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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혹은 박인환, 어떤 오독

나는 인환을 가장 경멸한 사람의 한 사람이었다. 그처럼 재주가 없고 그처럼 시인으로서의 소양이 없고 그처럼 경박하고 그처럼 값싼 유행의 숭배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죽었을 때도 나는 장례식에를 일부러 가지 않았다. 그의 비석을 제막할 때는 망우리 산소에 나간 기억이 있다. 그 후 그의 추도식을 이봉구, 김경린, 이규석, 이진섭 등이 주동이 돼서 동방문화살롱에선가에서 했을 때에도, 그즈음 나는 명동에를 거의 매일같이 나가던 때인데도 그날은 일부러 나가지 않은 것 같다. 인환이가 죽은 뒤에 그를 무슨 천재의 요절처럼 생각하고 떠들어대던 사람 중에는 반드시 인환이와 비슷한 경박한 친구들만 끼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유정 같은, 시의 소양이 있는 사람도 인환을 위한 추도시를 쓴 일이 있었다. 세상의 이런 인환관과 나의 생각과의 너무나도 동떨어진 격차를 조정해 보려고 나는, 시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고 새삼스럽게 생각해 보고는 한 일까지 있었다.

이런 인환과 인환의 세평에 대한 뿌리 깊은 평소의 불만 때문에 나는 한사코 인환에 대한 얘기를 쓰지 않기로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요한 기대>라는, 창우사에서 나온 수필집 안에 들은 ‘마리서사’라는 글에서 나는 인환에 대한 불신감을 약간 시사한 일이 있었다. 나는 그 후 인환에 대해서 쓴 나의 유일한 글에 그런 욕을 쓴 것이 여간 마음에 걸리지 않았다. 거짓말이라도 칭찬을 쓸 걸 그랬다 하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그래서 이 글을 쓰기 전에 나는 인환의 <선시집>의 후기를 다시 한번 읽어보고, ‘밤의 미매장’이란 시를 읽어보고, 그래도 미흡해서 ‘센티멘털 저니’라는 시를 또 한번 읽어보았다.

인환! 너는 왜 이런, 신문기사만큼도 못한 것을 시라고 쓰고 갔다지? 이 유치한, 말발도 서지 않는 후기. 어떤 사람들은 너의 ‘목마와 숙녀’를 너의 가장 근사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내 눈에는 ‘목마’도 ‘숙녀’도 낡은 말이다. 네가 이것을 쓰기 20년 전에 벌써 무수히 써먹은 낡은 말들이다. ‘원정(園丁’이 다 뭐냐? ‘배코니아’가 다 뭣이며 ‘아포롱’이 다 뭐냐?

이런 말들을 너의 유산처럼 지금도 수많은 문학청년들이 쓰고 있고, 20년 전에 너하고 김경린이하고 같이 낸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라나 하는 사화집 속에서 나도 쓴 일이 있었다. 종로에서 마리서사를 하고 있을 때 너는 나한테 이런 말을 한 일이 있었다. “초현실주의 시를 한번 쓰던 사람이 거기에서 개종해 나오게 되면 그전에 그가 쓴 초현실주의 시는 모두 무효가 된다”는 의미의 말이었다. 그 말을 듣고, 프로이트를 읽어보지도 않고 모더니스트들을 추종하기에 바빴던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을 너의 그 말을 해석하려고 고민을 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 후, 네가 죽기 얼마 전까지도 나는 너의 이런 종류의 수많은 식언의 피해에서 벗어나려고 너를 증오했다. 내가 6.25 후에 포로수용소에 다녀나와서 너를 만나고, 네가 쓴 무슨 글인가에서 말이 되지 않는 무슨 낱말인가를 지적했을 때, 너는 선뜻 나에게 이런 말로 반격을 가했다 - “이건 네가 포로수용소 안에 있을 동안에 새로 생긴 말이야” 그리고 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고, 물론 내가 일러준 대로 고치지를 않고 그대로 신문사인가 어디엔가로 갖고 갔다. 그처럼 너는, 지금 내가 이런 글을 너에 대해서 쓴다고 해서 네가 무덤 속으로 안고 간 너의 <선시집>을 교정해 내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교정해 가지고 나올 수 있다 해도 교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도 해본 일이 없다고 도리어 나를 핀잔을 줄 것이다. “야아 수영아, 훌륭한 시 많이 써서 부지런히 성공해라!” 하고 빙긋 웃으면서, 그 기다란 상아 파이프를 커크 더글러스처럼 피워 물 것이다.

- <김수영 전집 2>(산문) 중 ‘박인환’ 전문, 1966.8




마감일을 놓친 잡글을 쓰려 휴가계를 낸 참에 나는 김수영을 생각한다. 김수영과는 눈곱만큼도 상관없는 일이건만 나는 김수영을, 그의 ‘박인환朴寅煥’을 다시 생각한다. 평시에는 무시로 태평하게 지낼 뿐이면서, 데드라인에 코끝을 밀어 넣게 되면 머릿속엔 온갖 글들이 가득 찬다. 아무리 요령을 부리고 거짓을 씨부려도 따라갈 수 없는 글이다. 그러니 그것은 그냥, 핑계일 뿐이다. 글을 쓰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변명에 이만한 것도 없다.

이 글을 옮겨 쓰며 나 역시 <선시집>의 후기를 다시 읽어보고, ‘밤의 미매장’이란 시를 읽어보고, 그래도 미흡해서 ‘센티멘털 저니’라는 시를 또 한번 읽어보았다. 처음 발표 되었을 때 “수영洙暎에게”라는 헌제가 있었던 시란다. (실천문학사 판본 전집에는 그 내용이 없고, 절판된 예옥 판본 전집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에서 주석으로 밝히고 있다) 그런 박인환을 김수영은 가장 경멸한 사람의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신문기사만큼도 못한’ 인환의 시에 대해, ‘마리서사’에는 조금 더 친절한 설명이 있다. “(마리서사에 드나들게 되며) ... 등의 이상한 시에 접하게 되었고, 그보다도 더 이상한, 그가 보여주는 그의 자작시를 의무적으로 읽지 않으면 아니 되게 되었다. 그는 일본말이 무척 서툴렀고 조선말도 제대로 아는 편이 못 되었지만, 그 대신 그의 시에는 내가 모르는 멋진 식물, 동물, 기계, 정치, 경제, 수학, 철학, 천문학, 종교의 요란스러운 현대용어들이 마구 나열되어 있었다.” 조선말이 서툰 인환의 시를 수영은 일종의 스노브로 파악한 모양이다. 수영은 이렇게 덧붙인다.

“인환의 최면술의 스승은 따로 있었다. 박일영이라는 화명을 가진 초현실주의 화가였다. 그때 우리들은 그를 ‘복쌍’이라는 일제 시대의 호칭을 그대로 부르고 있었다. 복쌍은 사인보드나 포스터를 그려주는 것이 본업이었는데 어떻게 해서 인환이하고 알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쓰메에리를 입은 인환을 브로드웨이의 신사로 만들어준 것도, 콕토와 자코브와 도고 세이지의 ‘가스파돌의 입술’과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과 트리스탄차라를 교수하면서 그를 전위시인으로 꾸며낸 것도, 마리서사의 ‘마리’를 시집 <군함 마리>에서 따준 것도 이 복상이었다. 파운드도 엘리엇을 이렇게 친절하게 가르쳐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복쌍을 알고 나서부터는 인환에 대한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흥미가 전부 깨어지고 말았다. 복쌍은 그를 나쁘게 말하자면 곡마단의 원숭이를 부리듯이 재주도 가르쳐주면서 완상도 하고 또 월사금도 받고 있었다(월사금이라야 점심이나 저녁을 얻어먹을 정도이었지만). 그는 셰익스피어가 이아고나 맥베스를 다루듯이 여유 있는 솜씨로 인환을 다루고 있었지만, 셰익스피어가 그의 비극적 인물의 파탄에 책임을 질 수 없었던 것처럼 그를 끝끝내 통제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그럴 때면 나한테만은 농담처럼 불평을 하기도 했다. “인환이놈은 너무 기계적이야” 하고.”

민음사의 전집에 따르면 수영이 ‘마리서사’를 쓴 것 또한 1966년이었으니, 인환이 죽은지 꼭 십년 만에 인환에 대한 두 편의 글을 쓴 것이다. 인환과 수영은 함께 ‘후반기’ 동인 활동을 했고, 가까이 왕래해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수영에게, 문우의 사후 10주년을 맞아 이런 글을 쓰게 한 것일까? 특히 나중에 쓴 ‘박인환’에서는 “인환에 대해서 쓴 나의 유일한 글에 그런 욕을 쓴 것이 여간 마음에 걸리지 않았다”라고 고백하면서까지, 그럼에도 다시 한번 그의 문학을 조롱한 이유가 무엇일까? 쉽게 짐작할 수 없는 일이다.

소설가 이인성의 홈페이지에서 이응준은 이렇게 말한다. “<김수영 전집 2>(산문)를 백 번 이상 읽은 나는 이제 이렇게 본다. 어느 시점에서부터 김수영은 박인환을 문학의 공적(公敵)으로 결론 내렸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박인환은 가짜 시인이었고, 태작기계였으며, 제 멋에 취해 예술을 오도하는 문화양아치였다. 고로, 김수영은 자신의 산문들 중에서 가장 공적(公的)인 태도를 견지하고서 문학의 섬세한 질서를 위해 ‘박인환’과 ‘마리서사’를 썼던 것이다. 김수영의 박인환에 대한 감정은 연민이라든가 애증 따위가 아니라 완벽한 역겨움이자 순수한 증오였으며 그것은 사사로운 분노가 아니라 공분(公忿)이었다는 것이 나의 견해다. 김수영은 ‘박인환’과 ‘마리서사’를 쓴지 이 년 뒤에 죽었다. 그는 추호도 후회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수영의 글에서 애틋함을 본다. 백 번의 십분지일도 읽지 못했지만 그렇다. 절절한 그리움 따위가 아니라 일정 이상 거리를 둔 그리움이다. 애써 떼려한 적도 없고, 끌어안은 적도 없지만 그 자리에 있어 녹지 않는 만년설 같은 그리움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단지 문학적 포즈일 뿐일까. 요즘 친구들이 흔히 말하는 ‘고도의 빠’인 걸까.

그것은 어쩌면 사사로운 정에 현혹되지 않는 수영 자신의 ‘시의 소양’ 때문일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스스로 밝히듯 자신의 눈에는 ‘이상한 시’였던 인환의 시가 많은 사랑을 받고 그의 죽음이 ‘천재의 요절’로 오독되던 시절이 벌써 10년이 흐른 것이다. 어떤 유행이 인환의 시를 그렇게 높이 치켜세웠지만, 그것이 더 이상은 지속될 수 없음은 수영은 알아차린 것이다. 그리하여 사랑하는 이의 시신을 수습하고 그의 눈을 감기듯, 스스로 그것을 선언해버린 것이다. 세간이 친우의 이름을 더럽히기 전에, 그의 이름이 어떤 추문이나 스캔들로 전락하기 전에. 그것은 이응준의 지적대로 지극히 공적인 '사망선고'였지만, '인간 박인환'을 위한 불가피한 결심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몇 번을 읽고 또 읽어도, 내가 행간에서 짐작하는 망자의 마음은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그 후, 네가 죽기 얼마 전까지도 나는 너의 이런 종류의 수많은 식언의 피해에서 벗어나려고 너를 증오했다”고 수영은 고백한다. 이 문장은 ‘전까지도 ~ 했다’는, 명백한 과거형이다. 비록 이응준은 “아무튼. 적지 않은 미덕에도 불구하고 드라마 <명동백작>은 우리의 문화사 전체를 낭만적 기조로 개관하려는 과욕 탓인지 캐릭터들의 내면파악에 간혹 가다 분명한 한계를 드러냈는데, 내 눈에 그것은 김수영과 박인환의 관계설정에 있어서 제일 유치하게 도드라져 보였다. <명동백작>은 마치 김수영이 박인환을 애증 내지는 연민한 것처럼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다정이 병이라는 것은 이런 경우를 두고 이름이다. 과연 이봉구스러운 시각이 아닐 수 없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식언의 피해에서 벗어나려고 너를 증오했다”는 것은 이미 애증의 언술이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식언에 피해 입지 않으며, 단지 식언 때문에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을 증오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응준의 마지막 말에는 나 역시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수영이 인환에게 “그처럼 너는, 지금 내가 이런 글을 너에 대해서 쓴다고 해서 네가 무덤속으로 안고 간 너의 <선시집>을 교정해 내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교정해 가지고 나올 수 있다 해도 교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도 해본 일이 없다고 도리어 나를 핀잔을 줄 것이다. “야야 수영아, 훌륭한 시 많이 써서 부지런히 성공해라!” 하고 빙긋 웃으면서, 그 기다란 상아 파이프를 커크 더글러스처럼 피워 물 것이다“라고 했던 것처럼. 언젠가 수영은 이렇게 썼다.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 <김수영 전집 1>(시) 중 ‘절망’ 전문, 1965.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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