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어느 날 슬프고도 먼 불빛에 대해 알게 되었다 - 『설국』

지난주에 노르웨이가 사랑하는 노벨문학상 후보 타리에이 베소스가 쓴 소설 『마티스』를 읽었다. 마티스는 곧 마흔이 되는 정신박약아인데 마흔 살인 누나 헤게와 단둘이 산다. 헤더는 일곱 개의 활짝 핀 장미 잎을 수놓아서 생활비를 번다. 그 둘이 사는 가난한 집의 담장 너머에는 서로 꼭 끌어안고 있는 두 그루의 포플러 나무가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 나무를 ‘마티스와 헤게 나무’라고 부른다. 마티스에게 그 나무가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모른다. 마티스는 지쳐 있는 누나에게 힘을 주기 위해 “누나는 번개 같아.”라고 표현한다.그 압도적인 표현은 필시 타리에이 베소스가 노르웨이의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것일 것이다. 그 소설의 첫 1장은 마티스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일자리를 구하러 길을 나서는 데서 시작된다. 그렇지만 마티스는 정상적인 인간의 노동에서는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마티스가 힘을 얻은 것은 어느 밤 우연히 날아든 멧도요새의 퍼덕거리는 날갯소리를 듣고 난 후였다. 한 마리 새가 나무와 황혼 뒤로 사라져 가는 고장의 외로운 정신박약아 마티스는 멧도요새의 날갯짓 아래 다시 태어나고 싶어 한다. 어느 날 그는 갈색 늪의 빈 공간에 나뭇가지로 멧도요새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남겨놓는다. 그는, 인간의 언어는 왠지 조잡하다고 생각해 기왕이면 새의 언어로 메시지를 남겨놓고 싶어 한다. 마티스가 늪지에 찍힌 새의 부리 자국을 보고 외로운 새를 춤추게 하는 그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장면은 형언할 수 없이 절실하고 아름답다. 마티스나 새나 그 고장의 아름다움과 슬픔 앞에서 우아한 춤의 잔상이었다. 마티스는 결국 아무도 다니지 않은 호수의 뱃사공이 된다. 바닥에 구멍이 난 일인용 나룻배를 타고 마티스가 “배를 타러 오는 사람이 없어도 뱃사공은 늘 같은 자리를 지켜야 해. 어떤 사람이 타든 나는 그를 태우고 일직선으로 노를 젓는 모습을 보여줄 거야. 모두에게 보여줄 거야.”라며 의젓하게 직업윤리에 충실할 때, 호수는 지독하게 고독하고 사람은 아무도 없고 달빛을 받은 호수 주위 풀밭은 너무나 아름답다. 마티스의 슬픔과 외로움은 그 적막하고 깊은 호수 지방에서 펼쳐지기 때문에 순결한 아름다움을 깊숙이 끌어안는다.

도시와는 너무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순진한 사랑, 순진한 슬픔, 순진한 기쁨에 속하는 일들이 벌어지는데, 그런 일들은 아무리 먼 곳의 일이라도 우리의 가슴에 직선으로 날아들어 우리를 애수에 젖게 만든다. 이런 고장들은 그 고장 출신 사람들의 얼굴을 만든다. 이런 고장 사람들의 성격과 자태, 생활습관, 얼굴선은 그 고장의 인용이다. 이런 식으로 소설의 애틋함이 스토리만큼이나 풍광에서 뿜어 나오는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절대로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설국』에서도 사람들은 그 아득한 눈에 우아한 춤의 잔상, 얇고 섬세한 그림자로 남는다. 『설국』은 니카타에서만 나올 수 있는 소설이다. 그곳에서 게이샤들은 눈 바지에다가 고무장화, 망토를 걸치고 베일을 쓴 채 객실을 돌아다니며 스키를 타러 온 여행객들 앞에서 춤을 추고 샤미센을 연주한다. 그 지방의 남자들은 지붕 위에 올라가 눈을 치우고 어린 여자 아이들은 굽이 높은 게다를 신고 양지바른 곳에 앉아 털실로 뜨개질을 한다. 여관의 하루는 상행 열차와 하행 열차의 시간대에 맞춰 진행되고 부끄러운 게이샤는 다다미 바닥의 머리카락을 주우며 야속한 마음을 표현한다. 거울 속 게이샤의 얼굴은 창밖 하얀 눈빛을 받아 복숭아처럼 발그스레할 때 믿을 수 없이 깨끗하게 빛난다. 게이샤의 속수무책으로 벌거벗은 마음을 다 받아들일 수 없는 도쿄의 부유한 한량 손님은 창밖 방충망에 붙어 있던 나방이 죽어 부서져 내릴 때, “나방은 왜 이리 아름다운가!”라고 되뇐다. 이런 문장들은 취향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런 문장들은 이미 소설 이전의 세계에 깔려 있는 아름다움에 관한 것이다.

『설국』의 첫 문장부터 기차 안 유리창에 비친 미지의 여인을 묘사하는 장면은 그 자체가 하나의 시고 오래된 병풍 속의 그림이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건너편 자리에서 처녀가 다가와 시마무라 앞의 유리창을 열어 젖혔다. 차가운 눈기운이 흘러 들어왔다. 처녀는 창문 가득 몸을 내밀어 ‘역장님, 역장님, 제 동생이 이번에 여기서 일하게 되었다죠? 폐를 끼치겠네요. 아직 어린애니까 역장님께서 잘 이끌어주세요. 역장님, 동생을 잘 돌봐주세요. 정말 잘 부탁드려요.’’’하고 외친다. 그때 그녀의 목소리는 슬프도록 아름다운 목소리여서 그 높은 울림이 밤의 눈을 통해 메아리쳐오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 처녀는 “역장님, 이번 휴가 때 집에 다녀가라고 제 동생에게 전해 주세요.”라고 마지막으로 외치며 창문을 닫고 발그레해진 볼에 두 손을 갖다 댄다. 머잖아 눈에 파묻힐 신호소에서 시마무라가 발견한 그 처녀의 이름은 요코인데 병색이 짙은 남자와 동행이다. 시마무라는 기차 유리창에 비친 그녀의 얼굴과 그녀가 동행한 남자를 보살피는 자애로운 동작을 무심코 바라본다. 이것이 소설 전체를 끌어가는 아름다움의 시작이다.

두 사람은 끝없이 먼 길을 가는 사람들처럼 생각될 정도였다. 그 때문에 시마무라는 슬픔을 보고 있다는 괴로움은 없이, 꿈의 요술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신기한 거울 속에서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거울 속에는 저녁 풍경이 흘렀다. 비쳐지는 것과 비추는 거울이 마치 영화의 이중노출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등장인물과 배경은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게다가 인물은 투명한 허무로, 풍경은 땅거미의 어슴푸레한 흐름으로, 이 두 가지가 서로 어우러지면서 이 세상이 아닌 상징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었다. 특히 처녀의 얼굴 한가운데 야산의 등불이 켜졌을 때 시마무라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가슴이 떨릴 정도였다. (…) 차창에 비치는 처녀의 윤곽 주위를 끊임없이 저녁 풍경이 움직이고 있어 처녀의 얼굴도 투명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등불은 그녀의 얼굴을 흘러 지나갔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을 빛으로 환히 밝혀주는 것은 아니었다. 차갑고 먼 불빛이었다. 작은 눈동자 둘레를 확하고 밝히면서 바로 처녀의 눈과 불빛이 겹치는 순간, 그녀의 눈은 저녁 어스름의 물결에 떠있는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야광충이었다.

어스름 풍경의 물결 위를 떠가는 연민에 가득 찬 밤 기차, 그리고 그 승객들 사이로 흐르는 말 없는, 표현되지 않은 슬픔의 연대감. 승객들은 제각기 자신만의 짐을 들고 자신만의 길을 가고 있는데 그들 중 아무도 슬픔보다, 허무보다 더 나이가 많을 수는 없다. 그들은 모두 슬픔과 허무의 애틋한 자식들이기 때문이다. 기차 안 유리창에 비친 눈동자는 어떤 사연보다도 풍부한, 설명이 필요 없는 세계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기차 안의 여행객 누구도 눈동자 안에 미래를 위한 완벽한 지도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무 근심 걱정 없는 눈동자를 슬픔 없이 볼 수 없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진 미지의 여인은 우리 모두의 미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주요 인물은 세 사람인데 시마무라와 고마코, 요코다. 시마무라는 도쿄에 사는 지식인 정도로만 밝혀져 있다. 그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유산으로 한번도 보지 않는 서양 무용에 대한 비평을 써서 자비로 그 비평집을 출판하려는 사람이다. 그는 어느 해 산행을 마치고 이 산골 마을 온천에 처음 들른 뒤 삼 년 동안 고마코를 만나러 해마다 이곳을 찾는다. 다른 소설의 많은 비정하지 않은 지식인 남자처럼 그는 다정하고 따뜻하지만 뜨겁지는 않다. 그는 자신의 허무에 젖어 있다. 그래서 그는 이 소설을 끌고 갈 수 없다. 대신 이 소설을 끌고 가는 사람은 두 여인, 요코와 고마코다. 둘 다 쓸쓸하고 둘 다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둘 다 부서진 영혼이 더 아름다운 영혼이란 생각을 하게 한다. 둘 중에 더 생기 있는 것은 산골 온천장 게이샤 고마코다. 고마코는 그날 기차에서 요코가 동행한 남자의 병원비를 대기 위해 게이샤로 나섰지만 기차 안의 병든 남자와 병든 남자를 간호하던 요코, 병든 남자를 위해 게이샤로 나선 고마코. 이 셋의 관계는 소설의 끝까지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요코와 고마코가 서로를 맘속 깊이 염려하고 안쓰러워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고마코의 생기는 시마무라를 만나는 과정에서 너무나 순박하게 표현된다. 그녀는 시마무라를 향해 문맥이 없어 보이는 횡설수설을 내뱉고 술이 잔뜩 취해 찾아 왔다간 이내 다시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부리기도 하고 새벽녘에 찾아와 시마무라가 잠든 곁에 앉아 책을 읽으며 그가 깨어나길 기다리기도 하고 연회가 베풀어지는 날, 술 주문을 하는 사이에 잠시 빠져나와 시마무라의 방에 들렀다가기도 하고, 술 마시는 새 번개같이 편지를 보내기도 한다. 그 가공되지 않은 벌거벗은 마음은 적나라한 진심을 보여 준다. 어리광, 투정, 술주정에서 흘러나오는 깊은 슬픔들과 생각들이 그녀의 몸에서 마치 누에의 실처럼 풀려나오는데 그건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깨끗한 느낌을 준다. 그녀의 동작은 “미묘하게 행복하려면 미묘하게 괴로워야한다.”는 아쿠다카와 류노스케의 말을 떠오르게 한다.

어느 날 고마코는 시마무라 앞에서 사미센을 연주한다.

순간 시마무라는 뺨에 소름이 돋을 듯 서늘해져서 뱃속까지 말갛게 되는 느낌이었다. (…) 열아홉이나 스무 살 먹은 시골 게이샤의 샤미센쯤이야 들어보나마나 뻔하다, 객실인데도 마치 무대에 선 것처럼 켜고 있질 않나, 나 자신이 산에서 느끼는 감상에 불과하다, 라고 시마무라는 생각하려 애썼다. 고마코는 일부러 구절을 단조롭게 읽어 내리기도 하고 여기는 천천히, 성가시다며 건너뛰기도 했다. 하지만 점점 신들린 듯 소리가 높아지자 발목소리가 얼마만큼 강하고 맑게 울리나 싶어 시마무라는 무서워져서 허세를 부리듯 팔베개를 하고 드러눕고 말았다. 간진지가 끝나자 시마무라는 겨우 숨을 돌리고 아아, 이 여자는 내게 반했군,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것이 또한 웬지 처량했다. “이런 날은 소리가 달라요.” 하고 눈 온 뒤 맑은 하늘을 올려다본 고마코가 말한 적이 있었다. 공기가 다른 것이다. 극장 벽도 없고 청중도 없고 도시의 먼지도 없어, 소리는 다만 깨끗한 겨울 아침을 맑게 지나며 멀리 눈 쌓인 산들까지 곧바로 울려 퍼졌다. 자신도 모르게 늘 산골짜기의 드넓은 자연을 상대로 고독하게 연습하는 것이 그녀의 습관이었던 탓에 발목소리가 커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 고독은 애수를 짓밟고 야성의 의지력을 품고 있었다.(…) 시마무라에겐 덧없는 헛수고로 여겨지고 먼 동경이라고 애처로워도 고마코의 삶의 자세가 그녀 자신에게는 가치로서 꿋꿋하게 발목 소리에 넘쳐나는 것이리라.

게이샤가 존재의 깊은 곳에서 샤미센을 켤 때 그 게이샤에게 별로 해줄 것이 없던 사내는 눈물 흘리느니 눈을 감을 수밖에 없다. 고마코로 말하자면 시마무라를 향한 사랑 때문에 자기의 팔꿈치를 깨물고, 꽁꽁 얼어붙은 겨울밤에 역까지 걸어 가야 할 만큼 뜨겁게 달궈져 있긴 하지만 그래도 때가 되면 그녀는 분명히 또 다른 사랑을 할 것이다. 그때도 그녀의 사랑은 순결하고 때 묻지 않은 것일 것이다. 시마무라는 이렇게 생각한다.

고마코의 애정은 그를 향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아름다운 헛수고인 양 생각하는 그 자신이 지닌 허무가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고마코의 살아가려는 생명력이 벌거벗은 맨살로 직접 와 닿았다. 그는 고마코가 가여웠고 동시에 자신도 애처로웠다. 이러한 모습을 무심히 꿰뜷어 보는 빛을 닮은 눈이 요코에게 있을 것 같아 시마무라는 이 여자에게도 마음이 끌렸다.

나는 시마무라가 고마코를 사랑하지 않는 자신을 애처로워 하는 심정을 헤아릴 수 있다. 이렇게 돌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지만, 그건 그렇지만, 그건 그렇다 쳐도, 나는 그녀를 얼마든지 사랑할 수도 있던 사람이 아니었던가? 지금은 사랑은 말짱 헛수고라고 생각하게 되었어도, 자신이야말로 더 오래전에는 누군가를 맘 깊이 거리낌 없이 사랑할 수 있던 사람이지 않았던가?’ 하고 느낄 때, 우리는 자신에 대해 애처로움을 느낀다. 사랑할 수도 있던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뽀얀 맨 얼굴이 자랑이었던 사람이 두터운 화장이나 가면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과도 같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자신의 목표인 것처럼 구는 사람들이 가장 쉽게 매혹되는 것, ‘허무’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느 해 단풍 끝 무렵, 첫눈 내릴 즈음 시마무라는 고마코를 다시 찾아온다. 여관 주인이 시마무라를 위해 특별히 교토의 옛 쇠주전자를 꺼내주었다. 그 주전자에서는 부드러운 솔바람 소리가 났고 꽃이며 새가 은으로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솔바람 소리는 두 가지가 겹쳐 가깝고 먼 것을 구별해 낼 수 있었다. 또한 멀리서 들리는 솔바람 소리 저편에서는 작은 방울 소리가 아련히 울려 퍼지고 있는 것 같았다. 시마무라는 쇠주전자에 귀를 가까이 대고 방울 소리를 들었다. 방울이 울려대는 언저리 저 멀리, 방울 소리만큼 종종걸음 치며 다가오는 고마코의 자그마한 발을 시마무라는 언뜻 보았다. 시마무라는 깜짝 놀라 마침내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시마무라가 고마코를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결심하던 날 은하수가 찬란히 빛났다. 은하수는 밤의 대지를 알몸으로 감싸 안으려는 양, 바로 지척에 내려와 있었다. 시마무라는 그 빛이 두렵도록 요염하다고 느꼈다.

시마무라는 자신의 작은 그림자가 지상에서 거꾸로 은하수에 비춰지는 듯했다. 은하수에 가득한 별 하나하나가 또렷이 보일뿐 아니라 군데군데 광운이 은가루처럼 알알이 눈에 띌 만큼 청명한 하늘이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은하수의 깊이가 시선을 빨아들였다.

그리고 그렇게 은하수가 흘러내리던 날, 영화를 상영하던 마을의 창고에서 한 건의 화재가 발생하는데 그 건물 이층에서 꽃잎처럼 떨어져 내린 것은 요코였다. 시마무라가 고마코로부터 요코를 받아 안으려는 순간 그는 마을 사내들에 떼밀려 휘청거리는데, 그때 발에 힘을 주며 하늘을 올려다보던 시마무라 몸 안으로 쏴아 하고 밀려들어온 건 바로 ‘은하수’였다.

나는 요코가 불이 난 극장에서 일부러 빠져나오지 않은 것은 아닐까,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는데 그건 영원한 미스터리일 것이다. 다만 이런 고장의 사람들은 고통 때문에 일부러 죽을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현명하기 때문에 정말로 단순 사고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시마무라의 몸 안으로 밀려들어온 은하수에 대해서는 소설의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찬란한 광휘가 밀려 들어왔기 때문에 앞으로 시마무라의 인생이 어떻게든 변할 것이란 예감이 든다. 그의 쓸쓸한 허무에 이 고장은 빛을 드리워줬다.

만약 우리의 꿈이 슬픔과 허무를 간결하게 느끼는 것이라면,
『설국』은 바로 그 꿈에 바쳐질 만한 소설이다. 그 느낌은 너무나 슬프고도 부드러워서 마치 눈 내리는 저녁 밤, 가로등 불빛에 비치는 눈을 볼 때처럼 아름답고 따뜻하고 뭉클하다. 외로운 산골의 밤중에 울리는 샤미센 소리만큼이나 개인적으로 잊지 못하는 장면을 하나 더 소개하고 싶다. 나는 요코가 죽은 남자의 무덤 앞에 서 있을 때 화물열차가 지나가며 소년이 “누나~ 누나~” 하고 모자를 흔들고, 그걸 본 요코가 “사이치로~ 사이치로~” 하고 첫날 신호소에서 시마무라가 들었던 바로 그 목소리로 이젠 사라져 듣지도 못할 동생을 부르는데, 그때 기차가 사라진 선로 저편의 메밀꽃이 붉은 줄기 끝에 가지런히 꽃을 피운 채 고요하게 서 있던 그 장면을 잊을 수 없다. 허무는 가장 사소한 아름다움의 무한한 증식이란 말이 우리에게 구원일수 있을까? 이 소설을 읽고 나면 허무야말로 눈 위에 찍어놓은 발자국 같은 것이란 느낌을 떨칠 수 없다. 햇빛 아래 반짝 빛나면서 허물어지는 그 쓸쓸한 아름다움!

『설국』은 쓸쓸함과 허무를 가장 매혹적이고 우아하게 표현한 소설로 문학사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가끔 <이웃집 토토로><하울의 움직이는 성> 같은, 사랑이 가득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으로 <설국>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순박한 산골 게이샤 고마코의 등 뒤에는 담요처럼 포근하고 따뜻한 빛이 씌워질 것 같고, 신비로운 요코 뒤에는 삼나무 숲을 울리는 청아한 메아리가 따라다닐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아름답게 표현될 것은 몸을 던지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자연이다. 그 눈부신 설국에서 은하수를 향해 기차가 달린다. 그런 뒤 은하수는 지상으로 쏟아져 내려 눈동자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슬프고도 먼 불빛 속으로!



정혜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