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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

별과 시

고요한 오렌지 빛
이근화

말라붙은 우유 자국과 오래된 과자의 눅눅함은 어디로 가는가
당신의 웃음소리와 눈빛은 별의 것이 되어도 좋은가
시간의 주름 속에서 쏟아진 나비 떼가
찐득한 어둠의 내력을 팔랑팔랑 다시 적는다

전쟁 중에는 누구나 기도하는 법을 배운다고 그랬지
별에 입술을 달아 준다면 평화로운 주문들이 골목길에 쏟아지겠지만
동굴 속 사람들의 첫 기도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굴뚝을 통해 별빛과 은혜가 쏟아졌을까
몇 개의 부서진 기둥만으로 신들은 만족하는 것 같지 않아

여름밤의 더위가 당신의 이마에 금세 몇 개의 땀방울을 만든다
주름을 타고 모호한 주문처럼 흘러내린다
평범한 연인들처럼 나란히 앉아 노을에 물들까
신발 속 해변이 주머니 속 밤하늘이 좀 더 큰 우리를 낳는다
사탕처럼 추억 하나를 오래 빨아먹는다면

아이들은 부드러운 가슴에 별을 지니고
현명한 늙은이는 죽으면 별이 되겠지만
가늘고 긴 유리관 속에서 색색의 모래알들이 흘러내릴 때
서로 다른 의문과 비밀이 잇닿은 곳에서
우리의 심장은 뜨거워지다가 차가워지다가

나는 밤하늘의 별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편은 못 되지만,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시간에 별들이 태어나고 죽어 간다는 것에는 여전히 경외감을 갖고 있다. 우주의 먼지들이 뭉치고 구르다가 우연히 서로 부딪쳐서 더 큰 존재들이 되어 가는 것에는 정말 이유가 있을까? 세상에는 알 수 없는 일이 많아서 사람들이 눈을 반짝일 때, 사람들의 눈으로 별이 옮겨 간다. 저마다 품고 있는 생각이 같지 않아서 서로 다른 말들을 주고받고 오해라는 더 큰 것을 낳고. 나는 그것이 별보다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서로 다른 시계를 갖고 있지만 우리는 만나서 토마토 수프를 훌쩍거릴 수 있으니까. 그런 시간들이 지난 후에 사람은 사라지는데, 정말 별이 되는 거라고 믿어도 될까. 어제까지 입김이 따뜻했는데 이제는 없는 사람의 곁에서 내 가슴은 뜨거워지다가 차가워지다가.
이근화
1976년 서울 출생. 200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칸트의 동물원』이 있다.
명왕성에서 2
김소연

잘 있다는 안부는 춥지 않다는 인사야. 고드름 종유석처럼 플라스틱처럼. (너는 전기난로를 장만하라 말할 테지만.) 덕분에 나는 잘 있어. 이곳은 뺄셈이 발달한 나라. 한낮에도 별 떴던 자리가 보여. 사람이 앉았다 떠난 방석처럼 빛을 이겨 낸 더 밝은 빛처럼 허옇게 뚫린 자리가 보여. 그때는 별의 모서리를 함부로 지나던 새의 날갯죽지가 베이지. 하루하루 그걸 바라보고 있어.

말해 줄게. 나의 진짜 안부를. 네가 준 온도계는 미안하게도 쓸모가 없었다는 것도. 네가 준 야광별자리판은 쓸모를 다한다는 것도, 밤낮 칠흑이라 밤낮 빛을 낸다는 것도. (너는 다행이라고 말할 테지만.) 새들은 고드름 종유석 구멍에다 둥지를 틀지. 강아지는 플라스틱으로 배를 채우지. 나는 날마다 뺄셈을 배우지. 나는 점으로 접혔다가 한낮에만 잠시 부풀어 오르는 작은 구슬이 되었어. 생각지 못했던 사물들과 하루하루 친밀해지는 시간들이야.

내 별자리는 천칭좌지만, 올해에는 명왕성좌로 살기로 했다. 명왕성에 대해 내가 아는 건 태양계에서 제외된 별이라는 것과 태양으로부터 아주 먼 별이라는 것뿐. 그래도 올해에는 명왕성좌로 살기로 했다. 그래서 올해에는 명왕성좌 대표로서, 내 별자리의 신화도 만들고 상징과 이야기도 손수 만들어 가기로 했다. 내가 명명하건대, 명왕성좌는 이별한 자들을 위한 망명지다. 어쩐지 명왕성과 잘 어울린다. 나야말로 이별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연애한다고 믿는 모든 국면과 사랑한다고 믿는 모든 사물과 친밀하다고 믿는 모든 타인과 그러해야 한다고 믿는 모든 사상의 뒷모습을 참으로 열심히 바라보는 사람이니까. 그 뒷모습에는 언제나 이별의 기미가 있고, 나는 그걸 알아채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 듯하다. 이별이라는 것은 이 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가 가장 혹독하게 배우는 전술이자, 이 별에서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자들을 위한 유일무이한 신앙 같다.
김소연
1967년생. 1993년  <현대시사상>으로 등단. 
시집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산문집 『마음사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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