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o

세사르 바예호

너는 아까 다른 일 때문에 여기 왔었지.

그리고 지금은 가 버렸구나. 이 구석에서

어느 날 밤, 네 곁에서,

너의 부드러운 품 안에서

도데의 콩트를 읽었지. 사랑이

있던 자리야. 잊지 마.


-프릴세XV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안데스 산촌의 다정한 나의 리타!

늘씬한 몸매에 까만 눈의 소녀.

이 대도시에서 나는 질식해 죽어가고, 피는 몸 안에서

흐느적대는 코냑처럼 졸고 있는데...

하이얀 오후를 꿈꾸며

기도하는 자세로 다림질하던 그 손은 어디 갔을까?

이 빗속에서 나는

살아갈 의욕조차 없는데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의 플란넬 치마,

그녀의 꿈, 그녀의 걸음걸이는.

5월의 사탕수수 맛, 그녀.

문 앞에 서서 저녁 하늘을 바라보고 있겠지.

그러다 오스스 떨면서 말할 거야. "어쩜...... 이렇게 춥담."

들새 한 마리 지붕에 앉아서 울고 있겠지.


- 먼 그대




난 지금 혼자 점심을 먹었다, 혼자서

어머니도, '좀 먹어라'도, '어서 들어'도, 물도 없이

아버지도, 옥수수빵을 놓고 식사 전 기도하는 풍성한 예식도

왜 아버지가 늦느냐는 소리도, 그 모습도

아버지의 그 굵직한 음성도, 아무것도 없이.


내가 어떻게 식사를 했으랴. 어떻게 그 먼 음식들을,

자기 집이 모두 없어지고, 어머니라는 말도 입에서

안 나올 때

어떻게 그 먼 것들을, 어떻게

그 아무것도 없는 것을 먹을 수 있었으랴.


한 좋은 친구의 식탁에서 난 점심을 먹었다.

금방 세상에서 돌아온 그의 아버지와 함께,

그 점잖은 백발과 함께, 그 백자에서 나는 소리 같은

들릴 듯 말 듯 조용한 말소리를 들으며

홀아비가 다된 잇몸으로부터 비실비실 새어 나오는

소리를 들으며:

나이프와 포크가 거침없이 즐겁게 딸랑대는 식탁,


자, 자기 집처럼 편히 생각하라구. 아 그 맛!

이 식탁의 칼질이

내 온 혓바닥에 아파 왔다.


이런 식탁의 점잖은 식사, 거기 과시되는

내부의 사랑 대신 외부의 사랑은

입에 들어가는 것마다 흙이 된다.

어머니가 쏟아주지 않는 음식은

넘기기가 어려워 배탈이 난다. 사탕은

소태다. 커피는 장례식 향유.


자기가 살던 집이 모두 없어졌을 때,

어머니의 '어서 들어'가

다시는 무덤에서 나오지 않을 때,

어두운 부엌 속에 바닥난 사랑.


- 시




안또니아 아줌마도 죽었다. 시골마을에서 제일 싼 빵을 만들던, 늘 목이 쉬어 있던 여자. 산띠아노 신부도 죽었다. 우리 젊은이나 처녀들이 인사하는 것을 제일 좋아하시던. 인사할 때마다 한결같이 답을 해주시곤 하셨지. 호세, 안녕! 마리아도 안녕!


그 금발머리 아가씨 까를로따도 죽었다. 몇 달 안된 갓난아기 하나를 남겨두고. 아이도 엄마 죽은지 여드레만에 죽고 말았다.


나의 아줌마 알비나도 죽었다. 전래 동요와 풍습과 세월을 노래하곤 하시던 아줌마. 토방마루에서 집안 하녀인 곱디곱던 여인 이사도라를 위해 바느질을 하시다가 돌아가셨다.


한 외눈박이 노인도 죽었다. 그 이름은 생각이 안난다. 하지만 동네 어귀의 함석장이 집 문 앞에서 노상 주저 앉아 아침 햇살을 받고 졸곤 하셨다.


라요도 죽었다. 내 키만큼 큰 개 한 마리, 누군가 길가는 사람의 총을 맞고 죽었다.


루까스도 죽었다. 허리 가득 평화를 안고 다니던 나의 외삼촌. 비가 오면 나는 외삼촌이 생각난다. 그러나 내 경험 속에는 아무도 없다.


나는 권촉 속에서 나의 어머니는 죽었다. 나의 주먹 속에서 나의 누이는 죽었다. 나의 피투성이 허벅지 속에서 나의 동생도 죽었다. 계속 되는 세월의 8월에 모두 죽었다. 슬픔의 슬픈 핏줄로 이어진 세 사람.


악사 멘데스도 죽었다. 키가 크고 술이 항상 곤드레만드레가 되어 있던. 나팔로 옛날 슬픈 곡조를 따라랑 거리면 그 처량한 음악 소리에 우리 마을 암탉들이 해도 지기 전에 잠들곤 했던.


나의 영원은 죽었다. 그리고 나는 그 죽음을 보고 있다.


- 시간의 횡포

'po'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심보선, 도시적 고독에 관한 가설  (0) 2012.09.03
별과 시  (0) 2012.08.27
김행숙, 옆에 대하여  (0) 2012.07.22
오탁번  (0) 2012.07.18
최승자 인터뷰  (0) 2012.07.13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  (0) 2012.04.04
진은영, 그림 일기  (0) 2012.03.18
좋은일들, 물속에서  (1) 2012.03.16
심보선+김소연 <새>  (0) 2012.03.15
나무를 모르는 나무  (0) 2012.0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