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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행숙, 옆에 대하여

옆에 대하여 1

 

 

어느 날 아침 내가 침대에서 본 남자는 죽어 있었다. 더 이상 회사에 출근하지 않아도 되니, 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실컷 자고 오후엔 우리 소풍을 가요. 나는 남자 옆에서 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잤다.

 

해변은 휘어져 있었다. 그런 옆에 대하여, 노을에 대하여, 화염에 대하여,

 

그네에 대하여, 손을 흔들며 뛰어갔다.




옆에 대하여 2

 

 

이제 말 울음소리는 뚝 그치고, 양호실에 가서 좀 누워 있으렴. 켜튼을 치고, 갈기와 바람에 대해 떠들렴. 나도 언젠가 그런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애.

 

옆엔 어떤 아이가 누워 있을까요? 왜 모두들 내게 잠을 권할까요? 내 무릎에 알코올을 발라준 여자도 그랬어요. 그녀는 날아갈 것처럼 청결해요. 그리고 나는 앞발을 들고 서 있었어요.

 

양호실은 쓰러지기 위해 오는 곳이야. 저 아이처럼. 저 아이 옆에 누워서 종이 칠 때까지 앞발과 갈기와 바람에 대해.




 

옆에 대하여 3

 

 

마라톤 세계의 여왕 래드클리프는 아주 잘 잡니다. 잠은 언제나 흑색의 보약입니다. 올림픽은 이틀 후에 개막됩니다.

그때까지 잘 수도 있습니다. 너무나 평화롭습니다. 평화는 시계와 경쟁했습니다. 사랑도 전쟁도 시계와 경쟁했습니다.

 

마라톤도 시계와 경쟁했습니다. 코치는 시계를 백번 쳐다보고, 나는 천 번 질투했습니다. 그는 좀도둑 같습니다. 여왕이 마루에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점점 길어집니다.

 

그녀가 달립니다. 고독해 보이지 않습니다.

 

함께 시간이 달리고 있습니다. 여왕의 긴 팔은 두 개.

 

여왕의 긴 다리는 두 개. 나는 그녀의 팬입니다.

그녀의 눈꺼풀과 함께 내 눈꺼풀이 스르르 내려올 때까지





옆에 대하여 4

 

 

매일 새벽에 산을 오르는 노인들의 폐활량은 크다. 이제 노인들은 나란히 허리를 구부리고 오랫동안 숨을 내쉰다. 점점 작아지다가 번쩍, 만세 자세를 취한다. 어느 날 이 노인들은 산새처럼 날아간다.

 

노인을 기다린다.

매일 아침 내가 기다리는 노인은 수영장에 간 노인이다.

헐벗은 여자들이 물 위에 늘어져 있다. 오르내리는 발과 거품.

그녀가 돌아온다.

 

마당에서 할머니와 내가 손을 마주 잡고 줄넘기를 한다. 할머니와 내가 함께 하늘로 오르고 할머니와 내가 함께 땅으로 떨어진다. 옆집 자매들이 연주하는 젓가락행진곡이 울려 퍼진다.

 

대낮에 노인들이 한꺼번에 돌아온다.

기다림에 지쳐서 희미해진 사람들이 멀뚱히 치어다본다.

 

한 마리 말과 두 마리 말에 대해, 한 개의 침대와 두 개의 침대에 대해, 흐르는 강과 달리는 산에 대해, 떠들어도 좋다고 여자는 내게 미소를 보냈을까요?

커튼을 치고,

 

알약을 다시 세기 시작하는 여자와 침대에 나란히 누운 아이들.





(이별의 능력, 문학과 지성사)





물고기는 움직이는 심장처럼
그러나 매우 조용히 살아가는 것들이야
물고기가 물고기를 뜯어먹을 때도 고요하다
 
오늘 아침 너는 피어나기 시작한다
너는 완전히 힘을 뺐다
내 안에서 자라는 식물들처럼 알 수 없이
새로운 삶처럼 끝없이
너의 머리카락이
흔들려
 
나는 너를 거칠게 대하고 싶어
죽은 체하는 걸까
산 체하는 걸까
 
나는 그림자와 친해
내 옆에 나무 한 그루가 있고
나는 나무 한 그루의 그림자와 친해
달빛은 검은 물체를 떨어뜨리지
햇빛은 잘게 부서져서
반짝이지
 
어젯밤 너의 눈빛은 하염없이 머물렀지
마치 눈먼 자 같은
그런 눈빛
그런 목소리로 너는 인생보다 긴 고백을 시작했어

- 물의 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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