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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을 읽는다

『아Q정전』, 『광인일기』 등으로 널리 알려진 중국 문학의 거장이자 현대 중국 지성사를 대표하는 루쉰의 삶을 조명해 본다. 서구의 가치관과 문물이 유입되며 급격하게 변화해 가던 시대에, 의사에서 과감히 문학의 길로 전환하여 중국문화 전반에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던 루쉰의 일대기. 특히 이 강좌에서는 루쉰 개인의 삶을 조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의 사상이 담긴 작품들을 통해 현대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길러본다.


온 몸으로 ‘근대’를 살았던 사상가 루쉰!
   

'길은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다' 루쉰이 남긴 유명한 말이다. 또한 루쉰의 생애는 저 말 한마디로 정의된다.
루쉰은 한 몰락한 사대부집안에서 태어나 의술을 통해 민중을 구제하기 위해 의학을 지망하였다. 하지만 수업시간에 본 슬라이드에서, 간첩의 누명을 쓴 동포를 구경만 하고 있는 중국인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의술로 민족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낙후된 정신을 각성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비로소 문학의 길로 접어들었다.

루쉰은 문학가였으나 중국에 신문명의 숨결을 불어넣은 선구자였고, 혁명가였으나 폭력이 아닌 문학으로 저항하였다. 그에게는 어느 것도 정해진 길은 없었다. 만들어진 길을 거부하고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그 정신이 오늘날 그를 10억 중국인을 깨어나게 한 중국의 기상나팔이라고 불리게 한 것이다.

     
 
“중국 현대 문학의 아버지” 루쉰의 걸작들!
   

루쉰 문학의 정수! 아큐와 같이 시시한 인물을 전기의 모델로 설정함으로써 ‘기록에 남겨지는 자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사람들의 공유된 의식을 뒤집으려 한다.

광기나 광인은 의학적 기준에 의해 하나의 질병으로 분류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수의 ‘정상적인’ 사람들은 안심한다. 루쉰은 이러한 근대적 계몽방식을 살짝 뒤집어버림으로써, 전통이라는 이름의 몽매한 유습을 파괴하고자 한다.

복수는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바뀐다고 말할 수도 없다. 또 다른 원한과 복수가 어디에선가 생겨날 것이다. 그래서 루쉰은 이렇게 말한다. “나도 알고 있어. 불을 끈다 해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나 나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어. 내가 먼저 그렇게 하는 것
                         이 쉽단 말야. 나는 불을 끄겠어. 혼자서 끄겠다구!”

혁명가의 피를 바른 만두를 먹은 아이는 결국 죽어버린다. 하지만 루쉰은 전사다. 태평한 세상에 절망하지 않고, 그것이 허망하다는 것을 알면서 그는 다시 투창을 치켜든다.

시대착오적인 삶, ‘어떤 암흑’ 속에서 헤매는 삶의 결과는 죽음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루쉰은 작품을 통해 잔인하고도 집요하게 묘사한다.

     
   
루쉰, 시대와 싸우는 전사(戰士)
    그가 말한다. “세상에 만약 정말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이 그래도 있다면 우선 감히 말하고 감히 울고 감히 노하고 감히 욕하고 감히 싸우며 이 저주스러운 곳에서 저주스러운 시대를 물리쳐야 할 것이다!”라고. 루쉰이 ‘감히’ 말한 저주스러운 시대의 모습을 통해, 지금 우리 시대의 모습과 나의 얼굴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제1강 자신의 시대를 치열하게 고민한 전사, 루쉰

◆ 루쉰은 어떻게 전사가 되었나

※ 학습목표
루쉰의 성장배경을 알아본다

▲ 다른 것 사이의 긴장이 담긴 이름
루쉰(魯迅), 본명은 주수인(周樹人)으로 樹(나무-자연, 생명)와 人(사람-자연을 가공하여 제2의 자연을 만들어내는 존재)의 결합이며 이를 통해 루쉰의 삶이 평탄하지 않으리라는 것과 그의 글에 나타나는 큰 스케일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본명인 노신에서 노(魯-노둔하다, 늙고 우매하다)와 신(迅-신속하다)의 상반되는 의미가 공존하고 있는데, 이는 자신 안에 두 가지 속도를 다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신의 사유와 글 역시, 늘 두 가지가 가지고 있는 속성에 대해 고민하고 갈등하면서 깊이를 더 해가는 방식이다.

* 참고자료

중국의 작가
루쉰〔魯迅, 1881.9.25.~1936.10.19〕

▲ 도련님에서 소년가장으로의 전락
“나는 누구든 안락한 환경에 있었던 사람이 갑자기 그 반대의 생활로 떨어져 버렸다면, 그 떨어지는 과정에서 세상 사람들의 참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자서」)
“약방 계산대가 내 키만큼 높았으며, 전당포의 계산대는 내 키의 갑절이나 되” (「자서」)

1881년 태어난 루쉰은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나 부유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러다가 할아버지가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고 아버지가 병환을 얻으면서 루쉰의 집안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루쉰은 아버지의 약을 구하기 위해 약방으로, 돈을 구하기 위해 전당포로 뛰어다니게 되었는데 약방 계산대와 전당포의 계산대는 어린 루쉰이 느끼는 세상의 벽만큼이나 높은 것이었다. 약방 계산대는 루쉰에게 어느 정도 익숙한 현학적인 전통의 세계였기에 루쉰의 눈높이를 뛰어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전당포의 계산대는 어린 루쉰에게 화폐의 소중함과 더러움을 동시에 알게 해준 곳이므로 심리적으로 훨씬 높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것이 루쉰이 느꼈던 세상의 두 가지 벽이다. 또한 이것은 전통적인 낡은 시대의 유물(약방), 그리고 자본주의적 질서인 서구의 문명(전당포) 사이의 긴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루쉰은 성인이 되어 이 두 가지 것에 맞서 처절하게 싸우게 된다.

▲ 양의학을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간 루쉰
결국 루쉰의 아버지는 죽었고 루쉰은 아버지가 비과학적인 한의학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루쉰은 양학을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떠난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 근대문물은 마술이며 오랑캐에게 혼을 빼앗기는 것으로 간주되었는데 그는 남경의 광무철도학교에서 처음으로 물리, 수학, 역사, 지리, 체육, 미술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때부터 근대적인 학문을 접하게 된다. 그 당시 대부분의 근대지식인들은 동경으로 유학을 가지만 노신은 아버지같이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겠다는 결심으로 시골이라 할 수 있는 ‘센다이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한다. 그런데 그는 이곳에서 결정적인 두 가지 체험을 하게 된다. 중국에서 온 젊은 청년이 열심히 하는 모습을 기특하게 여긴 교수가 루쉰에게 관심을 가지고 일본어를 가르쳐주고 노트 필기를 지도해 주었다. 이를 질투한 학생들이 그것을 사건화 하여 교수와 루쉰 모두에게 큰 상처가 된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사건은 ‘환등기 사건’이다. 미생물학 시간에 환등기로 뉴스와 같은 필름을 보여주었는데 일본학생들은 일본이 이겼다는 이유로 전쟁에 관한 것을 보고 박수를 치고 좋아하고 있었다. 또한 루쉰의 고향에 있는 사람이 군사재판을 받고 있고 그 주위에 사람들이 둘러서서 있는 장면을 보게 되었는데, 결국 그 사람은 일본인에 의해 총살되었다. 학생들은 박수를 치고 중국인들을 욕하고 있었다. 루쉰은 이 사건으로 의사의 길을 접게 된다. 어떻게 사람의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이들이 사람을 죽이는 장면을 보고 환호할 수 있는가? 또한 루쉰은 중국의 무지몽매함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자기 동족이 죽는 것을 둘러서서 가만히 보고 있는 것에 루쉰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후에 루쉰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패거리들’의 모티브가 되었다. 또한 집요한 복수의 테마 역시 자리 잡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적은 패거리라는 장(場)을 만드는 구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루쉰과 니체 - 무거움과 웃음의 공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니체는 고급스러운 명랑성을 가지고 있다. 즉, 자신을 억압하는 것 혹은 사소한 비속함 같은 것들을 내려누르는 강한 힘이 경쾌한 명랑성을 기반으로 하여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에 비해 루쉰은 무거운 분위기가 강하다고 할 수 있는데 간혹 하이(High) 코미디를 구사하는 경우도 있다. 그의 글에서 느껴지는 무거움은 아주 가벼운 웃음을 유발하는 무거움인 경우가 많다. 이런 고급스러운 코미디를 구사한다는 점에서 니체와 유사점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 참고자료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

아트앤스터디 강의노트 (www.artnstudy.com)

◆ 그는 어떻게 전사로서의 삶을 개혁 했는가

※ 학습목표
루쉰이 의학에서 문학으로, 그리고 적막과 비애에서 희망으로 나아가게 되는 과정을 이해한다

▲ 정신개혁을 위한 문학
“무릇 어리석고 약한 국민은 체격이 제 아무리 건장하고 튼튼하다 하더라도 하잘것없는 본보기의 재료나 관객 밖에는 될 수 없었다.그러므로 우리들이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그들의 정신을 뜯어고치는 것이었다. 정신 상태를 뜯어고치는 데 가장 좋은 것은, 당시에는 당연히 문예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되었다.”

루쉰이 살던 시대의 중국은 서양의 문물이 들어오던 시기였기에, 근대국가를 설립하고자 했던 선각자들은 법률이나 의학, 경제를 공부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루쉰은 문학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이렇게 문학을 통해 중국인의 정신을 치료하고자 한 루쉰은 친구들과 함께 '신생'이라는 잡지를 내게 된다. 그러나 사정은 그들을 따라주지 않아 잡지는 실패하게 되는데 루쉰은 그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한 사람의 주장이 남의 찬성을 얻으면 전진하게 되고, 반대를 얻게 되면 분발하게 된다. 그러나 낯선 사람들 속에서 홀로 외쳤는데 아무 반응이 없다면, 즉 찬성도 반대도 없다면, 마치 끝없는 벌판에 홀로 버려진 듯 자신을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게 되는 것이다. 이 얼마나 큰 비애인가! 나는 내가 느꼈던 것을 적막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말하는 무료함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오는 무기력이 아니다. 할 수 있는 의지, 능력이 있음에도 아무도 반응해주지 않을 때 느끼는 적막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 약방과 전당포의 계산대에서 느꼈던 좌절감은 성인이 된 루쉰에게 세상에 대한 비애감으로 이어지게 되고 결국 그는 자신이 실패했다고 느끼게 된다. 곧이어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 왕조가 몰락하고 공화국이 수립되었지만, 원세개로 대표되는 군벌의 발호로 역사가 반동화 되는 것을 목격함으로써 루쉰의 비애와 적막은 더욱 깊어졌다. 루쉰은 시간을 벌기로 하고 동경으로 와서 동생과 함께 지내며 잡지를 보고 책을 읽고 글을 쓴다. 문화와 진화론에 관한 글을 쓰기도 하고, 많은 양의 번역을 한다. 폴란드나 러시아 같은 동부에 서 구박받고 사는 민족들에 관한 이야기를 번역하기도 한다. 또한 중국에서 굉장히 영향력 있는 중국 근대의 초석자들이자 계몽 사상가들을 만나 사상적 교류를 하기도 한다.

▲ 니체와 루쉰 - 초인사상을 이해한 루쉰
루쉰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번역하기도 했는데 사실 그 당시 니체의 초인사상이 유통되는 방식은 굉장히 저급한 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전쟁이 계속 벌어지고 있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마치 히틀러가 니체를 전유하는 방식에 가깝게 니체의 초인사상이 수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루쉰은 당시의 시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니체를 수용했는데 현재의 우리가 니체를 수용하는 방식과 유사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참고자료

프리드리히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홍신문화사, 2006)

▲ 칩거 생활을 벗어나 세상으로 뛰어 든 루쉰
루쉰은 1909년까지 일본에 있다가 결국 중국으로 돌아와 선생님이 된다. 혁명 이후에는 6,7년 동안 교육부 관리로 일하기도 했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잡지에 글을 발표하면서 정신없는 생활을 보내기도 했다. 한편 일본에서 함께 공부하며 중국을 변화시킬 것을 약속했던 친구들이 중국에 돌아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 사건을 보았으며, 동시에 ‘장훈의 복벽’에 항거하는 뜻에서 그는 결국 칩거 생활을 선택하게 된다. 의학과 문학 모두에서 자신의 무력감을 느낀 것이다. 그는 몇 년 동안이나 방에 틀어박혀 사람들과의 왕래 없이 비문을 베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 전현동(錢玄同)이 잡지「신청년」에 참여하라며 그를 찾아온다. 시대의 적막과 비애에 좌절한 루쉰을 설득한 것은 전현동의 ‘철방의 비유’였다. 철방의 비유란, 아무것도 없고 공기도 통하지 않으며 문도 없는 방안에 사람들이 차곡차곡 쌓여 고통 없이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다. 루쉰은 어차피 고통 없이 죽어갈 수 있으니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쪽을 선택했지만 전현동은 문을 깨부수고 나갈 수 있는 희망을 이야기한다. 루쉰은 결국 전현동에게 설득 당하게 된다. “내가 겪기에 고통스러웠던 적막감을, 내 젊은 시절과 같이 꿈에 부풀어 있는 젊은이들에게 결코 다시는 전염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고독한 칩거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세상으로 나오게 된다.






제2강 자기 본위의 사상

◆ 루쉰의 사랑과 희망

※ 학습목표
루쉰의 창작의 뿌리인 사랑과, 끊임없이 세상과 싸우는 루쉰의 희망을 이해한다

▲ 창작의 뿌리는 사랑이다
“사람이 적막을 느낄 때 창작은 탄생한다. 마음속이 깨끗할 때 창작은 탄생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창작의 뿌리는 사랑이다.”(『소잡감』중에서. 1927)

들뢰즈가 “욕망이 생산”이라고 말했듯이 글을 쓰는 사람들은 세상에 대해서 아주 깊이 있는 눈으로 바라보고 바꾸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에 글을 쓸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이 곧 사랑이다. 그런데 루쉰의 사랑은 개인의 욕망에 한정되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다. 상대를 바꾸기 위해서 자신이 개입해서 들어가는 적극적인 사랑이다. 따라서 그의 사랑은 타인의 질병을 대신 앓아주는 것이다. 글쓰기를 무기로 하여 세상을 치유하는 이것은 의사의 자의식과도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몸의 병은 치유될 수 있어도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의 질병은 완쾌가 불가능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쉰은 사랑을 가지고 끈질기고 집요하게 싸워나간다.

▲ 보이지 않는 적들과 싸우는 전사
「전사」라는 글에서는 리듬이 느껴지고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의미가 느껴지는 강한 효과를 주는 글이라는 점에서 산문시를 뛰어넘는 산문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전사는 없을까
아프리카의 원주민처럼 몽매하면서도, 새하얀 모젤총을 메고 있는 것도 아니고, 중국의 녹영병처럼 무기력하면서도 대형 권총을 차고 있다는 것도 아니다. 그는 쇠가죽과 폐철로 만든 갑옷의 비호를 바라지 않는다. 그는 그의 있는 그대로에다가 무기는 야만인이 사용하는 투창뿐이다.
그가 무물의 진(無物의 陣)에 발을 들여놓자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가 격식대로의 인사를 한다. 그 인사가 무기라는 것, 사람을 죽이고 피를 보지 않는 무기라는 것, 많은 전사들이 그 때문에 멸망했다는 것, 포탄과 마찬가지로 용사의 힘을 위축시키는 무기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그들의 머리 위에는 가지가지 깃발이 꽂혀 있고, 가지가지 아름다운 칭호가 수놓여 있다. 자선가, 학자, 문사, 장로, 청년, 아인(雅人), 군자·····머리 아래에는 가지가지 웃옷이 잇는데, 가지가지 아름다운 무늬가 수놓여 있다. 학문, 도덕, 국수(國粹), 공론(公論), 논리, 정의, 동방문명······
그러나 그는 투창을 치켜든다.
······(생략)······
마침내 그는 무물의 진중에서는 나이 들어 수명이 다하였다. 그는 마침내 전사가 아니며 무물의 물(物)은 승자였다.
이런 곳에서는 검극(劍戟)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세상은 태평이다.
태평······
그러나 그는 투창을 치켜든다!(「이러한 전사」 중)

루쉰은 그의 무기인 투창처럼 투박하지만 정직한 문장들을 가지고 위선적인 세상과 싸운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태평하다. 루쉰의 ‘적막과 비애’는 여기에도 숨어 있는 것이다. 루쉰은 이제, 세상을 완전히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끝없이 투창을 던질 것이다. 그가 적을 증오하기 때문이 아니라 더 큰 사랑을 위한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희망과 절망과 허망함의 삼각관계
루쉰은 언어가 세계를 제한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언어의 불충분함을 메우기 위해 말을 길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루쉰은 형체만 남는 앙상한 문장을 쓴다. 루쉰은 단문과 반어적 표현을 통해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믿었다. 루쉰은 자신의 생각을 가장 잘 전달해 줄 수 있는 형식을 스스로 찾아내기 때문에 장르에 있어서 다양한 형식실험을 시도한다. 따라서 문학이라는 형식의 잣대로 루쉰의 글을 읽게 되면 독자는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루쉰의 글을 읽을 때 독자는 기존의 문학적 관습에 대해 무장해제하고 접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렇게 루쉰은 그런 언어의 절망을 인정하고 그의 문장의 칼날을 더욱 날카롭게 갈기로 한다. 이때, 그가 만들어내는 짧고 반어적인 문장들 속에서 여백과 행간은 그 자체로 더욱 복잡하고 치명적인 언어가 된다. 루쉰이 절망을 인정하는 방식은 허무주의가 아니라 희망에 대한 신중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희망과 절망과 허망함의 삼각관계 속에서 이것들이 응집이 되어 다른 것을 만들어내는 긴장감이 바로 희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아트앤스터디 강의노트 (www.artnstudy.com)

◆ 루쉰의 잡문과 자기 본위의 사상

※ 학습목표
루쉰의 글쓰기 방식과 중간물의 존재를 인정하는 자기 본위의 사상을 이해한다.

▲ 고도의 글쓰기, 잡문
루쉰은 짧고 반어적인 단문들을 즐겨 쓰는가하면, 끊임없이 짧고 직설적인 단평들을 한꺼번에 폭포처럼 쏟아내기도 한다. 한마디로 그의 문장은 잡스럽다. 그러나 ‘잡’은 저속하다거나 미숙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모든 장르에 대해서 통달하고 온갖 종류의 지식과 교양과 세계관과 경험이 들어가 있는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잡문을 쓸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잡문에서 쓰고 있는 것은 코 하나, 입 하나, 털 하나이지만, 그것을 합한다면 아마도 하나의 전체적인 형상이 될 것이다.”(『준풍월담』)

“그런데 나에게 이러한 단평을 쓰지 말라고 권고하는 사람도 있다. 만일 예술의 궁전에 이처럼 번거로운 금령이 있다면 차라리 들어가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사막에 서서 휘날리는 모래와 나뒹구는 돌멩이를 보며 즐거울 때에는 마음껏 웃고 슬플 때에는 크게 부르짖으며 성이 날 때에는 내키는 대로 욕하는 것이 설사 자갈에 맞아 온몸이 거칠어지고 머리는 깨져 피가 흘러 가끔 자기의 엉킨 피를 매만지면서 꽃무늬와 같다고 생각할지라도 중국 문사들의 뒤꽁무니를 쫓아가 셰익스피어를 모시고 빵과 버터를 먹는 것보다 어찌 못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화개집』)

루쉰이 평생 서구적인 것과 전통적인 것에 대한 투쟁을 동시에 해 나간 것처럼 그의 글쓰기 방식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언제나 자기 안에 있는 내용을 새로운 스타일로 표현하고자 했다. 『신청년』의 두 가지 목표는 ‘과학혁명’과 ‘문학혁명’이었다. 또한 글도 일부의 사대부들이 쓰던 고어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현재 쓰고 있는 구어를 사용하자는 ‘백화문 운동’(중국의 언문일치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루쉰 역시 이런 언어의 민주주의 운동에 같은 뜻을 가지고 있었다.

▲ 자기 본위의 사상과 목적론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
“나는 늘 무슨 사물이나 전변하는 과정에는 어쨌든 중간물이 얼마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양해한다.”

루쉰의 사상은 서양의 사상도, 전통적인 사상도 아니다. 즉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문제 혹은 변증법적 대립의 문제는 그에게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가 계속 희망과 절망과 허망을 버무려서 새로운 종류의 희망을 발견해가듯이 사상도 스스로 발견해가는 자기본위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중간물’의 존재를 인정한다. 이항적 대립의 도식적 항 자체를 균열하는 제3항(중간물)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루쉰에게 변증법이 있다면 그것은 헤겔의 변증법과는 다르다. ‘중간물이 있는’ 운동의 과정은 목적론을 비켜서 있고 ‘사물이나 전변하는 과정’에 매개항(중간물)이 끼어들면서 목적을 와해한다. 루쉰은 서양의 학문을 공부하고 사상을 번역하고 중국의 근대를 제작한 계몽가로 활약 했지만 루쉰의 사상은 서구적인 것도 중화적인 것도 아니다. 루쉰이 필연적으로 중국의 전통을 비판하면서도 서구적 계몽을 근본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이유는 루쉰이 중간적인 것을 인식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루쉰의 자기본위의 사상이다.

“ ‘멸종’이란 말은 인간을 놀라게 할 뿐 자연계는 놀라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연은 무자비하다. 스스로 멸종의 길로 나아가는 민족에 대해 자연은 조금도 사정을 보지 않고 멸종하게 내버려둔다.”『수감록』

루쉰은 인간은 늘 인간 중심의 시각으로 자연을 바라본다며 목적론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을 가한다. 오히려 자연이라는 것, 필연성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본위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 객관적으로 운동하는 것이며 운동 자체가 필연적인 것이지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이는 것은 필연성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제3강 루쉰의 소설과 광인

◆ 루쉰의 소설을 읽는 방식

※ 학습목표
루쉰의 소설을 읽는 방법을 이해하고 광인이 발명되는 과정을 살펴본다

▲ 루쉰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
텍스트 안에는 장르의 문법이, 텍스트 밖에는 생산과정과 유통, 그리고 다양한 효과들이 만들어지는 ‘권력’이 작동하게 된다. 독자는 텍스트를 비평적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하고 작가론의 맥락에서 바라볼 수도 있다. 텍스트는 궁극적으로 ‘말걸기’라고 할 수 있는데 루쉰의 텍스트에서 ‘말걸기’에 대한 대답은 때로는 침묵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의 침묵은 무기이다. 독자가 봐야 할 것은 그가 누구를 향해서 무기를 겨누고 있는지, 어떤 상황에서 무기를 들고 있는 지이다. ‘말걸기’는 소통을 전제로 한 것이긴 하지만 루쉰의 경우에는 소통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거는 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을 거는 것 자체가 중요하며 소통을 하려는 루쉰의 노력을 읽어내야 한다. 루쉰의 소설을 읽으면 ‘정말 이것이 소설일까’라는 의심을 하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소설은 서양의 소설(novel)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고 따라서 그것에 요구되는 형식적 틀을 요구하게 된다. 근대가 되면서 이 장르(소설)를 통해 큰 이야기(大說)을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된다. 이들은 소설에 대한 감각이 남달랐는데 그렇다고 해서 소설이 완결되고 훌륭한 것이라고만은 생각하지 않았다. 루쉰은 이 틀을 고수하면서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려고 한 사람 중의 하나였으며 자기 나름대로 새로운 방식의 소설을 만들어 나갔다.

▲ 『광인일기』 - 광인은 어떻게 발명되는가
①형식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부분은 고문(지식인들이 쓰던 정통 중국어)으로, 광인의 입을 빌어서 이야기하는 부분은 백화문으로 씌어졌다. 즉, 두 개의 글쓰기가 하나의 작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②루쉰은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서 말을 거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익숙한 언어의 문법 혹은 생각들을 깨나가기 위해서 말을 거는 것이며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 『광인일기』이다. 광인은 그 자체의 잘못 때문이기보다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체계나 상황에 의해 발명되는 것이다. 자신들이 정상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은 광인의 입장에서 보면 ‘식인’일 뿐이다. 광인은 이들에 대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③서구적 맥락에서의 이성
전지전능한 신이 관장하던 시대가 가고 인간의 이성이 도래하는 시대가 오면서 인간은 이성을 가지고 자연을 개척하고 문명화하기에 이르렀다. 즉 신의 자리에 인간의 이성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인간의 이성으로 세계를 진보시킬 수 있다는 믿음은 종교적 믿음과 다르지 않을 정도가 된 것이며 과학은 이것을 뒷받침해주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과학이나 생물학에 의한 체계적 분류에서 벗어난 것들은 변태, 즉 비정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변태라는 과학용어가 인간의 삶에 깊이 침투해 들어옴으로써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광인일기』, 『장명등』, 『약』에 드러나고 있다. (푸코의 『광기의 역사』참고)

※ 참고

네덜란드의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쉬〔Hieronimus Bosch, 1450~1516〕의 ‘광인들의 배’

서양에서는 사회가 감당할 수 없는 자들은 사회의 울타리 밖으로 추방되었다.

아트앤스터디 강의노트 (www.artnstudy.com)

◆ 광인은 누구인가

※ 학습목표
루쉰이 광인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유에 대해 알아본다

▲ 광인의 언어
광인은 보통사람들과 사고가 다르고 따라서 언어도 다를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루쉰의 무기인 언어는 이성적인 언어가 아닌 강력한 광인의 언어인 것이다. 광인의 언어는 정상인들의 기준으로 보면 통사구조가 파괴된 소통이 불가능한 언어이다. 이는 익숙한 질서를 교란시키는 것이며 이는 루쉰이 당시에 백화문으로 문장을 쓴 것이 당시 지식인들에게 광인의 언어로 비추어졌던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 광인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유
루쉰은 근대적 계몽 이성의 작동방식을 살짝 뒤집어버림으로써, 즉 광인으로 하여금 말하게 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서구적 이성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제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이라는 이름의 몽매한 유습을 파괴하고자 한다.

한 개인의 자존심은 특이한 것으로서 속물들에 대한 도전이다. 정신병학에서의 과대광란증을 제외하고 이런 자존심을 가진 사람들은 대개 좀 천재적인 점이 있다. 노르다우(헝가리 출생의 독일 의사. 문학평론가) 등에 따르면 광기가 좀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들은 필시 자기의 사상과 식견이 속물들보다 뛰어나고 또 속물들이 알아주지 못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때문에 세상물정에 대해 불평하며, 속된 것을 미워한 나머지 점차 염세가나 ‘국민의 적’으로 변해 버린다. (『수감록』38)

『광인일기』의 광인이 앓고 있는 ‘피해망상증’ 역시 자존심 있는 천재들의 ‘과대광란증’과 다르지 않다. ‘과대광란증 환자’들이 세상의 속물들과 싸우듯이, 『광인일기』의 주인공은 ‘식인’들과 싸운다. 그들은 모두 ‘사상과 식견이 속물들 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국민의 적’이 되어 추방되거나, ‘광인’으로 분류되어 격리된다. 또한 정상인들이 광인에게 가하는 살해는 합법성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중국의 이런 상황을 지켜보며 루쉰은 광인이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인지를 보여주려 했다.





제4강 광인은 어떻게 발명되는가

◆ 광인을 바라보는 방식 - 시선, 웃음, 빛

※ 학습목표
광인은 어떻게 발명되는지 알아본다

▲ 시선
소설의 시작부터 집요하게 등장하는 어떤 시선들이 그를 불안에 떨게 하고 의심하게 하며 때로는 분노하게 만든다. 사람들이 모두 같은 시선으로 자신을 보는 이유, 그것을 그는 ‘식인’의 풍습 때문이라고 단정 짓는다. 소설의 주인공이 앓고 있는 ‘피해망상증’은 사람들이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한다는 의심을 하면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그의 의심이 터무니없이 시작된 것은 아니다. 주인공이 실제로 병을 앓고 있는 것인지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오히려 어떤 대상이 특정한 방식에 의해 병자로 분류되는 방식이며 그 방식의 하나로 다수의 특정한 시선이 개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인공은 유전되고 있는 식인풍습을 그 자신이 병자가 됨으로써 비판하지만 ‘인의도덕’에 익숙한 다수의 시선들의 감각으로는 그것이 단지 질병으로 이해될 뿐이다.

▲ 웃음
시선을 통해 광인이 만들어진다면 웃음은 광인으로 확정된 사람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식인’은 그 자체로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라기보다, 그것을 가치화하는 시스템의 작동방식인 것이다. 때문에 ‘식인’하는 사람들은 “자신은 사람을 잡아먹으려 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잡아먹히는 건 두려워서 모두들 지극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서로 상대의 얼굴을 몰래 훔쳐”보는 것이다.

▲ 빛
“오늘 밤은 참 달이 밝다. 달을 보지 못한 지가 벌써 30여 년이나 되었다. 오늘 보니 기분이 유난히 상쾌하다. 지나온 30여 년 동안을 완전히 혼미 속에서 지내왔음을 겨우 알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달과 연관된 존재들은 늑대인간처럼 광기를 가진 존재들이다. 『광인일기』의 광인은 달을 보고 자각하게 된다.

“오늘은 전혀 달빛이 없다. 나는 이것이 좋지 못한 징조라는 것을 안다.”

사람들의 시선은 광인을 불안에 떨게 한다. 광인은 달을 보고 자각하고 새로운 종류의 질서를 갖게 되었지만 이성의 세계-태양의 세계인 낮에는 식인들이 광인을 만들어내는 질서
가 여전히 작동할 것이다.
“장명등을 꺼버리면 우리 지꾸앙(吉光)마을이 무슨 ‘길한 빛’ 마을이 되겠나. 끝나고 마는 게 아닌가? 노인들의 말로는 이 등은 양나라 무제가 켠 이래 지금까지 쭉 전해 내려오면서 한 번도 꺼뜨려 본 적이 없었다지 않나....(그런데 그는) 사람만 보면 언제나 묘당의 장명등을 꺼버리자고 했다는 거야. 그는 등을 끄면 다시는 메뚜기의 피해나 질병의 고통이 없을 것이라면서.”(『장명등』)

마을 사람들은 장명들을 켜놓고 사당에 자신의 소원들을 빌고 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데 광인은 그것을 부정하려 한다. 루쉰은 몇 천년동안 이어져오던 풍습을 빨리 끊어버리자는 것을 상징적으로 장명등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 식인은 누구인가
“그 여자가 ‘너를 물어뜯어 놓겠다!’고 한 말이나, 험상궂은 얼굴에 이빨을 드러낸 무리들의 웃음이나, 엊그제 소작인의 말이나 모두 틀림없이 저희들만의 암호였다. 그들의 말에는 독이 가득 차 있고, 웃음 속에는 칼이 숨어 있으며, 그들의 이빨은 온통 새하얗고 뾰족뾰족하게 나란히 박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사람을 잡아먹는 도구인 것이다.” 식인의 무기는 그뿐만이 아니다. ‘꾸자유(古久) 선생의 오래된 출납부’속에도 있고, 오래된 역사책의 페이지마다 비스듬하게 쓰여진 ‘인의도덕’ 속에도 있으며, 비과학적인 의학지식 속에도 있다. 그들은 ‘나쁜 놈은 죽여서 그 고기를 먹고 그 가죽위에서 자야한다’고 생각하고, 소작인의 소작료를 절대로 낮추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식인이라고 해도 모두 같은 것만도 아니다. 즉 힘없고 가난한, 보통의 민중들인 것이다. 그들은 모두 오랫동안 굴욕과 모욕에 길들여진 탓에 그러한 상황을 ‘정상’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자들이다. 하지만, 루쉰이 보기에 그들은 ‘창 없는 철방’에 누운 채 잠을 자며 죽어가고 있는 자들에 불과하다. 광인은 그 방에서 깨어난 자, 잠자는 자들을 깨우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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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인의 자각과 희망

※ 학습목표
광인이 식인들의 세계에서 무엇을 발견하고 자각하는 지를 이해한다

▲ 효(孝) 이데올로기
자연계의 배치에도 결함이 없을 수 없으나 연장자와 연소자를 결합시키는 방법에는 착오가 없다. 자연계는 ‘은혜’를 요구하지 않는다. 어떤 동물이나 자기의 어린 자식을 진지하게 사랑한다. 그들은 이득을 보려는 생각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자기를 희생하면서까지 그의 장래의 생명으로 하여금 발전의 행로로 나아가게 한다.(『우리는 지금 어떻게 아버지 노릇을 할 것인가』)

식인들은 ‘충효’를 위해서는 자식을 죽이거나 형제를 죽여도 된다고 생각한다. 즉 유교적인 윤리의 비윤리성과 폭력성이 식인의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작년에 렌꺼촌에서도 한 놈 때려죽였지요. 이런 놈을 말예요. 여럿이 굳게 약속을 하고, 그러니까 같은 시각에 모두가 일제히 손을 대서 누가 제일 먼저 손을 댔는지 모르게 한 거지요. 그 후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장명등』)

「아버지노릇」이라는 글에서는 아비가 아버지노릇을 잘하기 위해서는 아버지 스스로가 바로 서야 한다고 루쉰은 말하고 있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의존해서는 안 되며 자기를 실현하기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한다. 부모자식간의 관계에서도 부모는 자식을 해방시킬 수 있는 거리의 미학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런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관계가 되지 않으면 세상이 바뀔 수 없다는 것이 루쉰의 생각이다. 근본적인 것부터 바뀌려면 가장 밀접한 관계부터 다른 관계가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 광인의 자각
광인이 식인들과 같은 ‘철방 안에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광인은 자각한다. 자기 자신도 어렸을 때부터 형에게 식인이 되는 과정을 교육받았고 현재는 식인행위를 하지 않지만 한때는 식인의 길을 걸어왔다는 것을. 중요한 것은 광인의 자각이다. “사람을 잡아먹는 인간은 사람을 잡아먹지 않는 인간에 비해 얼마나 부끄러운 존재입니까. 이것은 아마도 벌레가 원숭이에 비해 부끄러운 것과는 도저히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루쉰의 탁월함은 오히려 광인이 식인들과 소통하려 하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다. 루쉰은 식인과 광인이 서로 무관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그의 발견은 이성과 광기의 서구적 이분법을 넘어서 있으며 그 안에 반성적 태도가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 식인은 겉으로는 정상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비정상인 자, 전통과 유습에 사로잡혀 있는 몽매한 다수자이다. 광인은 비정상인이지만 정상인자, 현재에는 비식인이지만 과거에는 식인이었던 자, 하지만 식인화 과정에서 이탈한 시대의 소수자이다. 이 둘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있다. 그 꼬리를 끊어야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겠지만, ‘진정한 인간을 만나기는 어렵다’는 것 또한 루쉰은 감추지 않고 말한다.

▲ 쉽지 않은 희망
광인일기의 끝부분은 이렇게 끝난다. ‘사람을 잡아먹어 본적이 있는 아이들이 혹시 있을까?’『장명등』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사당에 갇혀있는 주인공의 고함소리에 놀라 놀던 아이들은 달아난다. 녹색의 장명등은 한층 더 녹색의 신전과 감실을 밝게 비추고 있고, 아이들은 ‘모두가 웃으면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노래를 엮어서 합창’할 만큼 아직은 몽매하고 세상은 태평하다. 또 혁명가의 피를 바른 만두를 먹은 아이는 결국 죽어버린다.(『약』) 하지만 루쉰은 전사다. ‘태평’한 세상에 절망하지 않고, 그것이 허망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다시 투창을 치켜든다.






제5강 정신승리법 혹은 노예정신

◆ 『아Q정전』 『쿵이지』 『조리돌리기』에 나타난 패거리들의 습성

※ 학습목표
패거리들의 습성을 통해 노예정신을 이해한다.

▲ 노예는 누구인가
루쉰은 식인에 대해서보다 그들을 먹여 살리는 노예의 존재에 더욱 경악했다. 쿵이지와 아큐, 그리고 패거리들 모두 노예라고 할 수 있다. 노예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인격적인 긍지나 자기 정체성이 자신의 내부에서 구성되지 못하고 자신보다 강한 것에 굴복하는 자들이다. 니체 역시 노예와 비슷한 약자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타인의 시선에 의해 결박당하거나 외부적인 힘에 의해서 다른 것에 투사해서 운명 혹은 타인을 탓 하면서 자기를 기만하는 사람들이 약자라고 말하였다.

▲ 노예와 주인의 변증법
루쉰이 아큐와 쿵이지 그리고 패거리들을 통해 집요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사천여년 동안 식인 풍습을 가능하게 만들어왔던 매커니즘이다. 식인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식인이 강자이기 때문이 아닌 것이다.

“지배받는 자는 남을 먹여 살리고 지배자는 남이 먹여 살린다고 하지 않았던가? 유감스러운 것은 이론은 이렇게 훌륭한데 지금까지 완전무결한 훌륭한 방법을 발명하지 못한 것이다. 권세 앞에 복종하려면 살지 말아야 하고, 금의옥식을 바치려면 죽지 말아야 하며, 지배를 받으려면 살지 말아야 하고, 지배자를 먹여 살리려면 죽지 말아야 한다.”(『춘말한담』)

한 번 노예가 되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노예는 자신의 외부에 있는 사람을 주인님으로 호명해주고 외부에 있는 존재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는 자이다. 노예는 ‘주인’의 존재를 승인함으로써 자기 존재를 증명한다. 지배자를 먹여 살리고 그의 권세 앞에 복종하며 그렇게 사는 삶을 의심하지 않는 것, 그것의 노예의 정체성이다.

▲ 노예들의 집단, 패거리
“자신은 사람을 잡아먹으려 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잡아먹히는 건 두려워서 지극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서로 상대의 얼굴을 몰래 훔쳐본다.”(『광인일기』)

패거리들은 불안감에 끊임없이 시달리는 존재들이며 패거리 속에서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 그들은 패거리를 이룸으로써 힘을 얻을 수 있기에 패거리 밖에 있는 공통의 적을 만들고 적개심을 확인하고 외부의 것들에게 살인행위를 가한다. 이런 과정 속에서 패거리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식인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들은 약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단지 이들은 사천년 이래로 지배받아왔던 삶에 대해서 뭔가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 패거리에 대한 노신의 경험 - 환등기 사건
스크린 안의 처형당하는 중국인 혁명가와 둘러서서 구경하고 있는 중국인들. 스크린 밖에서 웃고 있는 일본인들. 그 틈에 끼어서 바라보고 있는 루쉰의 위치. 루쉰은 스크린 안에서 혁명가의 죽음을 무지몽매하게 구경하고 있는 중국인들과 다르지 않았다. 즉 스크린 안에 있는 중국인이면서도 스크린 밖에서 이를 바라보는 중국인이었다. 그러면서 웃고 있는 일본인들처럼 스크린 밖에 있으면서도 일본인과는 같은 위치가 아니었다. 루쉰은 모든 것을 지켜보는 철저한 외부인이기도 했다. 이렇게 복잡하고 다층적인 시야의 경험은 루쉰으로 하여금 특이한 패거리 사상을 집요하게 만들어낼 수 있게 해주었다.

※ 참고자료

임지현 외 『우리안의 파시즘』(삼인,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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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큐정전』과 『쿵이지』에 드러난 노예의식

※ 학습목표
아큐와 쿵이지의 경우를 통해 노예의식을 이해한다

▲ 루쉰이 바라보는 노예의 역사
겉치레하기를 좋아하는 학자들이 잔뜩 늘어놓으면서 ‘한족의 발상시대’니, ‘한족의 발달시대’니, ‘한족의 중흥시대’니 하는 버젓한 표제를 붙여 역사를 꾸며놓는다 해도 그 호의는 감탄할 만 하나 그 용어는 너무 완곡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이러하다.
1. 노예가 되고 싶어도 되지못한 시대.
2. 잠시 노예로 안착한 시대
이 양자의 순환이 바로 ‘옛 선비’들이 말하는 이른바 ‘일치일란’이라는 것이다”(『등하만필』)

▲ 패거리들의 구경거리
『쿵이지』에서 패거리들은 술집에 둘러앉아 쿵이지를 안주 삼아 유쾌한 시간을 보내고, 『조리돌리기』에서 패거리들은 집요하게 구경거리를 찾아내면서 한여름 무더위와 무료함을 잊는다. 그들에게는 ‘구경거리’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구경거리가 있어서 구경을 한다기보다는 패거리가 구경거리를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들이 바로 『아Q정전』에서 아큐가 처형당하러 갈 때 길가에 있었던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많은 구경꾼들’이다. 아큐는 혁명군에 의해 처형당하기 전에 이미 이 패거리들의 시선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패거리들은 자신들의 삶에 어떤 변화를 기대하지 않는다. 자신은 다치지 않으면서 스펙타클을 보면서 잠시 위안을 받기를 바랄 뿐이다.

▲ 루쉰의 복수의 테마
루쉰의 복수는 일대일의 사적인 관계 속에서 생겨나거나 스펙터클을 만들어내는 전투와 같은 상황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루쉰에게 복수는 패거리들에 대한 원한이라고 할 수 있다. 루쉰은 패거리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어떤 종류의 스펙타클도 제공해주지 않고 그들을 고문함으로써 그들에게 복수한다. 여기에는 패거리들에게 구경당하는 자가 오히려 패거리들을 구경함으로써 그들에게 복수하는 방식도 존재한다.

▲ 노예의 인정욕망
노예는 자신의 주인에게 끊임없이 인정받고 싶어 한다. 노예근성은 확실히 인정욕망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노예들끼리는 경쟁이 심하고 자기 자신 안에서도 굉장히 복잡한 매커니즘이 작동한다. 노예근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굉장히 무력한 방식으로 인정욕망을 드러내려고 한다. 아큐가 높은 집 어른에게 매를 맞았다는 이유로 아큐를 존경하는 마을 사람들의 복잡한 인정욕망이 그 예이다. 존경하는 사람이 자신을 불러주기를 바라고 그 감정이 너무 강한 나머지 그에게 매를 맞는 것조차 부러워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정욕망은 대단히 보편적인 욕망이다. 문제는 인정욕망에 집착하다보면 노예근성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행복은 자신의 주인의 표정과 눈빛에 따라 좌지우지 되는 것이다.

▲ 아큐와 쿵이지의 말로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정신의 승리법’을 구사하는 아큐는 문자를 터득하고 있지 못하다. 반면 쿵이지는 문자를 터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전에 가지고 있었던 삶의 방식만을 가지고 살고 있기 때문에 새 시대에 적응해서 살 수 없다. 그런데 아큐는 사람들을 우습게 생각하지만 사람들 역시 아큐를 우습게 생각한다. 아큐 역시 쿵이지와 마찬가지로 패거리의 바깥에 있는 자로 “미장사람들의 아큐에 대한 관심은 다만 그에게 일을 부탁할 때나, 그를 두고 농담을 할 때에만 국한”되어 있다. 하지만 쿵이지가 이전 시대의 권력의 상징인 ‘글’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패거리들의 조롱 속에서 비참한 일생을 마감한 것에 비해, 한 줄의 글도 읽을 줄 몰랐던 아큐는(그래서 조작된 자신의 범죄조서에 서명을 하지 못하고 수박씨 모양의 동그라미를 그린 후 부끄러워했던) 스스로를 노예로 인정하지 않다가 노예임을 자각한 순간 죽음과 대면했다는 점에서 쿵이지와는 다르다.






제6강 루쉰의 비판으로서의 글쓰기

◆ 비판으로서의 글쓰기 방식

※ 학습목표
루쉰이 글쓰기 규범을 어떻게 비판하는지를 알아본다

▲ 패거리의 익명성
패거리는 그들을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의 고유한 가치나 능력을 발현할 수 있도록 구성되지 않는다. 구성원들을 익명성 안에서 균질화 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군중과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구성원 개인은 패거리 안에 가지고 있지 않은 추상적인 무엇을 자기 자신의 성격이라고 생각하고 이 속으로 은폐되어 들어가 버린다. 반면 집합적 실체는 내부에서 자율적인 관계들에 의해 구성원 각각의 고유한 특성들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생산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규범 비틀기
루쉰은 자신의 글쓰기를 ‘수레를 끌면서 콩국을 파는 사람’이나 쓰는 말이라고 비하하던 고문론자들을 간접적으로 비판한다. 루쉰과 함께 ‘백화문 운동(언문일치 운동)’을 했던 자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고문으로 돌아오려 한다. 이들이 바로 유학을 다녀오고 근대문물을 흡수했던 지식인들이었던 것이었다. 루쉰은 백화문을 통해서 경전의 글쓰기 형식을 비판하고 있다. 루쉰의 소설 「아Q정전」에의 ‘서’에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는 ‘쓰기’의 규범을 비트는 것이다. 그는 ‘전’(傳)이라는 글쓰기 형식이 가지고 있는 완고한 규칙을 조롱하고 비튼다. 그는 일상언어(백화문)를 통해 경전의 중요한 글쓰기 형식(역사서술)에 비판적으로 접근한다.「아Q정전」은 이러한 비판의 내용을 루쉰 특유의 조롱과 풍자의 유머 섞인 문체로 표현한 것이다.

▲ 기록과 기억
루쉰은 ‘기록에 남겨지는 자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사람들의 공유된 의식을 뒤집으려 한다. 승자의 기록이 바로 역사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Q정전」에서 루쉰은 이런 역사를 기록한다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기록은 기억의 한 방식이다. 개인에게도 기록할 만한 것과 기록하지 않아도 되는 기준이 적용되는데, 공식적이고 집단적인 기억에 관한 것이라면 더 엄격한 기준이 적용될 것이다. 아큐와 같이 사소하고 중요하지 않은 인물을 기록하는 것 자체가 사실은 이런 공식적인 기록이나 기억의 방식에 대한 반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록하지 않아야 할 것을 기록함으로써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억과 망각이 어떤 정치적인 의미를 가지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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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풍적인「아Q정전」과 아큐

※ 학습목표
「아Q정전」에 나타난 아큐의 자의식을 이해한다

▲ 강력한 유머, 반풍
“이전에 나는 묘사를 ‘지나치게’ 한 부분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근래에는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중국의 현재 상황에 대해 설령 사실대로 묘사하더라도 다른 나라 사람들, 또는 장래의 선량한 중국 사람들이 보기에는 모두 그로테스크하다고 느낄 것이다. 나는 늘 어떤 일을 공상하면 그것이 너무 엉뚱한 것이 아닌가 스스로 여겼다. 그러나 만일 그와 비슷한 실재 사실과 마주치면 종종 그것이 오히려 더 엉뚱하게 보였다. 그러한 사실이 발생하기 이전에는 내 천박하고 좁은 식견으로써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Q정전」의 유래)
루쉰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아Q정전」은 본래, 신문의 ‘개심화’(開心話)란에 일주일에 한 번 연재하려던 것을, 내용이 진지해서 ‘신문예란’에 연재되었다. “필명은 하리파인(下里巴人)에서 취해 ‘파인’이라 했으니 전혀 고아하지 않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개심화는 일종의 유머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때의 유머는 아무 생각 없이 웃게 만드는 유머가 아니라 반풍(아이러니)을 통해서 원래 하고 싶은 얘기와 정반대로 표현하는 것으로 강렬한 정치적 메시지가 숨어 있었다.

▲ 루쉰의 자기분열
루쉰의 소설 속 인물들은 루쉰이 새롭게 창조해낸 인물이라기보다는 루쉰의 분열된 자아 중 변형된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루쉰은 굉장히 많은 필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은 정치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심리적 부담감을 완화시키면서, 실제로 필명을 통해 완벽한 그 사람이 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루쉰은 매번 다른 이름을 쓸 때마다 매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 문제 상황 속에서 철저히 다른 인물이 되었던 것이다.

▲ 아큐의 자의식, 정신승리법
아큐의 자존심은 실재하는 주체와 가상주체 사이의 분열 속에서 만들어진다. 즉 현실 속에 존재하는 아큐는 변변찮은 신분의 다른 패거리들로부터도 조롱받을 만큼 어리석은 캐릭터이지만, 상상 속에 존재하는 아큐(짜오 가의 사람으로 ‘수재’보다 항렬이 높으며, 옛날에는 잘살았고, 견식도 높고, ‘정말 일꾼’으로 본래 ‘완벽한 인간’이라는)는 자기를 둘러싼 공동체 내부의 어떤 인물보다 뛰어나다. 분열되어 있는 두 개의 인격을 아큐는 자유자재로 활용한다. 아큐에게는 자기유지라든가 일관성을 지닌 하나의 주체로서의 자의식이 없다. 때문에 그에게는 노예의식도 존재하지 않는다. 노예로서의 일관된 자의식이 없기 때문에, 그는 주인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가상의 아큐는 현실에서의 굴욕을 ‘형식상의 패배’로만 인식하며, 정신적으로는 승리한 것이라고 자위한다. 하지만, 자기 스스로 주인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는 가와는 별개로 노예로부터 주인으로 호명됨으로써만 주인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 이외의 외부로부터는 주인으로 호명 받지 못하는 주인(가상의 아큐)은 현실에서 노예의 자세로 살아가는 자에 불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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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큐정전』에 나타난 아큐의 자각

※ 학습목표
아큐가 자신이 노예임을 자각하는 과정을 이해한다

▲ 가상세계에서 현실세계로의 이행
아큐는 가상세계에서는 정신승리법을 구사하지만 현실에서는 노예의 자세로 살아가는 자에 불과하다. 자기 자신 이외의 외부로부터는 주인으로 호명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아큐가 추위와 배고픔이라는 신체적 고통의 체험을 통해 가상의 세계와 결별한다. 하지만 그것이, 아큐가 곧바로 현실의 노예로 굴복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는 구걸을 통해 배고픔을 해소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가 구하려는 것은 그 자신도 몰랐다.

▲ 혁명 속의 아큐
헌데 뜻밖에도 백 리 사방에 그 이름을 떨치는 거인 나으리까지도 그토록 두려워한다니 그로서는 ‘신명’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미장의 어중이떠중이가 당황해 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아큐는 더욱더 유쾌해지는 것이었다. ‘혁명이란 것도 괜찮구나.’하고 아큐는 생각했다.

아큐는 현실에서의 패배와 굴욕을 만회할 수 있는 수단으로 혁명을 선택한다. ‘탐나는 것은 모두가 내 것, 맘에 드는 계집도 모두가 내 것’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물질적이고 사적인 욕망, 지금 내게는 결여되어 있는 무엇인가를 욕망하게 되었을 때, 그는 그 욕망의 노예가 된다.

▲ 혁명을 통해 노예가 된 아큐
혁명 이전에는 정신승리법을 통해 스스로 주인의 위치에 섰기 때문에 결핍과 욕망을 몰랐던 아큐는 혁명을 통해 결핍과 욕망을 배웠다. ‘혁명’의 체험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발견한 아큐는 조바심을 내고 비굴해진다. 아큐는 이전에 자신이 업신여겼던 가짜양놈에게 머리를 조아리지만 끝내 거절당한다.

▲ 아큐의 자각
짜오 씨네 집에 든 도둑의 용의자로 지목되어 관청으로 끌려간 아큐는 비로소 자신의 주인의식과 정신승리법이, 더 나아가 혁명에 대한 욕망이 사실은 ‘노예근성’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처형장으로 끌려가며 조리돌림을 당할 때, 구경꾼들의 시선을 보며 비로소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다.

“20년만 지나면 또 한 사람....” 아큐는 정신이 없는 중에도 이제까지 한 번도 담아본 적이 없는 말이 ‘스승없이 스스로 통달’한 듯이 저절로 입에서 튀어나왔다. 죽음을 바로 눈앞에 두고 섬광처럼 닥쳐온 이러한 자각 속에서 아큐는 비로소 노예상태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민국 원년은 이미 지나갔으므로 뒤쫓을 수도 없지만 이후로 만일 다시 개혁이 일어난다면 여전히 아큐와 같은 혁명당이 출현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나도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내가 단지 현재 이전의 어느 한 시기를 써낸 것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러나 내가 본 것은 결코 현대의 전신(前身)이 아니라 이후의 일, 아니 2, 30년 뒤의 일이 아닐까 한다. (『아큐정전』의 유래)

사람들은 아큐를 특정한 시대가 만들어낸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아큐가 우리에게 시사점을 주는 것은 아큐가 단지 중국의 시대적 인물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루쉰의 말처럼 아큐와 같은 인물은 2, 30년 후에 다시 나타날 수 있다. 아큐는 노예로 안착하거나 노예로 인정받지 못하던 시대마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우리 안에 등장하는 자화상의 모습이 아닐까.






제7강 루쉰 소설에 나타난 죽음의 방식

◆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

※ 학습목표
동서양의 죽음관과 루쉰이 생각하는 죽음을 알아본다.

▲ 동양과 서양에서의 죽음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서양의 경우 죽음의 문제는 현세적인 삶의 태도를 가장 크게 결정짓는다. 영생을 얻기 위해 현세의 삶을 충실하게 살며 죽음이란 이 세계의 끝이고 영생의 새로운 열림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불교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동양에서의 죽음은 삶의 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음에 대한 비극적인 태도를 가지게 된 것은 근대적인 서양의 세계관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죽음의 문제는 삶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으며 더군다나 불교적 세계관에서 보자면 죽음의 문제는 죽음 그 자체이기 보다는 다른 삶으로 넘어가기 위한 문지방과 같은 것이다. 즉 지금 가지고 있는 나의 신체가 다른 신체가 되어서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소통할 것인가, 내가 다른 리듬을 타고 우주로 개입해 흘러들어갈 것인가를 생각하게 해줌으로써 죽음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마련해주고 있는 것이다.

▲ 삶의 한 형식으로서의 죽음
루쉰에게 있어 죽음은 삶에 대한 ‘태도’와 연관되는 문제이다. 즉 그는 어떤 삶은 바로 죽음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소설 속 인물들의 죽음을 통해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되지만, 사실 인간들은 다양한 시공간 그리고 각기 다른 이념의 영향력 속에서 살고 있다는 전제 속에서 루쉰은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삶인가, 어떤 삶이 자기 시대에 맞는 삶인가에 대해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루쉰이 죽음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어떤 암흑, 어떤 비참함, 어떤 죄악과 연관된 것들이다. 보다 나은 존재가 되고자 하는 인류 전체의 혹은 생명의 ‘진보적’ 성격과 잠재력은 어떤 고난(혹은 개별적 인간의 죽음)에도 굴하지 않고 전진하는 것이라고 루쉰은 말한다. 이때, 루쉰이 생각하는 ‘진보’에 대한 믿음은 어떤 목적, 어떤 방향성을 지니는 것이 아니다. ‘없었던 곳을 밟고 지나가서 생긴 것이 길’이라는 말처럼 더 나은 것이 되고자 하는 욕망과 잠재력에서 나오는 운동성 그 자체를 의미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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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무한 삶의 죽음과 희생자의 죽음

※ 학습목표
『흰빛』과 『복을 비는 제사』의 두 인물의 죽음의 의미를 살펴본다.

▲ 설탕탑 같은 인생, 『흰빛』의 천스청
천스청의 삶이 얼마나 헛된 꿈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무너져 내린 설탕탑 같은 앞길이 그의 눈앞에 가로놓여 있었다. 이 앞길은 다시 점점 확대되어 그의 모든 길을 완전히 가로막고 말았다.”는 그 자신의 자각 속에 가장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인생을 마치 도박꾼들이 ‘한탕’에 모든 것을 걸듯, 오직 한 가지 설탕탑 같은 혹은 은덩이 같은 것에만 걸고 있었던 것이다. 오래된 시첩이나 경서를 읽던 책상 밑에서 흰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는 점은 천스청이 걸어온 인생의 길이 얼마나 헛된 것이었나 하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가 만날 수 있는 것은 녹슨 동전이나 깨진 사기그릇 같은 것일 뿐이라는 암시에도 불구하고 계속 책상 밑을 파내려가던 천스청이 만나게 되는 것은 결국 자신의 죽음이다. 시대착오적인 삶, ‘어떤 암흑’ 속에서 헤매는 삶의 결과는 죽음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루쉰은 잔인하고도 집요하게 묘사한다.

▲ 희생자, 『복을 비는 제사』의 샹린댁
『복을 비는 제사』는 한 마을에서 행해지는 제사의식을 둘러싼 사람들의 태도와 그 속에서 희생당하는 여자의 이야기이다. “아무데도 마음을 붙일 데가 없는 샹린댁은 사람들에게 쓰레기더미에 내던진, 보기만 해도 싫증나는 장난감으로 취급되었다.” ‘복을 비는 제사’는 1년 중 마지막으로 치르는 큰 의식이지만 의식에 참여하는 사람은 남자만으로 한정되어 있다. 본래 그 고장 사람이 아닌데다 과부라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샹린댁이 넷째 아저씨 댁의 고용인이 되어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면서 그 집 제사 때 허드렛일을 하는 것으로 자기존재를 증명한다. 그러나 샹린댁의 행복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그녀의 불행의 출발은 재혼에서부터 비롯된다. 원치 않는 결혼 보다는 자유를 원했지만, 그녀에게 진정한 자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루쉰이 『노라는 집을 나간 후 어떻게 되었는가』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집을 나간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타락하거나 집으로 돌아오는 두 길밖에는 없다. 샹린댁 역시 마찬가지이다.

▲ 『복을 비는 제사』에 나타난 지식인의 문제
『복을 비는 제사』에 ‘서’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본 이야기에 들어가기까지의 배경이나 사건의 개연성을 설명해주는 앞 토막에서 글을 쓰는 지식인의 문제를 보여준다. 니체 식으로 말하자면 지식인은 근본적으로 소인근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지식인은 자신의 기만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글을 쓰지만 루쉰은 자기 자신에게 굉장히 솔직하다. 루쉰의 비판은 그 비판의 칼날이 항상 외부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한테도 돌아온다. 사람들은 끝까지 보이지 않는 자신만의 패를 숨기고 살아간다. 루쉰에게 있어 혁명은 내가 가진 모든 패를 다 뒤집어 놓고 네가 가진 모든 패를 다 보인다음 그 패를 바꾸어 판을 뒤집는 것이다. 자신의 패를 숨기고 있는 지식인의 자기기만에 관련된 문제가 『복을 비는 제사』 앞부분에 드러나 있는 것이다.






제8강 루쉰의 소설을 통해 본 삶과 죽음의 문제

◆ 루쉰 소설의 죽음, 저항, 기갈

※ 학습목표
루쉰의 저항의식과 기갈로서의 문학을 이해한다.

▲ 희생자, 『복을 비는 제사』의 샹린댁
관습 혹은 오래된 일상적 믿음이 한 개인의 불행에 개입하는 사태가 이 소설에서는 ‘제례’를 둘러싼 에피소드 속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난다. 재혼을 하고, 남편과 자식을 잃은 여인은 부정한 존재이다. 부정한 존재는 노동의 권리조차도 박탈당한다. 때문에 샹린댁의 불행은 남편과 자식을 잃어버렸다는 개인적 차원에서 그치지 않는다. 개인의 불행이 집단의 금기와 만나 그 개인이 부정한 존재로 배제되었을 때, 불행은 완성된다. 샹린댁은 부정한 존재로 ‘제례’로부터 배제되었고, ‘정상으로 돌아올 가망은 전혀 없어 보였다’는 집단의 진단 속에서 죽어갔다. 하지만 샹린댁의 죽음은 외부적인 폭력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완전히 자각하지 못한 존재, 스스로의 자유를 스스로 책임지지 못하는 존재, 여전히 ‘오래된 풍습의 세계’에 결박당해 있는 존재인 자신에게도 책임은 없지 않다. 한 개인의 불행한 운명은 이 두 가지의 상호작용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 자각이 결핍되었던 샹린댁과 천스청
샹린댁은 도망쳐 나왔지만, 도망이 완벽해지려면 내가 내 삶의 주인이어야 하며 주체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노동력으로 삶을 꾸려나갈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샹린댁의 경우 삶의 돌파구를 찾아 도망을 치긴 했지만 자신과 자신의 삶에 대한 철저한 자각과 주체의식은 여전히 결핍되어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조정하고 관리할 능력이 없다면 막상 자유가 주어지더라도 그 자유를 관리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이후의 삶은 불행으로 치솟게 된다. 천스청 역시 열심히 그리고 착하게 살았지만 중요한 것은 인생은 단지 착하고 열심히 사는 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의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 정치적인 것을 넘어서는 루쉰의 ‘저항’
다케우치 요시미(일본의 유명한 중국문학 전공자)가 루쉰에게서 발견한 ‘저항’은 정치적인 것을 넘어선다. 또한 저항 자체가 루쉰의 삶의 태도이기도 하다. 우리는 저항이라고 하면 억압에 대한 저항이나 정치적인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삶의 직접성에 육박하는 ‘실재’인 것이지, 개념의 영역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루쉰의 ‘저항’은 계급과 역사와 정치의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 삶의 기저를 관류하는 ‘태도’와도 같다. 그런 삶은 남루하고, 지겹고, 어찌할 수 없이 슬픈 것이지만, 아무도 그것을 버리고 갈 수 없는 운명과도 같다. 루쉰의 ‘문학’은 그러한 운명에 부여한 하나의 형식이다.

▲ 『죽음을 슬퍼하며』에는 중층적 해석의 코드
『죽음을 슬퍼하며』에는 실패한 연애에 관한 회상을 외양에 깔고 있지만, 그 속에는 계몽과 대결하는 지식인의 고투 그리고 결국은 실패로 끝나는 ‘이식’의 테마가 도사리고 있으며, 삶의 비루함을 추적하고 드러내는 잔인한 서사의 기술이 숨어 있다. 연애도 계몽도 지식도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그 어떤 것도 ‘기갈’이 아닌 것은 없다. 그러므로 문학은 가혹하게 그 기갈의 현장을 드러내야만 하고, 그런 한에서 문학은 그 누구의 편도 아니며 그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루쉰의 잔인함은 이러한 태도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 참고자료

다케우치 요시미의『루쉰』(문학과 지성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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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을 슬퍼하며』에 드러난 삶

※ 학습목표
『죽음을 슬퍼하며』를 통해 생활인의 삶과 삶의 망각에 대해 이해한다.

▲ 자기기만을 고백한다는 것
루쉰은 ‘쥐엔성’의 입을 빌어 “만일 가능하다면 나는 자신의 회한과 비애를 쓰고 싶다”고 말문을 열었지만, 그는 그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라는 걸 안다. 정서와 욕망은 그것이 일단 문자화 되는 순간 다른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회한과 비애’의 ‘고백’은 동정이나 양심, 혹은 속죄와 위안의 영역이 아니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려고 하는 것, 그것은 ‘기만’을 드러내는 방식일 뿐이다. 그러므로 ‘쓴다’라는 행위는 ‘쓰고 싶다’는 욕망을 기만하는 것, 알면서도 속아주는 자기최면에 가깝다. 쥐엔성은 알고 있다. 죽은 자에게 용서를 구하거나 죽은 자를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그가 살아있는 한 그것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용서를 구하고 위로할 길이 없는 한 그 역시 행복해질 수 없다. ‘망각’을 통과하지 않고, ‘거짓’의 지팡이를 잡지 않은 ‘새로운 생명의 길’은 쥐엔성에게는 없다.

▲ 루쉰에게 ‘생활’이란 무엇인가.
반복되는 일상에 대한 감각과는 다른, 생존 자체를 고민해야 하는 생활. 그것을 위해 『고독한 사람』의 리엔수는 변절하고, 『죽음을 슬퍼하며』의 쥐엔성은 맹목적인 사랑에서 오는 행복을 잃어버린다. “난 반 년 동안 오직 사랑을 위하여 그 밖의 인생의 의의를 모두 소홀히 했음을 깨달았다. 첫째는 생활이다. 사람은 반드시 생활을 해야만 사랑도 비로소 따르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는 반드시 분투하지 않는 사람을 위하여 활로를 열어주는 일은 없다......”

▲ 루쉰의 선택
만약 자신이 사람을 구할 수 있는 방식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해보자. 하나는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면벽수행을 통해 어느 순간 도를 깨우쳐서 전 인류를 구하는 방식이고, 두 번째는 얼어 죽을 지경의 사람에게 자신이 입고 있는 단 하나의 외투를 벗어주는 방식이다. 루쉰은 당당하게 첫 번째 방식을 택한다. 보통 사람들의 경우 외투를 벗어주며 자신의 따뜻한 마음을 확인하고 싶겠지만, 루쉰이 보기에 이것은 대책이 없는 행동이며 이어질 자신의 동사는 자신의 무능을 증명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진짜 현실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루쉰에게 생활의 문제도 이와 다르지 않다. 유치한 것이 아니라 가장 절실하고 솔직해야하는 문제인 것이다.

▲ 망각과 거짓말의 삶
『죽음을 슬퍼하며』에서 사랑하던 사람은 죽었고, 남겨진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야한다. 그러므로 ‘새로운 삶의 길’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생활을 위한’ 길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이상과 지식과 사랑 혹은 미래에 거는 거대한 희망을 ‘망각’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길이다. 때문에 쥐엔성은 말한다. “새로운 삶의 길은 아직 얼마든지 있다. 나는 들어가야만 한다. 왜냐하면 나는 살아있기 때문에. 그러나 나는 아직 어떻게 해서 그 첫걸음을 내디뎌야 할지를 모른다.”새로운 삶의 길을 위해서 쥐엔성이 할 수 일이란 자신의 회한과 비애를 적는 것. 그리고 그것으로 쯔쥔을 장송하고 망각하는 것뿐이다. “나는 새로운 삶의 길을 향해 첫걸음을 내디뎌야만 한다. 나는 마음의 상처 속 깊숙이 진실을 감추고 묵묵히 전진해야 한다. 망각과 거짓말을 길잡이로 삼고서.”





제9강 불명불암(不明不暗)을 산다는 것

◆ 루쉰 작품의 자전적 요소

※ 학습목표
루쉰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을 이해한다.

▲ 자전적 요소
노신의 소설, 특히 지식인이 등장하는 소설은 루쉰의 자전적 요소가 강하다. 작가 자신의 경험을 재현하는 인물(그것은 주인공일 때도 있고, 관찰하는 지식인일 때도 있다)과 그것을 텍스트 바깥에서 기술하는 인물로 대체로 분열되어 있다. 이러한 글쓰기 방식을 통해 루쉰은 자신의 행위를 객관화하고, 반성적으로 의미화한다. ‘쓰는’ 루쉰과 ‘쓰여진’ 루쉰이라는 이분법은 그러나 온전히 분리 가능한 영역이 아니라 경계가 모호한 것이다. 이것은 글쓰기에서 보여 지는 태도이기도 하고 루쉰이 가지고 있는 삶에 대한 태도이기도 하다. 루쉰이 희망과 절망과 허망함의 삼각관계 속에서 하나의 규정을 보여준 것이 아닌 것처럼 무엇인가 하나를 정확하게 꼭 집어서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루쉰은 그 안에 들어가 있는, 혹은 자기 안에 들어 있는 다른 속성들을 같이 이야기하고 동시에 그것들을 감당하는 모습들을 보여준다. 복잡한 내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루쉰인 것이다.

▲ 그림자의 고백

사람이 잠에 빠져 때조차 분간 못할 때, 그림자가 작별하러 와서 하는 말이-
천국에 내가 싫어하는 것이 있다면, 그곳엔 가기 싫다. 내가 싫어하는 것이 지옥에 있다면 그곳으로도 가기 싫다. 내가 싫어하는 것이 그대들 미래의 황금세계에 있다면, 그곳으로도 역시 가기 싫다.
헌데 그대야말로 내가 싫어하는 것이다.
벗이여, 나는 그대를 따라가기 싫다. 멈추는 것이
나는 싫다.
아아, 아아, 나는 싫다. 無에서 서성이는 것이 낫다.

나는 여느 그림자일 뿐이다. 그대와 헤어져 암흑에 잠기리라. 암흑이 나를 삼쿄 버릴지도 모르고, 광명이 나를 지워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는 明暗의 경계를 서성이는 것이 싫다. 암흑에 잠기는 편이 낫다.

그러나 결국은 명암의 경계를 서성이게 되리라. 황혼인지 여명인지도 모르는 채.······
그대는 아직도 선물을 달라고 조르는가. 그대에게 줄 무엇이 나에게 있단 말인가.
굳이 있다면 역시 암흑과 공허뿐이다. 단지 바라건대 암흑이 행여 그대의 白日로 하여 지워지기를.
단지 바라건대, 공허가 결코 그대 마음을 채우는 일이 없기를.
(『그림자의 고백』 중)

육체가 있고 빛이 비치는 한 그림자는 있다. 그림자가 없으려면, 빛이 없거나 육체가 없어야 한다. 그림자는 육체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지만, 루쉰의 그림자는 빛도, 육체도 거절한다. ‘싫어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육체와 결별하고 암흑에 잠긴다는 것은 그림자의 죽음이다. 죽음과 맞바꾸고 싶을 만큼 혹은 ‘無에서 서성이는 것’이 나을 만큼 ‘싫어하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세계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바로 그림자의 육체 바로 그 자신이기도 하다. 루쉰의 그림자는 ‘암흑과 공허’ 혹은 ‘무’로 가득 채워진 자신의 육체를 견디기 힘들다. 그림자는 나이기도 하고, 내가 아니기도 하다.

▲ 정해진 것이 없다는 것

노인: 손님 이리 앉아요. 실례지만 성함은?
행인: 성함이요? -모릅니다. 저는 철든 이후로 혼자뿐이어서, 제 이름이 무언지 모릅니다. 길을 걷노라면, 사람들이 가지가지 이름으로 불렀지만, 너무도 여러 가지여서 저 자신도 기억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같은 이름은 두 번 다시 듣지를 못했으니까요.
노인: 허, 그렇다면 어디서 오시는 길이오?
행인: (잠시 주저한 끝에) 모릅니다. 저는 철든 이후로 줄곧 이렇게 걷고 있습니다. 걸어서 아무 곳이나. 앞쪽의 어느 곳이든 갑니다. 거는 많은 길을 걸었다는 것, 그리고 지금 이곳에 왔다는 것밖에는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제부터 또 저쪽으로 향해 갑니다.
(『행인』 중에서)

정해진 이름도, 정해진 목적지도 갖고 있지 않은 행인은, 매번 새로운 길을 가며 그 때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그에게는 무수한 길, 무수한 이름이 있고, 그 때마다 그는 매번 다른 존재가 된다. ‘정해진 무엇’이 없다는 것, 그것은 고통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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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인으로서 루쉰의 길

※ 학습목표
루쉰이 지식인으로서 어떻게 진보하는 지 알아본다.

▲ 루쉰의 ‘운동’과 ‘진보’
루쉰이 말하는 운동은 진보와 맞닿아 있다. 그런데 루쉰의 경우 진보와 쇠퇴의 경우를 명확하게 나눌 수 있는 서양식의 세계관이 적용되지 않는다. 진보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 즉 운동하는 것인데 그 운동의 방향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방향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아가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루쉰에게는 죽음도 삶의 한 과정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 루쉰의 ‘길’
루쉰이 ‘쉬광핑’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갈림길을 만나면 다른 사람에게 길을 물어보지 않을 것이며, 만약 호랑이를 만난다면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 호랑이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릴 것이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막다른 길에 다다른다면 갈림길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시밭길이라 할지라도 헤쳐 나갈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루쉰은 『고향』에서도 세상에는 길이 없을 수 없으며, 따라서 막다른 길이라는 것도 없을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길은 사람들이 밟아서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루쉰에게 이것과 저것의 경계나 담은 있을 수 없다. 루쉰은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 루쉰이 바라보는 지식인의 문제
애초에 지식인이란, 비겁한 자들이다. 그들이 바라보는 삶은 언제나 지나치게 추상적이기 때문에 실제로 생활의 문제와 대면했을 때, 혹은 자신들이 꿈꾸던 것이 좌절되었을 때 그들은 어찌할 바를 모른다. 하지만 루쉰의 지식인들은 그 좌절을 견디는 방식이 조금은 유별나다. 리엔수는 변절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철저히 조롱하며 암흑 속으로 잠겨들었고, 『술집에서』의 지식인들은 스스로에 대한 혐오를 자각하고 ‘쓸데없는 일’을 하면서 시간을 견딘다.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의 ‘범애농’은 루쉰과 교류했던 실존인물인데 죽기 전 루쉰이 자신을 불러주기를 계속 기다렸다고 한다. 범애농과 같은 특이한 이력을 가진 사람이 소설 속에서 루쉰의 자전과 만나면서 독특한 지식인들의 모습을 만들어내는데, 『고독한 사람』의 리엔수가 그런 경우라고 볼 수 있겠다.






제10강 지식인의 고독과 절망

◆ 지식인, 스스로 고독을 산다는 것

※ 학습목표
『술집에서』와 『고독한 사람』에 나타나는 지식인의 슬픔을 이해한다

▲ 지식인 최후의 자존심, ‘쓸데 없는 일’
루쉰의 지식인인 리엔수는 변절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철저히 조롱하고 암흑 속으로 잠겨들었고, 『술집에서』의 지식인들은 스스로에 대한 혐오를 자각하고 ‘쓸데없는 일’을 하면서 시간을 견딘다. 술집에서 그들의 말은 대화라기보다는 거의 독백에 가깝다. 그들이 말하는 ‘쓸데없는 일’은 세속적인 기준에서 보았을 때만 쓸데없는 일이다. 그들은 단지 누군가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지금 당장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소박하게 한다. 그런데 큰 틀에서 보자면 예전에 품었던 큰 뜻, 즉 세상을 바꾸는 일도 마찬가지로 그들 자신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물질적인 이익을 주는 것도 아니었으며 출세길을 열어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일관되게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전이라면, 대의를 위한 일, 명분을 위한 일이라고 했을 일들을 그들은 이제 깊이 절망하여 자조적으로 ‘쓸데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쓸데없는 일을 하는 것은 그들이 버릴 수 없는 최후의 자존심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

▲ 『고독한 사람』의 리엔수와 나의 관계
리엔수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우리들과는 전혀 딴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 자이기 때문에 고독하다. 고독한 리엔수와 교류하고 있는 ‘나’는 그 무렵 일이 없었으므로 무료하게 지내고 있는 자이다. 리엔수와 나의 교류는 마을 사람들과는 공감할 수 없는 ‘지식인’들만의 공감대를 서로 확인하는 것 속에서 유지된다. 할머니의 장례식에서 내가 본 리엔수의 통곡은 고독을 공유한 자에 대한 장송이자 공감의 표현이었다. “나는 왠지 모르게 할머니의 일생이 눈앞에 떠올랐소. 스스로 고독을 만들어내고 또 그것을 씹어 삼켜온 인간의 일생을 말이오. 그리고 이런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고 느꼈소. 그런 사람들이 나를 통곡하게 하였던 거요...” 리엔수가 고독한 자를 알아본 것은 그 역시 고독한 자였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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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인의 절망과 희망을 잃은 아이들

※ 학습목표
『고독한 사람』의 리엔수의 변절과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본다

▲ 『고독한 사람』, 리엔수의 절망의 끝
스스로 세상과 담을 쌓은 채 ‘누에집’을 짓고 살던 리엔수. 그러한 그에게도 생활의 문제는 심상하게 넘겨버릴 수 없는 근본적인 것이었다. 결국 생활고에 시달리던 리엔수는 자신이 갖고 있던 삶의 방식을 버리고 ‘전향’한다. 리엔수는 자신이 이전에 증오했고 반대했던 것들을 실천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결국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지식인들은 타인을 위한 삶을 살아왔는데 그에게는 그마저 사라진다. 리엔수는 절망의 끝까지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자신이 살고 있던 삶을 완전히 버리고 몸으로 타락의 길을 걷는다. 절망의 바닥까지 내려본 자만이 그 반동으로 바닥을 치고 올라올 수 있지 않을까?

▲ 희망 없는 아이들
“그 분은 이전에는 아이들을 무서워하여 언제고 목소리를 낮추고 부드럽게 하였는데, 근자에는 아주 딴판으로 말도 잘하고 잘 떠들어서 우리 아이들도 그 분과 노는 것을 좋아했고...아이들이 무얼 사달라고 하면 개 짖는 흉내를 내라고 한다든지, 머리를 방바닥에 부딪쳐서 소리가 나도록 절을 시킨다든지 했어요.”
리엔수는 아이들을 더 이상 좋아하거나 존중하지 않는다. 이제 더 이상 그에게 아이들은 희망이 아니다. 이것은 아이들에 대한 문제라기보다는 리엔수 자신의 삶과 희망을 조롱하고 있는 것에 가깝다. 루쉰에게 아이들은 어떤 존재인가. 미래의 희망. 노쇠한 것에 대비되며 새로운 것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 하지만 구습에 물들지 않은 아이들이 자라면 마찬가지로 절망적인 상황을 반복한다는 것을 목격한 후, 단순히 제도의 문제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했을 터이다. 『고독한 사람』에서 리엔수가 아이들에게 개 짖는 흉내를 내게 하거나 머리를 바닥에 부딪치는 절을 시키는 등의 행위는 아이들의 ‘노예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 리엔수의 변절
그의 모습은 어설픈 희망을 믿지 않고 절망을 끝까지 절망하면서 사는 자의 모습에 가깝다. 그러므로 루쉰의 절망은 희망의 반대 이상이다. 온전히 끝까지 절망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용기가 필요한 일이며, 그 과정 속에서 자기부정의 반성적 태도가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루쉰의 절망은 암흑, 혹은 어둠이지만 그것은 삶의 본질을 통찰하는 것으로서의 어둠이고 암흑이다. 암흑이지만 암흑이 아닌 것, 혹은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불명불암의 세계, 희망도 절망도 아닌 공허의 세계를 산다는 것은 정해진 이름도, 정해진 길도 없이 길을 가는 것이다.






제11강 복수, 혹은 노예들의 반란

◆ 25년에서 26년 사이의 루쉰

※ 학습목표
루쉰의 집필 상황을 포괄적으로 살펴본다

▲ 1925년에서 1926년 사이의 루쉰
1925년에서 1926년 사이 루쉰은 그의 활동 기간 중 가장 많은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두 번째 소설집인 『방황』에 수록될 대부분의 소설을 이 시기에 썼고, 『신청년』에 연재했던 잡감들을 묶어 『열풍』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으며, 또 다른 잡문집 『화개집』을 출판했고 『화개집속편』에 들어갈 대부분의 글을 썼다. 『고사신편』에 수록될 『미간척의 복수』와 『달로 달아난 항아』를 썼고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를 썼다.
“1926년 가을 혼자 시아먼(廈門)의 석옥(石屋)에 살면서 대해(大海)를 마주하고, 고서(古書)를 뒤적이니, 사방에는 인기척이 없고 마음은 텅텅 비어 있었다.”(『서언』)
“나는 혁명 이전에는 내가 노예였다고 생각했었는데, 혁명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내가 노예에게 속아 그들의 노예가 되어버렸다고 느껴진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중화민국의 국민이자 중화민국의 원수라고 느껴진다.(『갑자기 떠오르는 생각』)”

▲ 『납함』의 용속함
『하늘을 보수한 이야기』는 루쉰의 첫 번째 소설집 『납함』에 들어가 있는 소설이다. 그때 세간의 평이 나왔는데 한 평론가는 『하늘을 보수한 이야기』를 제외한 소설들은 모두 용속하다고 평했다. 용속하다는 것은 상투적이고 대중적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루쉰은 그 작품을 나름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써나간 것이었고 용속하다는 것이 저급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딱히 훌륭한 작품으로 여겨지는 것도 아니었다고 한다.

▲ 고사신편 읽기의 어려움
『고사신편』에 실려 있는 글들은 모두 어쩌면 우리에게 익숙한 중국의 신화나 전설 등을 모티프로 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쉽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고사신편』은 읽기에 편안하지 않다. 루쉰은 한 문장도 허투로 쓴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호사가들처럼 자신의 지식을 뽐내기 위해 고전을 인용하거나 하는 법도 없기 때문이다. 『고사신편』 속엔 무수히 많은 상징과 비유와 트릭이 숨어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이런 염려가 우리의 독해를 방해한다.

아트앤스터디 강의노트 (www.artnstudy.com)

◆ 루쉰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인간과 자연의 복수

※ 학습목표
『하늘을 보수한 이야기』와 『달로 달아난 항아』를 이해한다

▲ 『하늘을 보수한 이야기』
루쉰의 소설을 읽는 한 가지 손쉬운 방법은 몇 몇 작품들을 ‘복수’의 테마 속에서 읽어내는 것이다. ‘노예들의 노예가 되어버렸다’는 루쉰의 자각을 염두에 둔다면, 그의 복수는 무엇보다도 노예들에 대한 복수에 바쳐질 것이다. 『하늘을 보수한 이야기』의 경우 그것을 우리는 ‘작은 인간’의 역사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자연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어 버린 인간. 인간에 대한 자연의 복수인 것이다.
루쉰은 서언에서 프로이트의 인류의 탄생과 경과와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염두 해 두고 인간들의 역사를 쓰고 싶었다고 밝힌다. 그런데 루쉰은 이런 식의 서술이 흥미를 떨어뜨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익살을 가미하기 시작한다. 루쉰의 익살스러움은 단순하게 묘사에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예술이라는 거창함을 익살스러운 방식으로 비틀어버리는 것. 루쉰은 이런 식으로 대중과 분리되어 고상한 척 하는 비평가와 예술가를 비꼬기도 한다.

▲ 『달로 달아난 항아』
『달로 달아난 항아』는 적어도 세 편의 작품과 연관되어 있다. 『복을 비는 제사』와 『죽음을 슬퍼하며』 그리고 『노라는 집을 나간 후 어떻게 되었나』. 샹린댁은 스스로 구습의 노예가 되어 희생되었고, 쯔쥔은 사랑을 잃고 상심한 채 죽었지만 항아는 당당하게 처지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고, 당당하게 원하는 것을 요구하다가 당당하게 집을 나간다. 현실 속에서 집나간 노라는 타락하거나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지만, 신화와 현실이 뒤섞인 세계 속에서는 더 좋은 세상으로 비상할 수도 있는 법. 샹린댁의 비극, 쯔쥔의 원망을 대신 품고 항아는 가볍게 달로 날아오른다.
또한 지엔성의 경우 쯔쥔이 죽고 난 후 절망에 빠져 자기변명을 하는 반면, 항아의 남편은 활로 달을 쏴서 달을 떨어뜨리려고 하고 다음 날 항아를 찾기 위해 밥을 열심히 먹기도 한다. 항아와 항아의 남편은 운명에 단순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싸울 줄 아는 이들이다. 자연과 완전히 분리되어 타락해버린 인간의 세계에서는 이것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반쯤은 신화적 세계에 발을 걸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항아의 가출은 어쩌면 쯔쥔이나 샹린댁의 복수를 대신해주는 것이 아닐까.






제12강 『미간척의 복수』를 통해 본 복수의 양상

◆ 복잡한 양상의 복수

※ 학습목표
『미간척의 복수』에 나타난 복수의 양상을 이해한다

▲ 복수담으로서의 『미간척의 복수』
『미간척의 복수』는 신화적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완전히 분리되고 난 뒤의 세계, 인간들의 일은 지상의 원리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시대에 만들어진 복수담이다. 루쉰의 복수는 대단히 복잡하고도 치밀하게 전개된다. 원수를 갚아야 할 사람은 미간척이지만 미간척의 힘은 너무 미약하기 때문에 ‘연지오자(宴之傲者)’가 그의 복수를 대신한다. ‘어린 아이’ 혹은 ‘청년’을 무모하게 희생시킬 수 없다는 루쉰의 태도가 여기에 개입하면서 복수의 양상은 복잡해진다. 검은 옷을 입은 연지오자는 “단지 너를 위해서 복수 해줄 뿐”이라고 말한다. 의협이니, 동정이니 하는 말은 오래 전에 더럽혀졌으며 말로만 있을 뿐 행동으로서는 부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그런 이름으로 불리기도 거부한다.

▲ 희생이 불가피한 아이러니한 상황
복수를 위해서는 희생이 불가피하다. 연지오자는 오직 미간척을 위해서 복수혈전에 뛰어들지만, 가장 먼저 스스로 미간척의 머리를 벨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직면한다. 검과 목. 미간척이 가진 모든 것을 그는 요구한다. 그는 미간척에게 푸른검과 목숨을 원했던 것처럼, 원수에게는 금룡과 금솥을 요구한다. “금룡? 내가 바로 그것이지. 금솥? 그것도 내가 가지고 있지” 왕은 이렇게 말하고, 연지오자는 왕의 금솥에 미간척의 목을 넣고 노래를 부르며 ‘어린아이 머리의 요술’을 시작한다. 사람을 먹지 않은 어린아이를 구해야 한다는 결의는 여기서 어린아이를 희생함으로써만 어린아이를 구할 수 있다는 역설에 빠진다.

▲ 승리를 누릴 수 없는 승리
미간척과 연지오자는 솥 안에서 왕의 머리와 사투를 벌이고 결국 둘의 힘이 승리한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승리를 누릴 수 없다. “왕의 머리가 확실히 숨이 끊어진 것을 알고 나자 네 개의 눈은 서로 마주 보며 씽긋 웃더니 곧 눈을 감고 얼굴을 위로 하늘을 향한 채 물 밑으로 가라앉았다.” 승자가 승자의 기쁨을 누릴 수 없는 것이다. 승자는 승리의 기쁨을 누림과 동시에 패배자로부터 모든 것을 이양 받아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루쉰의 복수담은 헐리우드의 복수담처럼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승리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걸어야 그 이상 승리의 결과는 이미 그들의 것이 아니다. 복수는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바뀐다고 말할 수도 없다. 또 다른 원한과 복수가 어디에선가 생겨날 것이다. 그래서 루쉰은 이렇게 말한다. “나도 알고 있어. 불을 끈다 해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그러나 나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어. 내가 먼저 그렇게 하는 것이 쉽단 말야. 나는 불을 끄겠어. 혼자서 끄겠다구!”(『장명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