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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할 수 없는 뻥 뚫린 구멍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이하 ‘설산’)에는, 절대로 이해해야 하지만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이 제시된다. “부모님, 그리고 학우 여러분! 용기가 없는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야만의 시대에 더 이상 회색인이나 방관자로 살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후회는 없어.” 한강에 투신해버린 여대생의 유서에서 앞의 세 문장에 유의하며 1986년의 시대적 상황으로 그녀의 죽음을 해명하는 것도 물론 가능하다. 그러나 부모와 학우들에게 “살아갈 수는 없었습니다”라고 말한 뒤 갑작스럽게 출현한 “후회는 없어”는 대체 무엇을 가리키고 또 누구에게 하는 말이며, 존칭에서 비칭으로 도약하는 저 틈새에는 무엇이 숨겨져 있는 것인가. 왜 그녀는 남자친구인 나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을까. 내가 그녀의 죽음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또 그녀 삶의 마지막 장면에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못했다면, 그녀와 나 사이에 지속됐다고 생각했던 감정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녀의 유서는 살아남은 남자에게 구멍 뚫린, 해독 불가능한 문장들로 보였을 것이다. ‘설산’의 전반부를 이렇게 요약하는 것이 가능하다. “모든 것을 총동원해도 저 구멍 뚫린 문장에는 결코 복구할 수 없는 지점들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영역들이 있다.”

 

순진한 믿음과 성급한 체념의 사이

» ‘다시 한 달을 가서…’가 실린〈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설산’의 후반부는 이 불가능성에 딸려 나오는 어떤 윤리적 행위의 장면화에 바쳐진다. 남자는 시커멓게 뚫린 구멍을 메우려 닥치는 대로 책을 읽어나가다가 도서관에서 <왕오천축국전>의 주석서를 발견한다. 투신하기 며칠 전 그녀가 대출해서 여기저기 밑줄을 쳐가며 읽은 책. 남자는 맹렬한 책읽기를 멈추고 여자친구와 자신에 관한 기억을 토대로 소설을 썼지만 역시 여자친구를 이해하는 데는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그는 급기야 여자가 읽은 혜초의 기록을 좇아 자살하는 심정으로 낭가파르바트에 올랐고, 그곳에서 죽었다. 여자를 이해하기 위한 그의 행위가 필사적일수록, 이해 불가능성은 더 확실해지고 또 절망적으로 돼간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들이, 우리가 직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투명하고 객관적인 현실 자체라고 순진하게 믿어서는 안 된다. 거기에는 늘 이해 불가능한 어떤 지점들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불가능성 앞에서 성급하게 좌절하고 포기해서도 안 된다. 순진한 믿음과 성급한 체념, 정확히 그 둘 사이에 ‘삶’은 있다. 불가능한 이해에 대한 요구를 멈추지 않으며 저 구멍 뚫린 대상에 필사적으로 주석 달기에 전념해야 한다. 그런 방식으로만 우리는 우리 ‘삶’의 한계를 받아들일 수 있고, 오로지 그때만이 우리의 불완전한 ‘삶’을 온전히 살아갈 수 있다. ‘설산’을 지탱하는 것은, 인식론과 존재론, 윤리학의 근방을 차례로 더듬는 뼈아픈 성찰이며, ‘설산’을 읽는 우리가 체험하는 강렬한 울림의 근거도 여기에 있다.

 


은밀한 주석 달기의 유혹

거기서 ‘설산’은 한 걸음 더 나간다. 남자는 여자친구의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 이해와 몰이해가 만나는 지점까지 자신을 몰아붙이며 무수한 문장들을 썼다. 그리고 우리가 따라 읽은 남자의 죽음에 대해서라면, <왕오천축국전>의 주석가이자 남자의 소설을 받아보고 뒤에 남자와 사랑에 빠진 H가 다시 필사적으로 주석을 달고 있다. 우리가 읽고 있는 ‘설산’이 통째로 H의 주석으로 돼 있다. 그리고 다시, 결혼한 몸으로 24살의 청년을 사랑한 여교수의 내면 앞에서, 자신을 남겨두고 다른 여자를 떠올리며 낭가파르바트에서 죽음을 맞이한 남자를 이해하기 위해 그 남자의 죽음에 주석을 달고 있는 H의 구멍 뚫린 내면 앞에서, 독자들은 다시 은밀한 주석 달기의 유혹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 ‘설산’의 주석 달기는 1990년대적 내면성 우위의 소설들이 종종 빠져들곤 했던 나르시시즘의 함정에서 우아하게 빠져나가며 타자와의 불가능한 만남을 향한 강렬한 제스처를 완성한다. 주석 달기란 언제나 타자의 삶을 향해 방향지어지는 것. 수많은 주석이 서로를 향해 복잡하게 엉켜들며 김연수 소설의 거대한 성좌를 만들어낸다. 간절하게 빛나는 저 성좌 앞에서 가슴 시리지 않을 이치가 없다.

권희철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