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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탁번

폭설(暴雪)   /   오탁번

 

 

삼동(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南道)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푹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天地)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行星)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내렸다

 

좃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宇宙)의 미아(迷兒)가 된 듯 울부짖었다

-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엘레지  / 오탁번

 

말복날 개를 잡아 동네 술추렴을 했다

가마솥에 발가벗은 개를 넣고

땀 뻘뻘 흘리면서 장작불을 지폈다

참이슬 두 상자를 다 비우면서

밭농사 망쳐놓은 하늘을 욕했다

술이 거나해졌을 때

아랫집 김씨가 나에게 말했다

-이건 오씨가 먹어요, 엘레지요

엉겁결에 길쭉하게 생긴 고기를 받았다

엘레지라니? 농부들이 웬 비가(悲歌)를 다 알지?

-엘레지 몰라요? 개 자지 몰라요?

30년 동안 국어선생 월급 받아먹고도

'엘레지'라는 우리말을 모르고 있었다니!

그날 밤 꿈에서 나는 개가 되었다

가마솥에서 익는

나의 엘레지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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