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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 그림 일기

그런 날이면 창백한 물고기에게 황금빛 수의를

땅이 내준 길만 따라 흐르는 작은 강물에게 거미의 다리를

무엇에 차이기 전에는 아무 데도 가지 못하는 돌멩이에게 이쁜 날개를

한 번도 땅의 가슴을 만져본 적 없는 하늘에게 부드러운 손가락을

높은 곳에서 떨어져본 마음을

더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마음 받아주는 두 팔을

높은 곳에 올라가기 전에

네 곁으로 가는 다리를

그러나 높은 곳에서 떨어져 이미 삐뚤어진 입술을

그 입술의 미세한 떨림을


떨림이 전하지 못하는 신음을

크게 그려줘 내 몸에 곱게 새겨줘

그런 날이면 망친 그림을

잘못 그려진 나를 구기지 말아줘 버리지 말아줘

잘못 그려진 나에게 두껍게 밤을 칠해줘

칼자국도 무섭지 않아 대못도, 동전 모서리도, 그런 날이면

새로 생긴 흉터에서 밑그림 반짝이는 그런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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