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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젊은 소설가에게 보내는 편지

(첫번째 편지) 

친구여,
그대의 편지는 나를 감동시켰습니다. 그것을 읽으며 나는 오드리아 장군(Manuel Odría, 1948-56년 페루의 대통령으로 재임)의 독재에 짓눌린 회색빛 수도 리마에서 장래에 작가가 되겠다는 꿈에 불타던 열너더댓 살 무렵의 나를 보았습니다. 당시 나는 의기소침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벌써 나의 신전을 채우고 있던 작가들, 예컨대 포크너, 말로, 도스패소스, 카뮈, 사르트르 같은 작가들이 나를 경탄케 하듯, 독자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이야기들을 쓰도록 나를 충동하는 그 맹렬한 소명을 구체화하기 위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종종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당시 그들은 모두 생존해 있었습니다) 편지를 써서 글쓰기에 대한 조언을 구할 생각이 뇌리를 스쳐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감히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수줍음 때문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문학이 사람들의 눈에 별 의미를 갖지 못하며 사회생활의 언저리에서 거의 블법적인 활동처럼 근근히 생존을 이어가는 나라들에서 숱한 젊은이들의 소명을 유산시키는 억압적 비관주의 ―〈그런들 무슨 소용이야?〉, 〈게다가 답장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와 같은― 때문이었습니다.
그대는 그런 위압감을 느끼지 않고 내게 편지를 썼습니다. 이는 그대가 시작하려 하고, 또 거기에서 수많은 경이를 기대하는 ―이 점에 대해 그대의 편지는 침묵하고 있지만 나는 확신합니다― 모험에 있어 좋은 시작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감히 그대에게 이르건대, 너무 큰 기대를 걸지도 말 것이며, 성공에 관한 한 지나친 환상도 품지 말기를 바랍니다. 사실 거기에 이르지 못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대가 끈기 있게 노력하고, 쓰고, 출간한다면, 그대는 금세 상이니, 대중의 호응이니, 베스트 셀러니, 작가로서의 사회적 위신이니 하는 것들이 알지 못할 나름의 길을 간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성공은 더없이 자의적이라 할 텐데, 왜냐하면 가장 자격 있는 이들은 집요하게 피해 다니면서 가장 자격 없는 이들을 괴롭히고 짓누르기 때문입니다. 작가의 소명의 핵심적 동기를 성공에 두는 사람은 필경 자기 꿈이 부서지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그는 문학적 소명을 요란한 성공이나 돈벌이와 혼동하고 있는 셈인데, 문학으로부터 이것들을 얻어내는 작가들은 극히 드물지요. 문학적 소명과 성공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소명을 갖는다는 것은 아마도 작가에게 있어 최고의 보상입니다. 그것은 노력의 결과로 얻어내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문학적 소명에 관해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나는 적어도 하나만은 확신합니다. 그것은 작가라면 누구나 글을 쓰는 것이 자기에게 일어났고 또 일어날수 있는 최선의 것이라고 내심 느낀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글을 쓴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 최선의 삶의 방식이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글을 쓴다는 행위가 혹시 그에게 초래할 수도 있을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여파는 차치하고 말입니다.

소명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대를 자극하고 또 그대를 불안하게 하는 것, 즉 〈어떻게 작가가 되는가〉에 관해 이야기하는 데 있어 피할 수 없는 출발점일 듯싶습니다. 어떻게 작가가 되는가? 신비롭고 불확실하며 주관적인 문제입니다. 하지만 합리적인 설명을 시도하지 말란 법은 없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낭만주의자들이 이 문제를 호도하기 위해 동원하는 종교적이고도 오만한 허영의 신화를 피해야 할 것입니다. 낭만주의자들에 따르면, 신들에 의해 선택받은 존재인 작가는 초인적, 초월적 힘을 지니고 있고. 이 힘은 인간 정신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초극하게 하는, 혹은 미(물론 대문자로 표기해야지요)의 감염에 의해 불멸성에 도달하게 하는 신성한 말의 원천입니다.
오늘날 문학적, 예술적 소명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덜 거창하고 덜 숙명적이라 해도 설명은 여전히 막연하기만 합니다. 곧 어떤 남자들 또는 여자들로 하여금 어느 한 활동, 이를테면 그들이 그것을 수행하도록 어느 날 문득 부름 받았다고, 아니 오히려 강요받았다고 느끼는 그런 활동에 자기들의 삶을 사용하게끔 하는 막연한 예정에 의한 설명이 그러한데, 그들은 이 소명을 실천에 옮기면서 ―예를 들어 이야기들을 쓰면서― 그리고 최선을 다하면서 내적인 조화를 이룩하는 한편 삶을 낭비한다는 비참한 느낌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나로서는, 인간 존재가 우연의 효과에 의해, 아니면 어린 존재들에게 능력 혹은 무능, 식욕 부진 혹은 왕성한 식욕을 분배하는 변덕스런 신에 의해 태내에서부터 프로그래밍되어 태어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또한 내가 아직 젊을 때 프랑스 실존주의자들 ―특히 사르트르― 의 의지주의(意志主義)에 영향받아 설파한 것, 구체적으로 말해서 소명 역시 하나의 선택이라는 것, 다시 말해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는 개인 의지의 자유로운 발로라는 것을 이제 더 이상 믿지 않습니다. 문학적 소명은 숙명적인 어떤 것, 미래의 작가들의 유전자에 기록된 어떤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연마와 견인적 노력이 경우에 따라서는 천재를 낳을 수도 있다는 점을 확신하는 나는 문학적 소명에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단순하게 설명될 수 없다는 신념을 얻었습니다. 내가 보기에 이 자유로운 선택은 필수 불가결한 것입니다. 하지만 두번째 단계에서 그러하지요. 그것은 주관적인, 타고난, 아니면 어린 시절이나 유년 시절에 주조된 첫번째 의향 뒤에 와서 그것을 강화할 뿐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어내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잘못 생각하지 않는다면(물론 나는 착각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남자건 여자건 아주 일찍부터, 그러니까 어린 시절 또는 유년기 초기부터 인물, 상황, 일화, 그리고 현재 살고 있는 세상과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취향을 발전시키는데, 이는 나중에 문학적 소명이라 불리울 것의 시발점이 됩니다. 그러나 상상의 나래를 타고 현실 세계 및 실제의 삶으로부텨 벗어나는 것과 문학을 실행하는 것 사이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건너지 못하는 심연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심연을 넘어 씌어진 말에 의한 세계의 창조자가 된 사람들―작가들―은 소수에 불과한 바, 이들은 자기들이 지니고 있던 취향 또는 경향에 사르트르가 선택이라 부르는 것, 이를테면 의지의 운동을 덧붙였다 하겠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 되기로 선택했습니다. 그들은 막연하고 비밀스런 정신의 영토 안에 다른 삶, 다른 세상을 꾸며내는 데 만족하던 소명을 이제 씌어진 말의 영역 안으로 옮기기에 유리한 방향으로 자기들의 생활을 조직합니다. 친구여, 그대는 요즈음 바로 이 단계에 와 있습니다. 허구의 현실을 상상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글쓰기를 통해 구체화하는 것은 어렵지만 열정적이기도 하지요. 만약 그대가 그것을 실행하기로 결심했다면, 그대는 아주 중요한 걸음을 떼어놓은 셈입니다. 작가의 길에 들어서는 것, 그리고 그대의 삶을 이 계획에 맞추어 조정하는 것은 벌써 작가이기 시작하는 하나의 ―어쩌면 유일하게 가능한― 방법입니다.
인간들과 이야기들을 지어내는 이 취향, 작가로서의 소명의 시발점이 되는 이 취향은 어디로부터 오는 걸까요? 나는 반항이 그 대답이라고 생각합니다. 확신하건대, 현실을 벗어나는 삶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작가는 실제의 세계 및 삶에 대한 비판적 거부를, 그리고 그것들을 자기의 상상과 욕망들에 따라 그리고자 하는 욕망을 간접적으로 표출합니다. 실제의 현실에 대해, 있는 그대로의 삶에 대해 만족한다면, 그토록 막연하고 공상적인 것에 자기의 시간을 할애할까요? 다른 삶, 다른 존재들을 지어낸다는 핑계 아래 삶에 반항하는 작가는 적지 않은 이유를 제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이타적이건 저열하건, 관대하건 째째하건, 복합적이건 상투적이건 말입니다. 실제의 현실에 대한 이 질문, 내가 보기에 이야기 창조자들의 소명을 구축하는 이 질문이 어떠한 성격을 띠고 나타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작가의 거부가 워낙 근본적인 나머지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실제의 삶의 세계를 미묘하고 덧없는 허구의 세계로 대체하는 역동적인 작업 ―창을 겨누고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 만큼이나 무모한― 을 배양하기에 이른다는 사실입니다.
공상적이기는 하되 이 기도(企圖)는 주관적이고 비유적인 방식으로, 비역사적인 방식으로 실현되며. 실제의 세계에 대해, 그리고 뼈와 살로 이루어진 존재들에 대해 항구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문학의 ―문학적 소명의― 내밀한 존재 이유를 이루는 현실과의 이러한 갈등은 문학으로 하여금 주어진 시기에 대해 특유한 증언을 제안하게 합니다. 허구 속의 삶 ―특히 그것이 성공적인 것일 때― 은 그것을 짓고, 쓰고, 읽고, 기리는 사람들이 실제로 산 삶이 아니라 허구적인 삶, 다시 말해서 그들이 정말로 살 수 없었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창조해야 했던 삶입니다. 그들은 다른 삶, 즉 꿈과 허구의 삶을 살 때와 마찬가지로 그 삶을 간접적으로, 그리고 주관적으로 사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것입니다. 허구는 심오한 진리를 감춘 거짓입니다. 그것은 존재한 바 없는 삶으로서 한 시기의 남녀들이 욕망했으나 얻지 못한 삶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지어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역사의 초상이기보다는 그 이면, 이를테면 메달의 뒷면이며,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상상력과 말에 의해 창조되어 실제의 삶이 만족시켜주지 못하는 야심들을 해갈시켜 줍니다. 그것은 또한 남녀들이 자기들의 둘레에서 발견하는 공허, 그들이 스스로 만든 환영들로 채우려 애쓰는 공허를 메워주기도 합니다.
이 반항은 물론 상대적인 것입니다. 수많은 이야기 창조자들은 그 반항을 의식조차 하지 못하며, 만약에 자기들 내부의 이야기를 꾸며내는 소명이 전복적 기조 위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면, 현실 속에서 스스로를 결코 세상의 파괴자로 간주하니 않는 그들은 크게 놀랄 것입니다. 한편 그것은 충분히 평화적인 반항이라 할 수 있겠는데, 사실 지각할 수 없는 허구의 삶을 대립시켜 현실의 삶에 무슨 해를 끼칠 수 있겠습니까? 겉으로 보기에 그것은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유희에 불과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유희는 그것이 자기 고유의 공간에서 나와 현실의 삶을 침해하려 하지 않는 한 조금도 위험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예를 들어 돈키호테나 보바리 부인이― 허구와 현실을 혼동하면서 삶을 이야기 속에서와 같게 하려고 애쓸 경우, 그 걸과는 자주 위중하게 나타납니다. 그러한 태도는 끔찍한 환멸로 이어지지요.
사실인즉 문학의 유희는 비공격적인 것이 결코 아닙니다. 실제의 삶에 대한 내밀한 불만족에서 비롯되는 허구는 다른 한편 불편함과 실망의 원천이 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독서를 통해 위대한 허구 ―내가 인용한 세르반테스와 플로베르의 것과 같은― 를 사는 사람은, 그 멋진 공상들을 통하여 소설의 세계에 비해 한없이 초라한 자기의 현실을 의식하게 된 만큼, 현실의 삶이 지닌 한계와 불완전함에 대해 더더욱 알레르기적인 반응을 갖게 되기 때문이지요. 좋은 문학이 그 양분을 제공하는 현실 세계에 대해 야기하는 이 같은 불안은 경우에 따라 권위와 제도와 확립된 믿음에 대한 반항의 태도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부터 기인하는 것이 스페인 종교 재판 당국의 허구에 대한 경계인 바, 그들은 삼백 년 동안 아메리카 식민지 전역에서 허구를 엄격하게 검열함은 물론 그것을 금지하기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들이 내세운 구실은 허구들이 인디언들을 하느님으로부터 떼어놓을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는데, 이 우려는 사실 정교일치 체제의 주된 관심사이이고 하지요. 스페인 종교 재판 당국과 마찬가지로, 시민들의 삶을 제어하길 원하는 모든 정부와 체제들 또한 허구들에 대해 동일한 경계를 표시했고, 그것들을 검열하기에 열중했습니다. 주목할 점은 종교 재판 당국도 정부들도 오해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겉으로는 비공격적이지만, 허구를 창조하는 행위는 자유를 실행하는 방법이자. 이 자유를 폐지하려 하는 세력들 ―그것이 종교적이건 세속적이건 간에― 에 대항하는 한 방법이었습니다. 모든 독재 정권들 ―파시즘, 공산주의, 회교 근본주의,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의 군사 독재 정권― 이 문학에 검열이라는 구속복(拘束服)을 입히고자 했다면 그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성찰들이 이야기를 그대의 구체적인 경우로부터 멀어지게 했군요. 우리의 문제로 되돌아갑니다. 그대는 그대의 내부에서 이른바 의향을 느꼈고, 의지를 표명했으며, 문학에 전념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대의 운명이라고 부를 수 있을 문학에 대한 이 취미를 그대는 일종의 종속처럼, 하나의 노예살이처럼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비유를 사용하여 말하자면, 그대의 결정은 그대로 하여금, 자기의 뚱뚱해진 몸매를 확인하고 크게 놀라 날씬함을 되찾고자 촌충(寸蟲)을 삼키는 19세기의 여인들과 가까워지도록 할 것입니다. 뱃속에 이 끔직한 기생충을 지닌 누군가를 본 적이 있습니까? 나는 있습니다. 고로 이 여인들은 가히 영웅적일 뿐 아니라 미의 순교자들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직접 관찰한 사람은 60년대 초 파리에 살던 호세 마리아라는 멋진 스페인 친구로 그는 화가이자 영화감독이었습니다. 그는 어찌어찌하여 촌충을 지니게 되었고, 그의 몸속에 자리잡은 촌충은 그와 한 몸이 되어버렸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붙어 양분을 취하면서 장성했고, 그는 그만큼 쇠약해졌습니다. 촌충이 이용하고 식민지화하는 호세 마리아의 몸으로부터 촌충을 몰아내기란 매우 어려웠습니다. 호세 마리아는 점점 야위어갔습니다. 자기 창자 안에 자리잡은 벌레의 식욕을 잠재우기 위해 지속적으로 먹고 마셨지만 (특히 우유를) 말입니다. 문제는 그가 먹고 마시는 것이 그의 취미와 쾌락을 위한 것이 아니라 촌충의 취미와 쾌락을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날 우리가 몽파르나스의 한 술집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그가 다음과 같은 놀라운 고백을 해왔습니다. 〈우리는 아주 많은 것을 함께 한다네. 극장과 전시회에 가고, 서점에 들르며, 여러 시간 동안 정치, 책, 영화, 친구에 대해 토론하지. 그러나 내가 이 일들을 나의 즐거움을 위하여 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일세. 나는 오로지 그를 위하여, 다시 말해서 나의 촌충을 위하여 그 일들을 한다네. 그렇게 느껴져. 이제 나는 나를 위해 사는 게 아니라 내 속에 있으며 내 주인 행세를 하는 촌충을 위해 사는 셈이네.〉
이날 이후로 나는 작가의 상황을 뱃속에 촌충을 지닌 내 친구 호세 마리아의 상황과 즐겨 비교하곤 합니다. 문학적 소명은 심심풀이나 스포츠나 자유시간을 이용한 세련된 유희가 아닙니다. 그것은 특별하고 배타적인 활동이고 절대적인 특권이며 자청해서 받아들인 예속인바, (행복한) 희생자를 노예로 만들어버립니다. 내 파리 친구의 촌충처럼 문학은 항구적인 활동이 될 뿐 아니라, 글쓰기에 투자하는 시간을 넘어서 다른 모든 활동에까지 전염되는 하나의 실존적 행위가 됩니다. 숙주로 삼는 육체에 기생하는 긴 촌충과 마찬가지로 문학적 소명은 작가의 삶을 먹고 삽니다. 플로베르가 말했듯, 글을 쓰는 것은 삶의 한 방식입니다. 말을 바꾸자면, 이 아름답고 흡입력 강한 소명을 자기 것으로 삼는 사람은 살기 위해 쓰지 않고 쓰기 위해 삽니다. 
작가의 소명을 촌충에 비교하는 것은 나만의 독창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나는 최근에 토마스 울프(포크너의 스승으로 『시간과 강』, 그리고 『쫓겨난 천사』라는 두 권의 야심적인 소설을 썼습니다)를 읽다가 그것을 발견했는데, 그는 자신의 작가적 소명을 자기의 존재 안에 자리잡은 벌레로 그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하여 잠은 영원히 죽었다. 경건하고 어둡고 부드러운 잠, 이제는 잊혀진 어린 시절의 잠 말이다. 벌레가 나의 마음속에 들어와 웅크린 채 나의 뇌와 정신과 기억으로 배를 불리고 있었다. 나는 내 스스로 지핀 불에 결국 내가 데었다는 것, 나 자신의 화염에 내가 소진되었다는 것, 그리고 여러 해 동안 내 삶을 흡입한 맹렬하고 만족 모르는 욕망의 송곳니에 내 존재가 갈갈이 찢겼다는 것을 알았다. 말하자면, 빛의 세포 하나가 낮이건 밤이건 내 삶의 모든 깨어 있는 순간에, 또 모든 잠자는 순간에, 뇌에서, 마음에서, 그리고 기억에서 언제나처럼 빛나리라는 것, 벌레가 내 몸을 먹으면서 자신의 빛을 유지하리라는 것, 어떤 오락, 음식, 음료도, 어떤 여행도, 어떤 여자도 그 빛을 꺼뜨릴 수 없으리라는 것, 그리고 죽음이 그 전적이고도 결정적인 어둠으로 내 삶을 덮을 때까지 나는 결코 그 빛에서 해방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깨달았던 것이다. 하여 나는 내가 마침내 작가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자기 삶을 작가의 삶으로 바꾼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았다.〉
확신하건대, 자기의 시간과 정력과 노력을 문학적 소명에 전적으로 바치겠다는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마치 종교에 입문하듯 문학에 들어가는 사람만이 정말로 작가가 될 수 있고 자신을 넘어서는 작품을 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재능이라고, 천재성이라고 부르는 저 신비로운 그 무엇인가는 때 이르고 돌연한 방식으로 ―이는 적어도 소설가들에게 있어서는 불가능하고, 시인이나. 음악가들에게 있어서는 이따금 가능한 데, 그 고전적인 예는 물론 랭보와 모차르트입니다―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해 동안의 훈련과 인내로 이루어진 긴 분비과정 끝에 얻어지는 것입니다. 조숙한 소설가란 없어요. 위대하고 경탄할 만한 소설가들조차 처음에는 일종의 수습서기와도 같았고, 그 재능은 꾸준함과 신념 속에서 주조되었습니다. 글을 쓰기 시작하는 사람에게 있어, 소년기에 벌써 천재적 시인이 된 랭보와 다릴 점진적으로 그 재능을 키운 작가들을 머릿속에 본보기로 갖고 있다는 사실은 고무적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대가 문학적 천재의 배태(胚胎)라는 테마에 관심을 갖고 있다면, 나는 플로베르의 방대한 서간집, 그 가운데서도 특히 그가 자신의 첫번째 걸작인 『보바리 부인』을 쓰던 무렵인 1850년과 1854년 사이의 기간동안 애인인 루이즈 콜레에게 보낸 편지들을 읽어보도록 권하고 싶습니다. 이 편지들의 독서는 내가 첫번째 소설들을 쓸 때 나를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플로베르는 염세주의자였고, 그의 편지는 반인류적이고 비상식적인 말들로 가득 차 있지만 그의 문학에 대한 사랑은 무한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소명을 십자군처럼 감당했으며, 광신적인 신념, 그리고 극한으로 치닫는 전대미문의 엄격함을 갖고 그것에 밤낮으로 전념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한계(이 한계는 수사학적이면서, 당시 유행하던 낭만주의 모델을 그대로 답습하는 그의 초기 글들에서 잘 관찰됩니다)를 뛰어넘는 데 성공했고, 아마도 최초의 현대 소설들이라 할 『보바리 부인』과 『감정 교육』을 썼습니다.
지금까지 이 답장에서 다룬 주제와 관련하여 나는 또다른 책 한권을 그대에게 권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플로베르와는 전혀 다른 작가인 미국인 윌리엄 버로우(William Burroughs)가 쓴 『마약 중독자』(Junkie)입니다.사실 나는 소설가로서 이 사람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그의 실험적이고 환각적인 이야기는 극도로 따분한 것이어서 나는 그의 어떤 책도 끝까지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첫번째 책으로, 일화적이고 자서전적이며, 마약 중독자로서의 여정 및 어떻게 마약 ―취향에 덧붙여진 자유 선택― 이 그를 행복한 노예로, 다시 말해 자기 악덕의 자발적인 하인으로 만들었는지를 이야기하는 ’마약 중독자‘는 문학적 소명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작가와 작가라는 직업 사이에 설정하는 전적인 종속 관계와, 이 둘이 원하건 원치 않건 서로 기생하는 방색은 또 어떠한지를 성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친구여, 편지의 주된 미덕은 간결함인데, 이 편지는 편지답지 못하게 길어졌군요. 이만 줄여야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