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몸으로 ‘근대’를 살았던 사상가 루쉰! | ||
'길은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다' 루쉰이 남긴 유명한 말이다. 또한 루쉰의 생애는 저 말 한마디로 정의된다. | ||
“중국 현대 문학의 아버지” 루쉰의 걸작들! | ||
루쉰 문학의 정수! 아큐와 같이 시시한 인물을 전기의 모델로 설정함으로써 ‘기록에 남겨지는 자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사람들의 공유된 의식을 뒤집으려 한다. 광기나 광인은 의학적 기준에 의해 하나의 질병으로 분류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수의 ‘정상적인’ 사람들은 안심한다. 루쉰은 이러한 근대적 계몽방식을 살짝 뒤집어버림으로써, 전통이라는 이름의 몽매한 유습을 파괴하고자 한다. 복수는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바뀐다고 말할 수도 없다. 또 다른 원한과 복수가 어디에선가 생겨날 것이다. 그래서 루쉰은 이렇게 말한다. “나도 알고 있어. 불을 끈다 해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나 나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어. 내가 먼저 그렇게 하는 것 혁명가의 피를 바른 만두를 먹은 아이는 결국 죽어버린다. 하지만 루쉰은 전사다. 태평한 세상에 절망하지 않고, 그것이 허망하다는 것을 알면서 그는 다시 투창을 치켜든다. 시대착오적인 삶, ‘어떤 암흑’ 속에서 헤매는 삶의 결과는 죽음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루쉰은 작품을 통해 잔인하고도 집요하게 묘사한다. | ||
루쉰, 시대와 싸우는 전사(戰士) | ||
그가 말한다. “세상에 만약 정말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이 그래도 있다면 우선 감히 말하고 감히 울고 감히 노하고 감히 욕하고 감히 싸우며 이 저주스러운 곳에서 저주스러운 시대를 물리쳐야 할 것이다!”라고. 루쉰이 ‘감히’ 말한 저주스러운 시대의 모습을 통해, 지금 우리 시대의 모습과 나의 얼굴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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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쉰은 어떻게 전사가 되었나 ※ 학습목표 ▲ 다른 것 사이의 긴장이 담긴 이름 * 참고자료 ▲ 도련님에서 소년가장으로의 전락 1881년 태어난 루쉰은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나 부유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러다가 할아버지가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고 아버지가 병환을 얻으면서 루쉰의 집안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루쉰은 아버지의 약을 구하기 위해 약방으로, 돈을 구하기 위해 전당포로 뛰어다니게 되었는데 약방 계산대와 전당포의 계산대는 어린 루쉰이 느끼는 세상의 벽만큼이나 높은 것이었다. 약방 계산대는 루쉰에게 어느 정도 익숙한 현학적인 전통의 세계였기에 루쉰의 눈높이를 뛰어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전당포의 계산대는 어린 루쉰에게 화폐의 소중함과 더러움을 동시에 알게 해준 곳이므로 심리적으로 훨씬 높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것이 루쉰이 느꼈던 세상의 두 가지 벽이다. 또한 이것은 전통적인 낡은 시대의 유물(약방), 그리고 자본주의적 질서인 서구의 문명(전당포) 사이의 긴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루쉰은 성인이 되어 이 두 가지 것에 맞서 처절하게 싸우게 된다. ▲ 양의학을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간 루쉰 ▲ 루쉰과 니체 - 무거움과 웃음의 공존 * 참고자료
◆ 그는 어떻게 전사로서의 삶을 개혁 했는가 ※ 학습목표 ▲ 정신개혁을 위한 문학 루쉰이 살던 시대의 중국은 서양의 문물이 들어오던 시기였기에, 근대국가를 설립하고자 했던 선각자들은 법률이나 의학, 경제를 공부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루쉰은 문학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이렇게 문학을 통해 중국인의 정신을 치료하고자 한 루쉰은 친구들과 함께 '신생'이라는 잡지를 내게 된다. 그러나 사정은 그들을 따라주지 않아 잡지는 실패하게 되는데 루쉰은 그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한 사람의 주장이 남의 찬성을 얻으면 전진하게 되고, 반대를 얻게 되면 분발하게 된다. 그러나 낯선 사람들 속에서 홀로 외쳤는데 아무 반응이 없다면, 즉 찬성도 반대도 없다면, 마치 끝없는 벌판에 홀로 버려진 듯 자신을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게 되는 것이다. 이 얼마나 큰 비애인가! 나는 내가 느꼈던 것을 적막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말하는 무료함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오는 무기력이 아니다. 할 수 있는 의지, 능력이 있음에도 아무도 반응해주지 않을 때 느끼는 적막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 약방과 전당포의 계산대에서 느꼈던 좌절감은 성인이 된 루쉰에게 세상에 대한 비애감으로 이어지게 되고 결국 그는 자신이 실패했다고 느끼게 된다. 곧이어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 왕조가 몰락하고 공화국이 수립되었지만, 원세개로 대표되는 군벌의 발호로 역사가 반동화 되는 것을 목격함으로써 루쉰의 비애와 적막은 더욱 깊어졌다. 루쉰은 시간을 벌기로 하고 동경으로 와서 동생과 함께 지내며 잡지를 보고 책을 읽고 글을 쓴다. 문화와 진화론에 관한 글을 쓰기도 하고, 많은 양의 번역을 한다. 폴란드나 러시아 같은 동부에 서 구박받고 사는 민족들에 관한 이야기를 번역하기도 한다. 또한 중국에서 굉장히 영향력 있는 중국 근대의 초석자들이자 계몽 사상가들을 만나 사상적 교류를 하기도 한다. ▲ 니체와 루쉰 - 초인사상을 이해한 루쉰 * 참고자료 ▲ 칩거 생활을 벗어나 세상으로 뛰어 든 루쉰 |
제2강 자기 본위의 사상 | ||
◆ 루쉰의 사랑과 희망 ※ 학습목표 ▲ 창작의 뿌리는 사랑이다 들뢰즈가 “욕망이 생산”이라고 말했듯이 글을 쓰는 사람들은 세상에 대해서 아주 깊이 있는 눈으로 바라보고 바꾸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에 글을 쓸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이 곧 사랑이다. 그런데 루쉰의 사랑은 개인의 욕망에 한정되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다. 상대를 바꾸기 위해서 자신이 개입해서 들어가는 적극적인 사랑이다. 따라서 그의 사랑은 타인의 질병을 대신 앓아주는 것이다. 글쓰기를 무기로 하여 세상을 치유하는 이것은 의사의 자의식과도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몸의 병은 치유될 수 있어도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의 질병은 완쾌가 불가능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쉰은 사랑을 가지고 끈질기고 집요하게 싸워나간다. ▲ 보이지 않는 적들과 싸우는 전사 이러한 전사는 없을까 루쉰은 그의 무기인 투창처럼 투박하지만 정직한 문장들을 가지고 위선적인 세상과 싸운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태평하다. 루쉰의 ‘적막과 비애’는 여기에도 숨어 있는 것이다. 루쉰은 이제, 세상을 완전히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끝없이 투창을 던질 것이다. 그가 적을 증오하기 때문이 아니라 더 큰 사랑을 위한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희망과 절망과 허망함의 삼각관계
◆ 루쉰의 잡문과 자기 본위의 사상 ※ 학습목표 ▲ 고도의 글쓰기, 잡문 “나의 잡문에서 쓰고 있는 것은 코 하나, 입 하나, 털 하나이지만, 그것을 합한다면 아마도 하나의 전체적인 형상이 될 것이다.”(『준풍월담』) “그런데 나에게 이러한 단평을 쓰지 말라고 권고하는 사람도 있다. 만일 예술의 궁전에 이처럼 번거로운 금령이 있다면 차라리 들어가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사막에 서서 휘날리는 모래와 나뒹구는 돌멩이를 보며 즐거울 때에는 마음껏 웃고 슬플 때에는 크게 부르짖으며 성이 날 때에는 내키는 대로 욕하는 것이 설사 자갈에 맞아 온몸이 거칠어지고 머리는 깨져 피가 흘러 가끔 자기의 엉킨 피를 매만지면서 꽃무늬와 같다고 생각할지라도 중국 문사들의 뒤꽁무니를 쫓아가 셰익스피어를 모시고 빵과 버터를 먹는 것보다 어찌 못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화개집』) 루쉰이 평생 서구적인 것과 전통적인 것에 대한 투쟁을 동시에 해 나간 것처럼 그의 글쓰기 방식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언제나 자기 안에 있는 내용을 새로운 스타일로 표현하고자 했다. 『신청년』의 두 가지 목표는 ‘과학혁명’과 ‘문학혁명’이었다. 또한 글도 일부의 사대부들이 쓰던 고어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현재 쓰고 있는 구어를 사용하자는 ‘백화문 운동’(중국의 언문일치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루쉰 역시 이런 언어의 민주주의 운동에 같은 뜻을 가지고 있었다. ▲ 자기 본위의 사상과 목적론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 루쉰의 사상은 서양의 사상도, 전통적인 사상도 아니다. 즉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문제 혹은 변증법적 대립의 문제는 그에게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가 계속 희망과 절망과 허망을 버무려서 새로운 종류의 희망을 발견해가듯이 사상도 스스로 발견해가는 자기본위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중간물’의 존재를 인정한다. 이항적 대립의 도식적 항 자체를 균열하는 제3항(중간물)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루쉰에게 변증법이 있다면 그것은 헤겔의 변증법과는 다르다. ‘중간물이 있는’ 운동의 과정은 목적론을 비켜서 있고 ‘사물이나 전변하는 과정’에 매개항(중간물)이 끼어들면서 목적을 와해한다. 루쉰은 서양의 학문을 공부하고 사상을 번역하고 중국의 근대를 제작한 계몽가로 활약 했지만 루쉰의 사상은 서구적인 것도 중화적인 것도 아니다. 루쉰이 필연적으로 중국의 전통을 비판하면서도 서구적 계몽을 근본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이유는 루쉰이 중간적인 것을 인식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루쉰의 자기본위의 사상이다. “ ‘멸종’이란 말은 인간을 놀라게 할 뿐 자연계는 놀라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연은 무자비하다. 스스로 멸종의 길로 나아가는 민족에 대해 자연은 조금도 사정을 보지 않고 멸종하게 내버려둔다.”『수감록』 루쉰은 인간은 늘 인간 중심의 시각으로 자연을 바라본다며 목적론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을 가한다. 오히려 자연이라는 것, 필연성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본위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 객관적으로 운동하는 것이며 운동 자체가 필연적인 것이지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이는 것은 필연성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제3강 루쉰의 소설과 광인 | ||
◆ 루쉰의 소설을 읽는 방식 ※ 학습목표 ▲ 루쉰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 ※ 참고 서양에서는 사회가 감당할 수 없는 자들은 사회의 울타리 밖으로 추방되었다.
◆ 광인은 누구인가 ※ 학습목표 ▲ 광인의 언어 ▲ 광인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유 한 개인의 자존심은 특이한 것으로서 속물들에 대한 도전이다. 정신병학에서의 과대광란증을 제외하고 이런 자존심을 가진 사람들은 대개 좀 천재적인 점이 있다. 노르다우(헝가리 출생의 독일 의사. 문학평론가) 등에 따르면 광기가 좀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들은 필시 자기의 사상과 식견이 속물들보다 뛰어나고 또 속물들이 알아주지 못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때문에 세상물정에 대해 불평하며, 속된 것을 미워한 나머지 점차 염세가나 ‘국민의 적’으로 변해 버린다. (『수감록』38) 『광인일기』의 광인이 앓고 있는 ‘피해망상증’ 역시 자존심 있는 천재들의 ‘과대광란증’과 다르지 않다. ‘과대광란증 환자’들이 세상의 속물들과 싸우듯이, 『광인일기』의 주인공은 ‘식인’들과 싸운다. 그들은 모두 ‘사상과 식견이 속물들 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국민의 적’이 되어 추방되거나, ‘광인’으로 분류되어 격리된다. 또한 정상인들이 광인에게 가하는 살해는 합법성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중국의 이런 상황을 지켜보며 루쉰은 광인이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인지를 보여주려 했다. |
제4강 광인은 어떻게 발명되는가 | ||
◆ 광인을 바라보는 방식 - 시선, 웃음, 빛 ※ 학습목표 ▲ 시선 ▲ 웃음 ▲ 빛 동서양을 막론하고 달과 연관된 존재들은 늑대인간처럼 광기를 가진 존재들이다. 『광인일기』의 광인은 달을 보고 자각하게 된다. “오늘은 전혀 달빛이 없다. 나는 이것이 좋지 못한 징조라는 것을 안다.” 사람들의 시선은 광인을 불안에 떨게 한다. 광인은 달을 보고 자각하고 새로운 종류의 질서를 갖게 되었지만 이성의 세계-태양의 세계인 낮에는 식인들이 광인을 만들어내는 질서 마을 사람들은 장명들을 켜놓고 사당에 자신의 소원들을 빌고 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데 광인은 그것을 부정하려 한다. 루쉰은 몇 천년동안 이어져오던 풍습을 빨리 끊어버리자는 것을 상징적으로 장명등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 식인은 누구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식인이라고 해도 모두 같은 것만도 아니다. 즉 힘없고 가난한, 보통의 민중들인 것이다. 그들은 모두 오랫동안 굴욕과 모욕에 길들여진 탓에 그러한 상황을 ‘정상’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자들이다. 하지만, 루쉰이 보기에 그들은 ‘창 없는 철방’에 누운 채 잠을 자며 죽어가고 있는 자들에 불과하다. 광인은 그 방에서 깨어난 자, 잠자는 자들을 깨우는 자이다.
◆ 광인의 자각과 희망 ※ 학습목표 ▲ 효(孝) 이데올로기 식인들은 ‘충효’를 위해서는 자식을 죽이거나 형제를 죽여도 된다고 생각한다. 즉 유교적인 윤리의 비윤리성과 폭력성이 식인의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작년에 렌꺼촌에서도 한 놈 때려죽였지요. 이런 놈을 말예요. 여럿이 굳게 약속을 하고, 그러니까 같은 시각에 모두가 일제히 손을 대서 누가 제일 먼저 손을 댔는지 모르게 한 거지요. 그 후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장명등』) 「아버지노릇」이라는 글에서는 아비가 아버지노릇을 잘하기 위해서는 아버지 스스로가 바로 서야 한다고 루쉰은 말하고 있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의존해서는 안 되며 자기를 실현하기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한다. 부모자식간의 관계에서도 부모는 자식을 해방시킬 수 있는 거리의 미학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런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관계가 되지 않으면 세상이 바뀔 수 없다는 것이 루쉰의 생각이다. 근본적인 것부터 바뀌려면 가장 밀접한 관계부터 다른 관계가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 쉽지 않은 희망 |
제5강 정신승리법 혹은 노예정신 | ||
◆ 『아Q정전』 『쿵이지』 『조리돌리기』에 나타난 패거리들의 습성 ※ 학습목표 ▲ 노예는 누구인가 ▲ 노예와 주인의 변증법 “지배받는 자는 남을 먹여 살리고 지배자는 남이 먹여 살린다고 하지 않았던가? 유감스러운 것은 이론은 이렇게 훌륭한데 지금까지 완전무결한 훌륭한 방법을 발명하지 못한 것이다. 권세 앞에 복종하려면 살지 말아야 하고, 금의옥식을 바치려면 죽지 말아야 하며, 지배를 받으려면 살지 말아야 하고, 지배자를 먹여 살리려면 죽지 말아야 한다.”(『춘말한담』) 한 번 노예가 되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노예는 자신의 외부에 있는 사람을 주인님으로 호명해주고 외부에 있는 존재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는 자이다. 노예는 ‘주인’의 존재를 승인함으로써 자기 존재를 증명한다. 지배자를 먹여 살리고 그의 권세 앞에 복종하며 그렇게 사는 삶을 의심하지 않는 것, 그것의 노예의 정체성이다. ▲ 노예들의 집단, 패거리 패거리들은 불안감에 끊임없이 시달리는 존재들이며 패거리 속에서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 그들은 패거리를 이룸으로써 힘을 얻을 수 있기에 패거리 밖에 있는 공통의 적을 만들고 적개심을 확인하고 외부의 것들에게 살인행위를 가한다. 이런 과정 속에서 패거리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식인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들은 약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단지 이들은 사천년 이래로 지배받아왔던 삶에 대해서 뭔가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 패거리에 대한 노신의 경험 - 환등기 사건 ※ 참고자료
◆ 『아큐정전』과 『쿵이지』에 드러난 노예의식 ※ 학습목표 ▲ 루쉰이 바라보는 노예의 역사 ▲ 패거리들의 구경거리 ▲ 루쉰의 복수의 테마 ▲ 노예의 인정욕망 ▲ 아큐와 쿵이지의 말로 |
제6강 루쉰의 비판으로서의 글쓰기 | ||||
◆ 비판으로서의 글쓰기 방식 ※ 학습목표 ▲ 패거리의 익명성 ▲ 규범 비틀기 ▲ 기록과 기억
◆ 반풍적인「아Q정전」과 아큐 ※ 학습목표 ▲ 강력한 유머, 반풍 ▲ 루쉰의 자기분열 ▲ 아큐의 자의식, 정신승리법
◆『아큐정전』에 나타난 아큐의 자각 ※ 학습목표 ▲ 가상세계에서 현실세계로의 이행 ▲ 혁명 속의 아큐 아큐는 현실에서의 패배와 굴욕을 만회할 수 있는 수단으로 혁명을 선택한다. ‘탐나는 것은 모두가 내 것, 맘에 드는 계집도 모두가 내 것’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물질적이고 사적인 욕망, 지금 내게는 결여되어 있는 무엇인가를 욕망하게 되었을 때, 그는 그 욕망의 노예가 된다. ▲ 혁명을 통해 노예가 된 아큐 ▲ 아큐의 자각 “20년만 지나면 또 한 사람....” 아큐는 정신이 없는 중에도 이제까지 한 번도 담아본 적이 없는 말이 ‘스승없이 스스로 통달’한 듯이 저절로 입에서 튀어나왔다. 죽음을 바로 눈앞에 두고 섬광처럼 닥쳐온 이러한 자각 속에서 아큐는 비로소 노예상태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민국 원년은 이미 지나갔으므로 뒤쫓을 수도 없지만 이후로 만일 다시 개혁이 일어난다면 여전히 아큐와 같은 혁명당이 출현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나도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내가 단지 현재 이전의 어느 한 시기를 써낸 것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러나 내가 본 것은 결코 현대의 전신(前身)이 아니라 이후의 일, 아니 2, 30년 뒤의 일이 아닐까 한다. (『아큐정전』의 유래) 사람들은 아큐를 특정한 시대가 만들어낸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아큐가 우리에게 시사점을 주는 것은 아큐가 단지 중국의 시대적 인물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루쉰의 말처럼 아큐와 같은 인물은 2, 30년 후에 다시 나타날 수 있다. 아큐는 노예로 안착하거나 노예로 인정받지 못하던 시대마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우리 안에 등장하는 자화상의 모습이 아닐까. |
제7강 루쉰 소설에 나타난 죽음의 방식 | ||
◆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 ※ 학습목표 ▲ 동양과 서양에서의 죽음 ▲ 삶의 한 형식으로서의 죽음
◆ 허무한 삶의 죽음과 희생자의 죽음 ※ 학습목표 ▲ 설탕탑 같은 인생, 『흰빛』의 천스청 ▲ 희생자, 『복을 비는 제사』의 샹린댁 ▲ 『복을 비는 제사』에 나타난 지식인의 문제 |
제8강 루쉰의 소설을 통해 본 삶과 죽음의 문제 | ||
◆ 루쉰 소설의 죽음, 저항, 기갈 ※ 학습목표 ▲ 희생자, 『복을 비는 제사』의 샹린댁 ▲ 자각이 결핍되었던 샹린댁과 천스청 ▲ 정치적인 것을 넘어서는 루쉰의 ‘저항’ ▲ 『죽음을 슬퍼하며』에는 중층적 해석의 코드 ※ 참고자료
◆ 『죽음을 슬퍼하며』에 드러난 삶 ※ 학습목표 ▲ 자기기만을 고백한다는 것 ▲ 루쉰에게 ‘생활’이란 무엇인가. ▲ 루쉰의 선택 |
제9강 불명불암(不明不暗)을 산다는 것 | ||
◆ 루쉰 작품의 자전적 요소 ※ 학습목표 ▲ 자전적 요소 ▲ 그림자의 고백 사람이 잠에 빠져 때조차 분간 못할 때, 그림자가 작별하러 와서 하는 말이- 나는 여느 그림자일 뿐이다. 그대와 헤어져 암흑에 잠기리라. 암흑이 나를 삼쿄 버릴지도 모르고, 광명이 나를 지워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는 明暗의 경계를 서성이는 것이 싫다. 암흑에 잠기는 편이 낫다. 그러나 결국은 명암의 경계를 서성이게 되리라. 황혼인지 여명인지도 모르는 채.······ 육체가 있고 빛이 비치는 한 그림자는 있다. 그림자가 없으려면, 빛이 없거나 육체가 없어야 한다. 그림자는 육체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지만, 루쉰의 그림자는 빛도, 육체도 거절한다. ‘싫어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육체와 결별하고 암흑에 잠긴다는 것은 그림자의 죽음이다. 죽음과 맞바꾸고 싶을 만큼 혹은 ‘無에서 서성이는 것’이 나을 만큼 ‘싫어하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세계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바로 그림자의 육체 바로 그 자신이기도 하다. 루쉰의 그림자는 ‘암흑과 공허’ 혹은 ‘무’로 가득 채워진 자신의 육체를 견디기 힘들다. 그림자는 나이기도 하고, 내가 아니기도 하다. ▲ 정해진 것이 없다는 것 노인: 손님 이리 앉아요. 실례지만 성함은? 정해진 이름도, 정해진 목적지도 갖고 있지 않은 행인은, 매번 새로운 길을 가며 그 때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그에게는 무수한 길, 무수한 이름이 있고, 그 때마다 그는 매번 다른 존재가 된다. ‘정해진 무엇’이 없다는 것, 그것은 고통스럽다.
◆ 지식인으로서 루쉰의 길 ※ 학습목표 ▲ 루쉰의 ‘운동’과 ‘진보’ ▲ 루쉰의 ‘길’ ▲ 루쉰이 바라보는 지식인의 문제 |
제10강 지식인의 고독과 절망 | ||
◆ 지식인, 스스로 고독을 산다는 것 ※ 학습목표 ▲ 지식인 최후의 자존심, ‘쓸데 없는 일’ ▲ 『고독한 사람』의 리엔수와 나의 관계
◆ 지식인의 절망과 희망을 잃은 아이들 ※ 학습목표 ▲ 『고독한 사람』, 리엔수의 절망의 끝 ▲ 희망 없는 아이들 ▲ 리엔수의 변절 |
제11강 복수, 혹은 노예들의 반란 | ||
◆ 25년에서 26년 사이의 루쉰 ※ 학습목표 ▲ 1925년에서 1926년 사이의 루쉰 ▲ 『납함』의 용속함 ▲ 고사신편 읽기의 어려움
◆ 루쉰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인간과 자연의 복수 ※ 학습목표 ▲ 『하늘을 보수한 이야기』 ▲ 『달로 달아난 항아』 |
제12강 『미간척의 복수』를 통해 본 복수의 양상 |
◆ 복잡한 양상의 복수 ※ 학습목표 ▲ 복수담으로서의 『미간척의 복수』 ▲ 희생이 불가피한 아이러니한 상황 ▲ 승리를 누릴 수 없는 승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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