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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태, 아홉번째 집 두번째 대문

식당 창밖으로 눈발이 날리는 게 보였다. 처음엔 싸락눈인가 싶더니 곧 굵은 눈송이가 무성하게 휘날려 식당을 나섰을 때는 벌써 도로 바닥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식당 앞 인도 한가운데에 한참 서 있었다. 거리는 빠르게 흰색의 단일한 색조로 바뀌어 갔다. … 어디든 전화 걸 데가 있으면 좋겠다고 잠깐 생각했다.(pp. 46~47) 


나이가 마흔쯤 되면 버릇이 옹이처럼 삶에 박힌다. 무심코 반복되는 그것들 속에 욕망도, 상처도, 사는 방식도 다 들어 있다. 생계 문제로 벌이는 게 아닌 한 도둑질도 연쇄살인도 결국엔 버릇이다. 그러니 삶을 바꾸려면 버릇을 바꾸어야 하는데, 버릇은 삶에서 나오는 것이라 먼저 바꿀 수가 없다.(p. 61) 

인터넷으로 대필에 필요한 자료 몇 가지를 찾아보고 있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자료를 다 찾고 나서 막걸리를 사 왔다. 빗소리를 들으며 오랜만에 낮술을 했다. 안주는 없다. 혼자 마시는 술은 손으로 안주를 집을 때 이상하게 서글프다.(p. 79) 

지금은 되돌아갈 수 없는 아름답고 행복했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그의 눈에 어느 날부터 죽은 자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모텔 앞에서 공기놀이를 하고 있는 어린 여자아이, 횡단보도에서 꼼짝 않고 서 있는 회사원, 버스 종점에서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젊은 여자, 한강 다리를 바삐 건너는 청년,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달라는 중절모를 쓴 노 신사 유령까지…… 언제부터인가 죽은 자들이 “나”의 삶 속으로 비집고 들어온다. 

그들은 대낮의 거리를 산 사람처럼 걸어 다녔다. 눈앞에서 홀연히 사라지지도 않았다.(p. 89) 

고개를 드는데 앞에서 남자아이가 걸어왔다. 열 살이 채 안 돼 보였다. 아이는 무엇을 찾고 있는 듯 땅바닥을 계속 두리번거렸다. 아이가 내 바로 앞에까지 왔다.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아이의 눈과 나의 눈이 마주쳤다.(p. 84) 
남자는 가야 할 곳이 있는 게 아니다. 살아 있을 때는 저린 식으로 바삐 걸어보지 못했던 것이다. 뚜걱뚜걱, 목적지가 분명한 당당한 걸음걸이는 저 사람의 그리움이다. 그리움이 채워질 때까지 남자는 계속 저렇게 걸어 다닐 것이다.(p. 161) 

대필 작가 “나”에게 죽은 이들은 산 자들 속에 섞여 있는 거리의 자연스러운 풍경이다. 그로 인해 “나”의 행복했던 지난날과 현재의 비루한 삶,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흙에 물이 스며들듯 와해되어 비합리한 것들이 실재와 공존하며 차원을 넘나드는 신비롭고 몽환적인 세계가 창출된다. 

▣ 맑은 정서로 세밀하게 그려낸 도시 풍경, 밀도 높은 삶의 질감 
『아홉 번째 집 두 번째 대문』에서 작가는 현실과 환상을 섬려하게 오가며 현대 도시의 풍경을 세밀히 포착해 낸다. 또한 가슴속 깊이 그리움과 쓸쓸함을 품고 하루를 살아가는 남자의 일상은 그대로 세상의 촘촘한 정경이 된다. 

어느 날 새벽 … 젊은 여자 둘이 서로 때리고 피하는 시늉을 하며 장난치는 것을 보았다. 흔히 보던 무거운 풍경과는 다르게 상큼했다. 그 모습은 왠지 현실이 아니라 누군가의 젊은 날의 회상이 홀로그램으로 거기에 비쳐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날 이후로 365일 코너는 이 세계에 몰래 숨어든 동화의 공간처럼 느껴졌다. 밤이 되면 그곳에 동화책의 한 페이지가 펼쳐진다. 아무도 없이 텅 비어 있을 때에도 그곳은 혼자 은밀하게 반짝거린다.(pp. 80~81) 

퇴근이 늦어 보이는 젊은 남녀사원 몇 명이 옆 건물을 빠져나왔다. 성격이 특이한 거래처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젊은이들은 큰길 쪽으로 경쾌하게 걸어 내려갔다. 깜박거리는 가로등이 그들의 등 뒤에서 서너 차례 점멸하다가 갑자기 확 밝아졌다. 노란 나트륨등 불빛은 가난한 방 천장의 전등불처럼 아늑하면서도 고단해 보인다.(p. 253) 

시골 생활 동안 마음을 나눴던 진돗개 태인이의 갑작스러운 죽음도, 아내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 서울로 돌아와야만 했던 일도, 장 선생이 대필 의뢰를 한 뒤 돌연 죽음을 맞이한 사건도, 그 자신이 운동모자를 즐겨 쓰고 외출하는 일도, 남들과 달리 거리를 산책하듯 유유히 걸어 다니는 버릇도, 그가 현재 발을 딛고 서 있는 시공간을 뛰어넘어 초월적인 우주와 자신이 연결되었기 때문임을 그는 알고 있다. 

나를 둘러싼 세계가 하는 말들을 내가 정확히 받아쓸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내가 쓰는 글은 ‘내가 아는 세계’라는 한 의미가 된다. 그것이면 된다. 그리고, 하나를 제대로 말하면 사실은 모든 게 거기에 있다. 먼지와 햇빛과 행인은 서로 연결돼 있다. 하나를 쓸 수 있으면 다른 것도 말해진다. 먼지의 이야기는 햇빛의 이야기이다.(p. 235) 

그래서 그는 마음이 슬퍼도 쓸쓸하지는 않다. 혼자 길을 걸어도 외롭지 않다. 술잔을 채워줄 사람이 앞에 없어도 막걸리는 맛있다. 눈앞에 보이는 죽은 이들이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깊이 잠들어 있는 거리를 혼자 걷는다. 
마음은 슬픈데 쓸쓸하지는 않다. 그 새벽의 마지막 풍경들이 따뜻하게 가슴으로 들어온다. 그날, 모든 것이 좋았다. 꿈결 같기만 한 그날 새벽거리. 바람도, 가로수도, 불 꺼진 창들도, 모든 것이 정갈했었다. 그래서 기억은 쓸쓸하지 않다.(p. 191) 

▣ 상처투성이의 삶에 말없이 다가와 상처를 보듬어주는 따뜻한 울림 
소설의 제목 ‘아홉 번째 집 두 번째 대문’은 작품 속에서 현실의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상징이자, 삶 속 깊게 침투해 있는 “욕망의 기호”이며, 마음속 깊이 울려 퍼지는 “육체의 염원”이다. 
아내와 함께 꾸려 나갔던 시골 생활은 가난하긴 했어도, 자식처럼 개들을 키우면서 하루하루 삶의 온기를 느꼈던 시절이다. 전원생활이 가져다주는 자연의 포근함, 여유로운 시간의 유예 안에서 끊임없이 확인할 수 있었던 부부간의 사랑, 낯선 미래에 대한 순수한 자신감과 긍정적인 희망, 두려움을 이겨내는 간절한 용기, 슬픔을 극복하게 해주는 가족이란 이름의 위대함…… 그 모든 것들이 너무나 찬란하고 아름다웠기에, 이제는 그 시절로 되돌아갈 수 없기에 눈물이 날 만큼 행복하고 웃음이 날 정도로 슬프다. 

햇빛은 아주 단순한 사물도 찬란하게 만든다. 깊은 우울증이 있는 사람들도 저 찬란한 빛이 자기 몸에 쏟아지면 생각할 것이다. 햇빛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이란 살아볼 만한 것이라고.(p. 219) 

우리는 누구나 비슷한 무게의 삶을 살고, 사랑하고, 그리워한다. 누구의 인생인들 소설이 아니랴. 그러나 행복했던 시절이 있기에 지금의 “나”가 다시 한 번 오늘을 힘차게 살아갈 힘을 얻는다. 절실한 염원은 결국 어둠을 이겨내고 반짝거리는 빛으로 화해 간다. 
아내의 말대로, 태인이가 “나”에게 다시 와준다면, 어쩌면 나의 ‘두 번째 인생’(두 번째 대문)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죽은 자들과 화해하고, 내 유년기와 화해함으로써 내 안의 나와 당당히 조우하는 날이 찾아올 수도 있지 않을까……. 

아스팔트에 저 혼자 살아 쏟아지는 햇빛은 찬란하다 못해 고고하게 번쩍거렸다. 그리고 그림자가 있었다. 사람이 사라지자 그림자가 거리의 주인이 되었다. 우리 곁에 늘 온갖 그림자가 있다는 것을 그 적막한 화면을 보면서 새삼 느꼈다.(p. 12) 

누구에 대해 쓰느냐는 문제가 아니다. 그를 만날 수 있느냐가 문제이다. 한 사람을 온전히 만나면 거기에 다른 이들도 보인다. 배역이 다를 뿐 모든 사람의 욕망과 상처는 본질적으로 같다. 사람은 누구나 비슷한 무게의 삶을 산다. … 그의 전 인생을 느끼고 이해하고 싶다. 그의 모든 말과 몸짓, 그의 불안과 욕망과 외로움과 간절했던 것들을 나의 것으로 느끼고 싶다. 그리 되면 나는 곧 그일 것이다. 서로의 삶이 다르지 않음을 비로소 알게 되고, 그의 말은 나의 말이 되어, 나는 그의 목소리가 된다. … 그의 발걸음 소리가 나의 발걸음 소리가 된다. 그리하여 나는 그가 무엇을 이해받고 싶었는지를 내 운명과의 일체감 속에서 느낀다.(pp. 235~236) 

작가는 이처럼 우리 시대 경계인과 주변에 대한 깊은 성찰을 바탕으로 “나”를 통해 우리 내면의 상처와 마주하게 하고, 그 상처를 함께 껴안고 위로해 준다. 정갈하게 삶을 수놓은 『아홉 번째 집 두 번째 대문』은 마치 우리네 고단한 등을 다독여 주듯, 조곤조곤 따뜻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용서하고 싶었다. 가장 힘찬 용서는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요, 아무 걱정 하지 마요.(p. 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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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면서 걸어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생의 어느 한 부분을 안다는 것으로 서로 얼굴 한 번 안 본 사이끼리 위안과 격려를 주고받는 그런 소설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잔잔한 슬픔이 기저음처럼 깔리는 가운데 소설은 산다는 것에 대해, 외로움에 대해, 지키지 못한 약속과 놓쳐 버린 행복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충분히 사랑하지 못해서 외롭다"는 문장은 회한의 정조가 지배적인 이 소설의 주제어로 구실한다.

소설 말미에서 주인공은 길에서 주워 온 유기견을 병원에 데려가 예방접종을 하기로 마음먹으며, 아내가 만들었으나 그동안 책장에 방치해 두었던 문패 '아홉번째 집 두번째 대문'을 현관에 걸기로 한다. 그가 태인이의 환생으로 믿는 유기견의 사료를 사러 횡단보도를 건너는 마지막 장면에는 '희망을 향해 한 걸음'이라는 제목을 붙임 직하다. 결국 이 소설은 아내의 문패로 상징되는 소박한 행복을 향해 울면서 걸어가는 사내의 이야기라 할 수 있겠다.

"정신의 사치는 우울증을 막아준다." "비열한 것은 세계가 아니라 개인들이다." "사람은 누구나 비슷한 무게의 삶을 산다." 적재적소에 배치된 이런 경구들은 오랜 경험과 사유의 무게를 담고서 독서의 흥미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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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