영원히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 어느 늦은 저녁 나는 내가 가진 모든 생생한 건부스러질 것들 부스러질 혀와 입술따뜻한 두 주먹 부스러질 맑은 두 눈으로 유난히 커다란 눈송이 하나가검은 웅덩이의 살얼음에 내려앉는 걸 지켜본다 무엇인가반짝인다 -저녁의 소묘 4 푸르스름한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밤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찾아온 것은 아침이었다. 한 백년 쯤시간이 흐른 것 같았는데내 몸이 커다란 항아리 같이 깊어졌는데 허와 입술을 기억해내고나는 후회했다 알 것 같다. 일어서면 다시 백년 쯤볕 속을 걸어야한다. 거기 저녁 잎사귀다른 빛으로 몸 뒤집는다 캄캄히잠..
진은영, 그림 일기 그런 날이면 창백한 물고기에게 황금빛 수의를 땅이 내준 길만 따라 흐르는 작은 강물에게 거미의 다리를 무엇에 차이기 전에는 아무 데도 가지 못하는 돌멩이에게 이쁜 날개를 한 번도 땅의 가슴을 만져본 적 없는 하늘에게 부드러운 손가락을 높은 곳에서 떨어져본 마음을 더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마음 받아주는 두 팔을 높은 곳에 올라가기 전에 네 곁으로 가는 다리를 그러나 높은 곳에서 떨어져 이미 삐뚤어진 입술을 그 입술의 미세한 떨림을 그 떨림이 전하지 못하는 신음을 크게 그려줘 내 몸에 곱게 새겨줘 그런 날이면 망친 그림을 잘못 그려진 나를 구기지 말아줘 버리지 말아줘 잘못 그려진 나에게 두껍게 밤을 칠해줘 칼자국도 무섭지 않아 대못도, 동전 모서리도, 그런 날이면 새로 생긴 흉터에서 밑그림 반짝이는 그런 날..
좋은일들, 물속에서 심보선, 좋은일들 오늘 내가 한 일 중 좋은 일 하나는 매미 한 마리가 땅바닥에 배를 뒤집은 채 느리게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준 일 죽은 매미를 손에 쥐고 나무에 기대 맴맴 울며 잠깐 그것의 후생이 되어준 일 눈물을 흘리고 싶었지만 눈물이 흐르진 않았다 그것 또한 좋은 일 중의 하나 태양으로부터 드리워진 부드러운 빛의 붓질이 내 눈동자를 어루만질 때 외곽에 펼쳐진 해안의 윤곽이 또렷해진다 그때 나는 좋았던 일들만을 짐짓 기억하며 두터운 밤공기와 단단한 대지의 틈새로 해진 구두코를 슬쩍 들이미는 것이다 오늘의 좋은 일들을 비추어볼 때 어쩌면 나는 생각보다 조금 위대한 사람 나의 심장이 구석구석의 실정맥 속으로 갸륵한 용기들을 알알이 흘려보내는 것 같은 착란 그러나 이 지상에 명료한 그림자는 없으니 나는 이제..
심보선+김소연 <새> 1.김소연 낭독 2011년 12월 12일 (@문지문화원 사이) + 2.심보선 낭독 2011년 10월 2일 (@살롱드팩토리) = 새 심보선 우리는 사랑을 나눈다.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아주 밝거나 아주 어두운 대기에 둘러싸인 채. 우리가 사랑을 나눌 때, 달빛을 받아 은회색으로 반짝이는 네 귀에 대고 나는 속삭인다. 너는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너는 지금 무슨 생각에 빠져 있는가. 사랑해. 나는 너에게 연달아 세 번 고백할 수도 있다. 깔깔깔. 그때 웃음소리들은 낙석처럼 너의 표정으로부터 굴러 떨어질 수도 있다. 방금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 미풍 한 줄기. 잠시 후 그것은 네 얼굴을 전혀 다른 손길로 쓰다듬을 수도 있다. 우리는 만났다. 우리는 여러 번 만났다. 우리는 그보다 더 여러 번 사랑..
나무를 모르는 나무 바람이 몹시 분다. 이름도 모르는 벌판에서 나무가 뭔지도 모르면서 나무로 살았다. 저 멀리 벌판 끝으로 눈물이 가득 들어찬 눈동자들이 눈물의 의미도 모르면서 반짝반짝 글썽인다. 여기는 어디일까. 나무는 생각하는 법도 모르면서 제목도 모르는 책 앞에서 턱을 괸다. 위층 어딘가에서 웅얼웅얼 아기를 달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곧 익숙해질 거야. 살아서 잠드는 일에 대해 살아서 깨어나는 일에 대해 이름도 모르는 벌판의 낯선 태양과 살아서 마주치는 일에 대해. 바람이 몹시 분다. 바람이 뭔지도 모르면서 두려움 없이 바람 소리를 듣는다. 나무가 뭔지도 모르면서 나무로 살아온 것처럼. 눈동자들은 벌판의 끝으로 굴러가 있고 눈물의 의미도 모르면서 자꾸만 반짝반짝 글썽인다. 황성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