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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키냐르, 옛날에 대하여

시간에 대한 의식이 사라지는 쾌락. 시간과 관련된 황홀경엔 네 가지가 있다. 즉 관능, 최면상태, 독서, 발견. 지금 몇시인가. 시간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불가능성이양말로 기쁨의 근원. 시간과의 '거리-없음'이 기쁨. 예측할 수 없는 공시성, 솟구치는 옛날로 돌아가는 것. 범람하는 시간의 원천 속에 다시 잠기는 기쁨... 

시간이 흐를수록 시간의 체험이 더 느껴질 수록 시련으로 인한 행위들은 연륜이 지배하는 무한한 하늘로 가지를 내뻗었다. 옛날은 시시각각 더욱 넘쳐흐르고 깊어져갔다. 기억은 주어지는 상황에 더욱 도취감을 부여하고, 시야의 전경에 나타나는 이미지에는 후광이나 반향을 제공한다. 심지어 진부한 이름이나 진저리 나는 관습, 사라졌다고 여긴 추억, 나이보다 더 오래된 세월 이런 것들에게조차 새로운 가능성을 나누어 준다. 겪어보지 않은 단계들은 거기서 느껴지는 시간을 통해 체험된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다시 솟아오르는 것을 바라보며 영혼은 회고한다. 육체는, 동일한 시기에, 자신의 상태에 대해 간직된 기억 속에서 선행하는 모든 순간 및 그에 따른 상황을 다시 떠올린다. 그렇게 함으로써 슬픔처럼 보이지만 실은 깊이에 다름 아닌 감정에 빠지게 된다. 라일락의 어느 싹에도 예전에 살았더 모든 라일락들이 다시 발현한다. 모든 새잎은 저마다 전체를 새롭게 한다. 책 가운데 폴리오 판(포케판) 시간의 어느것이나 완전히 새로운 시작이다. 고대 일본의 사고는 인도의 불교적 사고와 정반대이다. 우주에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것은 무가 아니라 매년 한 번씩 지구 표면에 그리고 태양과 인류 사이에 위치한 매개 공가에 다시 찾아오는 새로운 생명인 것이다 고대 일본인이 진짜 공간으로 여기는 것은 태양광선이 퍼지는 공간이다. 불현듯 켈트족의 신화가 떠오른다. 그 신화에서는 섬광의 도정이 하늘과 땅의 중간 지점에 자신의 결실, 이를테면 기막힌 끈끈이나 폭풍우처럼 자신의 진짜 얼굴을 드러내는 시간의 정액 같은 겨우살이 관목을 내려놓는다고 말한다. 벼락. 폭풍우. 사실상 시간의 출구 없는 나가기를 가장 잘 표현하는 폭풍우. 시간의 중심에 깃들어있는 힘을 과시하면서 뇌우나 기세등등한 강풍이 일어나는 비시간적 어둠속에서 돌연 무시무시한 광풍으로 드러나는 폭풍우.

어둠속에서 동트는 새벽을 좋아한다. 잠에서 깨, 옅어지는 어둠 속에서 볼수있는 것들의 출현을 바라보는 것. 어둠을 뚫고 들어와 곧 찢어발기는가 싶은데, 어느새 어둠을 지워버리는 빛이 좋다. 희미한 빛이 형체 없는 동물처럼 어떻게 어둠을 갉아먹는지 그 방식이 궁금하다. 구름 한 점 없는 빛은 어느 것이나 으뜸가는 뜻밖의 선물로서, 이내, 재빨리, 절대 진정되지 않는 기쁨으로 변한다. 마음속에서 빛의 본성에 대한 의혹이 생겨났다. 빛은 보이고 싶어한다. 꽃들의 빛은 보여주고 싶어한다. 태생동물들의 빛은 서로 바라봄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빛은 놀란다. 새들의 빛은 동트는 시간에 지저귐으로 변한다. 인간들의 빛은 심지어 엿보기의 대상이 되려고 한다. 그들이 동굴로 내려와 스스로를 알아보고 엄청난 감동에 휩싸이고 부활과 귀환의 느낌을 받을 정도로 블라블라
우리는 원천이 아니다. 볼 수 없는 포옹이 우리보다 먼저 있었고, 그리하여 자신에게만 안 보이는 볼 수 있는 포옹들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그렇다. 출생 이전에, 삶 이전에, 존재들 이전에도 태양빛이 솟았다. 그렇다. 그날에 앞선 하루, 시간보다 더 오래 지속되는 어떤 하루가 있었다. 이미 어떤 날이 있었다.
마음속을 들여다보노라면, 어느새 알지 못하는 한 계절을 바라보곤 한다. 그것은 일련의 잡다한 상태로서 내 과거와는 무관하다. 나 자신의 한가운데 자리 잡은 나와 무관함이 나를 불안하게 했다가, 불안이 사라지면서, 안달을 하게 만든다.

시간은 삶에 은신처를 제공한다. 누구든 미래를 먹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미래란 아직 살아 있는 것이 아니며, 결코 그럴 수 없을 테니까). 미래는 존재가 아니라 삶에 관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존재했던 것에서 자양분을 취한다(가능성만으로는 자양분이 되지 못하므로).





26장

  시작 없는 한 과거가 있어 밤마다 우리의 행위 안으로 귀환한다.
  어떤 시간이 되면 오래된 동일한 파도를 수천년이 다시 무너뜨린다.
  지겨운, 미지근한, 짐승같은, 경이로운, 검은 파도가 다시 일어나서 다시 무너지는데, 거기에 허기, 죽음, 잠, 꿈, 두려움, 욕망이 섞여든다. 그때 옛날 이 말을 잃은지 오래 된 목소리는 아주 부드럽고 지극히 익숙하여 의미 없는 단조로운 선율들을 발음해서 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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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다.
시선이 공원의 철창을 통과한다. 방치된 공원의 무성한 풀숲을 헤치며 나아간다. 달빛 속에서 작은 샘이 솟아오른다. 이내 구름이 달을 가린다. 지난 밤, 나는 꿈을 꾸었다. 즉, 나는 돌아갔다.
(1) 다른 세계가 있다.
(2) 꿈이 있다.
(3) 귀환이 있다.
이 옛장소가 있다. 꿈에서 무엇보다도... 
'외연-밖에서-지독하게-들리는-여자의-침묵- 목소리'는 언제나 사람들의 상류, 그들의 육체가 ..되는 곳에서 떠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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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밀려오는파도

멀리서퍼지는 어둠 땅거미 야릇한 핏빛으로 수평선이 물들고

피 순환 리듬 달콤하고 가차없고 리드미컬하고 전적인 유출 하늘의 내출혈




55장.

마음속을 들여다보노라면, 어느새 알지 못하는 한 계절을 바라보곤 한다. 그것은 일련의 잡다한 상태로서 내 과거와는 무관하다. 나 자신의 한가운데 자리 잡은 나와 무관함이 나를 불안하게 했다가, 불안이 사라지면서, 안달을 하게 만든다.


78 

  과거는 고르지 않다. 과거의 황홀은 생명 유지에 필수적이고, 분리적이고, 분열 번식하며, 원심성을 지닌다. 하지만 과거의 과잉은 치명적이다 성의 원천은 각 결실 안에 천 분의 일 초 동안 맹렬하게 달려든다.

  과거는 아름다움이 결코 흡수할 수 없는 어둠의 이러한 측면에서 빛을 발한다.

  과잉은 과잉을 부른다. 끝이 없음. 무한. 성적 충동은 영원한 과잉이고, 그 대상은 유일한, 찾을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실재하지 않는, 사라진, 회고적 존재이다. 따라서 상실, 최초의 분리, 불안한 유성화, 결핍감, 불만족이 끊임없이 옛날을 유인한다.





  문학 수집가 키냐르는 항상 밤을 벗 삼아 파편, 부스러기, 티끌, 찌꺼기, 아무 쓸모없는 것, 엉뚱한 것 등에서 시작해 삶 혹은 죽음을 상상하는 것을 좋아한다. 마치 진짜 비밀들은 우리가 잘 쳐다보지 않는 것 속에 숨어 있다는 것처럼. ( 누벨 옵세르바퇴르 )

  키냐르의 책은 울타리 처진 땅이 아니다. 사유지가 아니다. 오랫동안 키냐르는 어떤 형태를 찾아 헤매다, 결국 이런 부스러기 형태에 도달했다. 눈에도 좋고, 귀에도 좋은 어떤 그럴싸한 오브제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장르에 대한 고민, 경계에 대한 고민은 더더욱 아니었다. 다만 어떻게 거할 것인가, 어떻게 진실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 르몽드 )

“나는 욕망 때문에, 습관적으로, 의도적으로, 혹은 직업 삼아 글을 쓰는 게 아니다. 나는 생존을 위해 글을 썼다. 내가 글을 썼던 이유는 글만이 침묵을 지키며 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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