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갓난아이는 자기 몸이 자신의 일부임을 알지 못한다. 주변의 사물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제 발가락을 가지고 놀면서도 그것이 옆에 있는 딸랑이가 아니고 제 몸의 일부임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다 점차 고통을 통해서 제 육체의 실재를 이해하게 된다. 사람이 자신을 의식하게 되는 과정에도 같은 체험이 필요하다. 하지만 제 육체를 독립적이고 완전한 유기체라고 의식하게 되는 과정은 모든 사람에게 같다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자신을 완전하고 독립적인 개성으로서 의식하는 것은 아니다. 타인과 분리되어 있다는 느낌은 대체로 사춘기에 오지만, 그렇다고 자기와 남들의 차이를 분명히 의식할 정도까지 발달한다고는 할 수 없다. 인생의 행운아는 오히려 벌통 속의 벌처럼 자신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행복하게 살 가능성이 가장 크다. 다 같은 활동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다 같은 즐거움을 누린다는 점에서 그들은 행복하다. 성령강림절 다음 월요일에 햄프스테드 히스 공원에서 춤추는 사람들, 축구 시합을 구경하며 소리 지르는 사람들, 팰 맬 가의 클럽 창문에서 왕의 행렬을 구경하며 환호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다. 사람이 사회적 동물이라 불리는 건 바로 그런 사람들 때문이다.
2.
필립은 인생의 나그네가 현실을 제대로 받아들이려면 그전에 메마르고 험준한 세상을 얼마나 넓게 돌아다녀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젊음이 행복하다는 것은 환상이며 그것은 젊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환상이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자기들이 비참하다는 것을 안다. 그들의 머리에는 끊임없이 주입되어 온 진실없는 이상들만 가득 차 있어 현실에 접촉할 때마다 멍들고 상처받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은 어떤 공모의 희생자처럼 보인다. 선택해서 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언제나 이상적인 책들, 그리고 망각의 장밋빛 아지랑이를 통해 과거를 돌아보는 나이든 사람들의 대화, 이 두 가지가 공모하여 젊은이들로 하여금 비현실적인 삶을 꿈꾸게 하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자기가 읽은 모든 것, 자기가 들은 모든 것이 거짓말투성이라는 것을 스스로 발견하여야 한다. 그 사실을 발견할 때마다 그것은 인생의 십자가에 그들을 때려박는 못이 된다. 이상한 것은 쓰라린 환멸을 경험한 사람들이, 이번에는 무의식적으로 저마다, 억제할 수 없는 내부의 어떤 큰 힘에 의해 그 환멸을 증가시킨다는 것이다. 헤이워드를 사귄 것은 필립에게는 최악의 일이었다. 헤이워드는 자신의 눈으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만사를 문학적인 분위기를 통해서만 보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성실하다고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위험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관능을 낭만적인 감정이라고 잘못 알았고, 우유부단을 예술적 기질로 잘못 알았으며, 게으름을 철학적인 초연함이라고 잘못 알았다. 그의 정신은 속물적으로 세련을 추구하였으며, 따라서 모든 것을 감상(感傷)의 금빛 안개 속에서 실물 크기보다 약간 크게, 흐릿한 윤곽으로 보았다. 거짓말을 하면서도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고, 누가 거짓말을 한다고 지적하면 거짓말은 아름답다고 말했다. 그는 관념주의자였다.
3.
필립은 춤추는 사람들을 구경하였다. 불리에는 일류 유흥장은 아니었다. 목요일 밤이라 손님들이 바글댔다. 학생들도 꽤 다양하게 와 있었지만 대부분은 회사원이나 점원이었다. 다들 트위드 천 기성복이나 이상한 모양의 연미복 같은, 평상복 차림에 모자를 쓰고 있었다. 모자를 들고 들어오긴 했는데 머리 위밖에는 마땅히 둘 데가 없어 그냥 쓰고 춤을 추고 있었다. 여자들 가운데는 하녀들도 있는 것 같았고, 화장을 요란하게 한 바람난 아가씨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점원 아가씨들이었다. 다들 강 건너(세느 강의 오른쪽 강변은 부유층이 사는 지역이다)의 유행을 따른다고 따랐지만 보잘것없는 싸구려 옷을 입고 있었다. 바람둥이 아가씨들은 당시에 악명을 날리던 연예관의 가수나 댄서를 그대로 흉내내고 있었다. 눈에는 검은 칠을 짙게 하고 볼을 유난히도 빨갛게 칠했다. 홀에 낮게 드리운 커다란 백열등의 조명으로 사람들의 얼굴에 어린 그림자는 유난히 어둡게 보였다. 백열등 아래 모든 선은 더 굵게 보였고 색채는 더 원색조로 보였다. 난잡한 광경이었다. 필립은 난간에 몸을 기대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음악은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격렬하게 춤을 추어댔다. 그들은 온통 춤에만 몰입하여 말은 거의 하지 않은 채, 천천히 방을 돌며 춤을 추었다. 실내가 더워 얼굴은 땀으로 번들거렸다. 관습을 존중하여 평소 얼굴에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던져 버린 것 같았다. 이제 적나라한 모습이 드러나 있었다. 모든 것을 벗어던져 버리고 나니 하나같이 낯선 동물처럼 보였다. 어떤 자들은 여우 같았고, 어떤 자들은 늑대 같았으며, 길다랗고 미련한 양의 얼굴을 한 사람들도 있었다. 불건전한 생활과 형편없는 음식 때문에 그들의 피부는 누르께했다. 천한 관심사 때문에 그들의 얼굴은 볼품없었고, 조그만 눈은 약삭빠르고 교활했다. 몸가짐에 고상한 데라곤 없었다. 이들의 인생이란 하잘것없는 관심과 불결한 생각의 긴 연쇄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공기는 인간이 풍기는 퀴퀴한 냄새로 답답했다. 하지만 내부의 어떤 기이한 힘이 충동질하는지 그들은 격렬하게 춤을 추었다. 필립에게는 그들이 향락의 욕망에 쫓기는 사람들처럼 여겨졌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공포의 세계를 도망치려 하고 있었다. 크론쇼가 말한 대로, 인간 행위의 유일한 동기인 쾌락의 욕망이 그들을 맹목적으로 몰아갔다. 그런데 그 욕망이 너무 격렬한 나머지 쾌락은 오히려 조금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거센 바람에 무력하게 떠밀려 갈 뿐, 이유도 방향도 알지 못했다. 그들의 머리 위로 <숙명>이 거대하게 솟아 있고 발 밑에는 영원한 어둠이 자리잡고 있는데 그들은 그 어둠을 딛고 춤추고 있었다. 그들의 침묵은 어떤 무서운 일의 예고 같기도 했다. 삶의 공포에 질려 말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듯, 마음으로는 소리질러도 보건만 그 절규는 목구멍에서 사라져버리는 것 같았다. 그들의 눈은 퀭하고 험상스러웠다. 그들의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는 저 짐승의 욕정과 잔인성과 표정의 천박성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그 우둔함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에 열중해 있는 그들의 눈에는 고뇌의 표정이 깊이 어리어 있어 이들 군중은 무섭고도 슬프게만 보였다. 필립은 혐오감을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한없이 안쓰러운 마음으로 가슴이 아팠다.
그는 옷 보관실에서 외투를 찾아 입고 차디찬 밤거리로 나와 버렸다.
4.
필립의 생각으로는 실습 보조원들 가운데에서 자기만이 오후근무에 재미를 느끼는 것 같았다. 다른 실습 보조원들에게는 병원을 찾는 사람들이 그저 환자에 지나지 않았다. 병이 복잡하면 흥미를 가졌고 뻔하면 귀찮게 여겼다. 청진기로 이상음을 들었고 비정상 간을 만나면 놀랐다. 폐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면 곧바로 얘기거리가 되었다. 필립에게 그것들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환자를 보는 것 자체가 흥미로웠고, 머리와 손의 모양, 눈의 표정, 코의 모양이 다 흥미로웠다. 진료실 안에서는 불시에 기습당한 인간 본성을 볼 수 있었다. 관습의 가면이 가차없이 벗겨지면서 영혼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도 했다.
하지만 전체적인 느낌은 비극도 희극도 아니었다. 뭐라고 꼬집어 말하기 힘들었다. 다원적이고 다양하다고 할까. 눈물과 웃음이 있었다. 행복과 슬픔이 있었다. 지루하기도 하고, 재미나기도 하고, 무정하기도 했다. 보이는 그대로였다. 소란스럽고 격정적인가 하면 엄숙하기도 했다. 슬프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하찮기도 했다. 단순하면서 복잡했다. 기쁨이 있었고 절망이 있었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 여자에 대한 남자의 사랑이 있었다. 욕망이 무거운 발을 끌면서 병원의 방들을 지나갔다. 죄 있는 자와 죄 없는 자, 홀로 된 아내들과 비참한 아이들에게 벌 주면서. 술이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 벗어날 길 없는 대가를 치르게 했다. 병원의 진찰실에서는 죽음의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곳에서는 불쌍한 소녀를 공포와 수치로 몰아넣으며 생명의 탄생을 진단하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선도 악도 없었다. 사실만이 존재했다. 그것이 인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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