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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키냐르, 로마의 테라스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구석에서 살아가는 법일세.

사랑에 빠진 사람도 모두 구석에서 살아가지.

책을 읽는 사람도 구석에서 사는 거네.

절망한 자들은 숨을 죽이고,

누구에게 말을 하거나 누구의 말을 듣지도 않으면서,

마치 벽에 그려진 사람처럼 공간에 달라붙어 살아가는 거야.


내게 간절한 것은 그런 기쁨이 아니라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야. 내가 평생을 바쳐 오직 하나의 육체, 내가 늘 꿈꾸던 포옹의 자세를 취한 육체만을 그렸던 건 그 때문일세. 


나는 내 가련한 노래를 다른 곳으로 가져가려 했네.

파멸의 음악이란 게 있다면, 파멸의 회화 역시 존재할 테니까.


나는 내가 여자라는 사실에 고통을 느껴요. 여자는 모두 그렇게 만들어진 걸요.

이 세상에 사는 여자들에겐 나쁜 기억이 하나쯤은 있는 법이니까.


이유를 대는 것은 사랑을 황폐하게 만드오. 사랑하는 대상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거짓에 불과하지.

인간은 살아 있다는 감각이 절정에 달했을 때의 느낌에만 기뻐하기 때문이라오. 또 다른 삶이란 존재하지 않으니까.

 

사람은 늙어갈수록, 자신이 통과하는 풍경의 광채에서 몸을 빼내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네.

마지막 떠남은 사실상 흩어짐에 불과해. 늙어갈수록 나는 내가 도처에 있음을 느끼네. 언젠가 풍경이 나를 통과하겠지.


나는 평생동안 질투를 해왔다는 생각이 들어 질투심이 상상력보다 먼저야. 질투심은 시선보다 더 강렬한 환영이지.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는 매혹적인 하룻밤이 있어. 저녁마다 여자들과 남자들은 잠이 들지. 그들은 마치 어둠이 추억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밤 속으로 빠져들어. 그것은 추억이네.

그들은 단지 밤의 노리개에 불과해. 그들을 태어나게 했고, 어디서나 무엇에나 그림자를 드리우는 보이지 않는 장면의 노예일 따름이야.

 

동판을 마주하고 앉으면 비애가 느껴진다. 내게는 한 이미지를 몽상할 시간, 아니 눈앞에 붙잡아 놓고 재생시킬 시간이 더 이상 없다. 내 작품은 다른 곳에 있다.

 

난, 이제껏 자신을 온통 사랑하는 여자에게 바치는 남자들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어. 여자에게서 이 모든 것을 죄다 찾으려는 남자들은 더군다나 보지 못했어. 부재하는 여자들이 여전히 이곳에 존재하고 있어. 상실된 것은 언제나 옳은 거야. 나는 사랑을 더러운 속임수라 부르겠어.

 

판화가를 번역자로 간주해야 한다. 번역자는 풍요롭고 멋진 한 언어의 아름다움을, 사실은 그만 못 하지만 더 강렬한 다른 언어로 바꿔놓은다. 그 강렬함은 그것과 대면하는 자를  즉시 침묵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