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보다는 쉬웠지만 한참을 읽지 못했다. 자취방을 정리하고 책을 폈다. 다시 읽고 또 읽을 만한 소설이다. 특히 이 책을 고른 계기였던 3부 7장은 복사해 매일 들고 다니는 노트에 붙여놓을 참이다. 그리고 이 문장...
시간은 그에 역행할 때만 알 수 있다. 그로 인해 아프고 경계선에 서게 될 때만.
아래는 예스24에서 복사해 온 것이다.
“아이들은 교사와 학교의 언어를 받아들였다. 자신만의 언어를 갖지 못했다. 처음에는 그것이 마치 해방 같았다. 열쇠나 길 같았다.
한참 후에야 아이들은 그들이 들어섰던 길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바로 터널이었다는 것을. 거기서는 결코 탈출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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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간의 개인적인 교류와 만남조차 감시당하는 상황이었지만, 어느덧 페터는 같은 처지인 카타리나, 아우구스트 등과 교감을 나눈다. 이들은 명문 사립학교가 자신들을 수용한 목적을 알아내고자 애쓰다가, 과거의 상처와 직면해 ‘시간의 본질’에 대해서도 탐구할 필요가 있음을 직감한다. 현실에서의 유일한 탈출구는 시간과 공간을 재창조하는 것임을 깨달은 페터와 아이들은 함께 탈출을 시도하지만, 결국 그 어느 때보다도 참혹한 대가를 치르고야 만다. 그 시절의 참혹한 상처를 딛고 성인이 된 페터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처의 본질을 찾아, 고통스러웠던 유년으로의 여행을 시작한다.
이 작품은 1964년부터 1974년까지, 덴마크의 54개 학교에서 시행되었던 교육 실험을 소재로 삼았다. 학교라는 체제에 적응하기 힘들어 하는 아이들을 우수한 아이들과 통합 교육해 향상을 도모했던 이 실험은 결국 아이들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이러한 교육 실험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뚜렷한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으며, 통합 교육과 분리 교육에 대한 고민 역시 늘 현재진행 중인 난제이다. 그러나 우리가 부적격자와 적격자라는 기준으로 아이들을 나누는 한, ‘향상’이라는 가치 아래 아이들을 줄 세워 편을 가르는 한, 뒤처지고 버림 받는 아이들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이 책의 덴마크 어 원제인 『De maske egnede』 는 “그들은 어쩌면 적합할 수도 있었다.” 정도로 직역될 수 있다. 평가라는 명목으로 아이들의 적합성을 가르는 잔인함에 대한 항변인 셈이다.
작가 페터 회는 소설 속 페터와 나이가 같고, 비슷한 시대에 코펜하겐 부근의 사립학교를 다녔으며, 소설 속 페터처럼 현재 아내와 딸과 함께 살고 있다. 심지어 소설 끝부분에 이르러서는 주인공 페터가 열다섯 살이 되던 1973년에 카렌 회와 에릭 회 부부에게 입양되어 새 삶을 찾았다고 언급한다. 책 속에서 이러한 부분을 마주한 독자는 과연 작가와 작중인물의 경계를 어느 지점까지로 한정해야 할지 혼동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게다가 페터 회는 작가적 성공을 거두고 언론매체로부터 뜨거운 관심을 받으면서도 사생활을 잘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하다. 이러한 논란에 대해 3년 간 침묵을 지켜오던 페터 회는 한 인터뷰를 통해, 이 책에 묘사된 부분과 자신의 경험이 100퍼센트 같지는 않다고 밝히며 오해의 여지를 비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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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약자들, 특히 인간 본연의 물들지 않은 가능성을 의미하는 아이라는 존재에 깊은 애정을 갖고 문명이 남긴 상처를 보듬어왔다. 작가의 자전적인 요소가 곳곳에 깃든『경계에 선 아이들』에서 또한, 다수와 주류라는 이름으로 대치될 수 있는 성인들의 야만과 권력 앞에 무방비한 아이들이 느끼는 공포와, 인류를 지배해 온 시간 철학, 사회적 억압과 교육, 개인의 삶에서 시간이 지니는 의미 등이 페터 회 특유의 간결하고도 깊은 여운을 남기는 문체를 통해 생생히 드러나고 있다. 자유와 시간의 의미를 탐색하는 이 소설은, 서로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던 아이들의 여리고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이자, 사회적 억압에 대한 서늘한 고발이기도 하다.
이 작품의 화자는 고아인 14살의 페터, 그리고 긴 겨울과도 같았던 유년을 지내고 성인이 된 뒤 아내와 딸과 함께 살아가는 페터를 넘나든다. 심리 스릴러로서의 재미를 안기는 과거의 사건들과, 현재의 페터가 교육과 시간 철학, 그리고 삶과 사랑의 의미에 대해 사유하는 과정이 교차하며 진행된다. 14살인 페터는 고아원과 소년원을 전전하며, 굶주림과 추위뿐만 아니라 교사의 은밀한 성적 학대에 시달리는 등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코펜하겐에 위치한 ‘빌’ 학교에 입학한다. 명문 사립인 빌 학교에서는 ‘경계선 사례’로 분류된 문제아들(정신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지능지수가 떨어지는 등의)을 일반 학생들과 함께 교육해 향상을 도모하는 비밀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었다. 이는 또한, 부적응자라는 낙인이 찍힐 아이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이기도 했다. 그러나 취지와는 달리, 실험 대상인 문제아들은 심리적인 폭력, 선의를 빙자한 체벌과 감금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일반 학생들 가운데에서도 문제를 일으킨 이는 이렇다 할 설명 없이 언젠가부터 사라진다. 학교에서 모든 것을 통제하고 규제할 수 있다고 여기는 어른들은, 시간과 공을 들이면 학생들을 관리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고 확신한다. 지능지수에 의해 학생들을 분류하고, 개인적인 유대를 철저히 차단하며, 말썽을 피우면 가차 없이 얼굴에 주먹을 퍼붓는다. 강제된 시간과 지나친 관심은 학생들의 삶을 감시하고 규제하는 또 다른 억압이 되어간다.
“빌은 이 실험이 시대를 앞선 거라고 했어.” 카타리나가 말했다. “미래적인 실험이라고. 공공 여론을 앞서 간 것이라고 했어. 빌이 말한 대로 학교를 ‘태양의 일터’로 변모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을 거야. 손상된 아이와 정상적인 아이의 차이를 없애버릴 수 있는 실험실로 바꿀 수 있다고. (262쪽)
“그냥 도와주려고 했던 것뿐이야.” 빌이 말했다. “밝은 빛 속에 있는 아이들뿐 아니라. 나머지 아이들도 같이 이끌고 가고 싶었다. 죽은 자들의 집에서 산 자들의 땅으로. 너희 모두를 이 ?마크자유학교에서 함께 끌고 가고 싶었어. 어렵던 시절로 인해 고통 받는 아이들도 모두 밝은 빛을 누릴 권리가 있으니까.” --- p.275
그들은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모든 아이들을 덴마크 공립교육 체제에 한데 모으려는 계획. 정신적 결함이 있거나 비행을 저지른 아이들은 물론 학습 진도가 늦은 아이들까지도. 심한 지적 장애와 정상의 경계에 선 아이들을 모두 끌어안아 학교에 보내려는 계획이었다. 빌 학교는 이 통합을 위한 전범이 될 예정이었다. 이 학교는 어떻게 통합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 연구하기 위한 실험실이고 작업장이었다. 이로 인해 보안 시설이나 심리학적 도움이 필요하고, 여분의 수업비가 들더라도 감수하고자 했다. 학교의 질서와 정확성은 이 실험을 둘러싸고 굳건하고 안전한 구조물을 건축하기 위한 것이었다. --- p.284
섬세하고 아름다운 성장담, 인간과 사회를 관통하는 철학, 세련된 심리 스릴러의 묘미
『경계에 선 아이들』은 또한 성장소설로서의 미덕과, 인간 사회의 근본을 꿰뚫는 철학적 성찰, 뒤에 일어날 사건을 궁금하게 만드는 스릴러로서의 묘미를 겸비한 기묘한 작품이다. 청소년기의 불안한 심리와 세상에 대한 공포와 반발심을 감각적인 문체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장 콕토의 『앙팡 테리블』의 뒤를 잇는다. 그러나 보다 더 우울하고 의미심장하며, 심리학, 사회학, 교육학의 영역과 요소까지 함께 곁들여 지적인 깊이와 재미를 더한다. 등장인물은 많지 않고 차분하게 절제된 묘사와 서술이 이어지지만, 독자는 어느덧 이 ‘경계에 선 아이들’의 과거와 일상, 그리고 다음 운명에 대해 숨죽인 채 지켜보고 걱정하고 상상하게 된다. 다윈의 적자생존 원칙을 적용한 교육 실험이 낳을 결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름답고도 고통스러운 성장기를 지나왔고 또 지금 이 순간 지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성장통과 감성이 도처에 숨어 있다가 한순간씩 폐부를 찌른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했던 모든 것을 기억하지만 어른들은 아이일 때 알았던 모든 것을, 시간에 지배되며 잊어간다.
시간은 어른들을 감쌌다. 성급함, 두려움, 야망, 쓰디쓴 실패, 장기적인 전망들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더 이상 제대로 보지 않으며, 보았다고 하더라도 오 분 후면 잊어버렸다. / 반면 우리들은 보호막이 없다. 그리고 그 순간을 영원히 기억한다. /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 바로 그러했다. 우리는 얼굴 표정, 모욕이? 격려의 말, 무심결에 던진 말, 힘과 무력함의 표현을 모두 기억했다. 어른들에게 우리는 일상이었지만, 우리에게 그들은 영원하며 우주적이고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215쪽)
“학교에서 쫓겨나지 않고 남아 있을 수 있게 되면 십 년 동안 이곳에 다니게 돼. 그 십 년 동안 너의 시간은 엄격하게 규제당할 거야. 자기가 어디 있어야 하는지나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심을 품어볼 기회는 거의 없겠지. 스스로 뭔가를 결정할 수 있는 시간도 극히 적을 거야. 나머지 시간은 엄격하게 규제돼. 종이 울리면 교실로 올라가지. 다시 울리면 내려오고. 종이 울리면 밥을 먹고, 다시 울리면 공부. 또 울리면 다시 식사. 울리면 학습 시간. 다시 울리면 세 시간 여가 활동. 마지막으로 울리면 잠자리에 들지. 마치 좁은 터널이 앞에 놓여 있어서 그 길을 죽 따라갈 뿐 다른 데로는 빠지지 못하는 것처럼. 그런 터널은 막 닦아놓은 유리처럼 눈에 보이지 않아. 유리창으로 날아 들어간다고 해도 볼 수 없지. 하지만 장님이나 근시가 되면 그 시스템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만 해. 나는 오랫동안 노력해 왔어. 이젠 알아.” --- pp.105~106
결말을 궁금하게 만드는 사건과 철학적인 사유가 독특하게 어우러지는 플롯은 페터 회의 특장(特長)으로 여전히 유지되지만, 『경계에 선 아이들』은 과거와 현재의 사건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시간 개념에 대한 지적이고 학문적인 탐구가 더해져 더욱 입체적이다. 문명 전체에 대해 겨누었던 비판의 칼끝은 덴마크 사회로 지점을 좁히며 분노에 가까울 정도로 날카로워졌고, 보다 절제되고 간결해진 문체는 전작과 대비되는 명료한 명제를 던지며 인간의 더 깊은 영역을 탐구한다. 특히 인간과 사회를 휘두르고 문명을 관통하는 ‘시간’이라는 개념에 대한 철학적 탐구는 물리학과 철학, 문학의 경계를 허물며 작품 전체에 걸쳐 치밀하게 이어진다.
시간은 주인공 페터를 심리적으로 조정하고 규제하고 생각을 멎게 만든다. 시간의 경계에 섰을 때 그는 자신만의 생각을 하고, 타인들과 관계를 나눈다. 시간은 과거의 상처와 기억을 조정할 뿐만 아니라 표현하며, 따라서 시간은 감정적인 상처와 같은 의미가 된다. 그렇게 시간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언젠가부터 시간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하며, 사람을 다루는 일종의 연장이 되어 삶을 조인다. 그렇게 시간은 인간을 억압하고 곧 신이 되어간다.
시간은 저절로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붙들어야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시간을 놓아버리면 그 순간이 아주 중요해진다는 것을.(26~27쪽)
고통은 중요한 것이기에 사람은 항상 그걸 설명해 버리려고 한다.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은 감당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람은 고통을, 시간을 이용해 설명해 버리려 한다. p.83
일상적인 시간, 즉 시계의 시간 안에서는 확실하고 구체적인 사물들을 이해할 수 있다. 시간을 놓아버리게 되면 다른 것들을 이해하게 된다. / 그것이 바로 병으로 생긴 이점이었다. 중요한 일이 일어나고 있을 때 사람은 그 순간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리고 충실한 시간을 얻는다. 그러면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마치 블랙홀 안에서 움직이는 것과 같다. 너무 가까이 가면 빨려 들어간다. 하지만 나란히 따라가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 pp.41~42
“여기서는 계속 선발을 하고 있어. 사람들은 자연법칙에 따라 선발돼. 학교는 향상을 위한 도구야. 학교는 이런 식으로 움직이지. 네가 기대대로 뭔가를 성취하면, 시간이 너를 위로 끌어올려. 그래서 교실들이 이런 식으로 배치되어 있는 거야. 초등 1학년부터 3학년까지는 1층에 있지. 그다음에는 2층으로 올라가. 그리고 3층. 중등부부터는 4층에. 마침내 맨 꼭대기에 올라가면 강당이 있지. 빌에게 자격증을 받게 되는 곳. 거기서부터 세상으로 날아갈 수가 있어.”(106쪽)
나는 어째서 이렇게 힘든 건지, 어째서 이렇게 많은 규칙이 있는 건지 궁금했어. 그러다가 그건 모두 학교에서 바깥 세계를 격리해야만 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어디서나 시간이 지난다고 올라갈 수 있는 게 아냐. 시간이 아래로 끌어내려 파괴하는 곳도 많아. 그렇기 때문에 그런 곳들은 학교에서 분리해야 하는 거야. 너는 반드시 위로 올려주는 세상 속에 머물러 있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기대에 맞춰 나가기가 ?려울 테니까. 맞춰 나간다는 건 시간을 믿을 때 가장 잘할 수 있는 거야. 전 세계가 너를 위로 향상시켜줄 수 있는 도구라는 걸 믿고 최선을 다하는 한 성공하지. 그게 바로 학교가 표방하는 은유야. 대단해. --- p.107
삶과 죽음, 사회화와 부적응 사이에서 방황하는 지상의 모든 아이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가족과 세상, 학교에서 버려진 아이들. 상처를 꿰매지 못하고 사라져가는 아이들. 그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누가 그들을 책임질 수 있을까? 부모가 자살해 갑작스레 고아가 된 카타리나, 폭력과 학대를 견디다 못해 결국 부모를 살해한 문제아 아우구스트, 고아원을 오가며 어른들에게 사랑받지 못했던 페터. 이들은 아직 적격자도 부적격자도 아닌 경계에 서 있다. 이러한 경계선은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기회를 의미하는 듯도 하지만, 비정상과 정상이라는 개념으로 인간을 구분하고 수치로 등수를 매긴다는 행위는 이미 단절과 폐쇄를 의미한다. 흑백이라는 이분법을 벗어나 다양한 가치를 통합하고 인정하는 순간 모든 아이들을 다 아우를 수 있는 것인데도, 교육은 기준을 세우고 평가를 활용해 선 안과 밖으로 사람들을 분리하고 차별한다. 경계에 서 있다가 결국 밀려나는 아이들은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은 채 살아간다. 처벌과 규제는 상처받은 아이들을 치유할 수 없다. 어른에게 사랑받지 못한 아이들은 스스로 강한 어른이 되어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른스러운 아이들이 더 가엾고 안쓰럽다.
안쪽에 있는 사람들, 즉 다수자들은 (…) 자신이 안쪽에 있다는 사실,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적자라는 사실에 기뻐할 뿐이었다.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공포와 포기는 전부나 다름없다. 모두가 그 사실을 안다. 경계선에 있을 때 사람은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하나의 법칙, 내가 이해한 것이었다. 법칙에 따라 몇몇은 선택되고 몇몇은 파멸한다. 그러나 경계선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영향력을 완화하는 작업을 해야 했다. 그들에게는 기회가 있었다. 빌 학교가 바로 그 기회였다. 경계선에 선 아이로 찍혔을 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 p.53
정신의학의 차원에서도 경계선 사례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고, 느끼지만 느끼지 않고, 바깥에도 뿌리 내리지 못하고 스스로에게도 뿌리 내리지 못하는, 허망한, 세상 모든 상극을 경험하면서도 접촉할 수 없는, 아주 강렬한 접촉에서만 겨우 접촉이 되는, 항상 허기진, 그래서 자신에게 사랑을 줄 것이라고 느껴지면 매달리고 모든 것을 달라고 하는 허기진 사람들, 자살 행위를 자주 시도하는 이들이 겪는 정신 장애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현대인 모두가 겪을 수밖에 없는 이 우울함에 페터 회는 교육과 철학을 아울러 방대하고 깊은 문학적인 울림을 전한다. 경계성 인격 장애는 가치를 양분하지 않고 통합하는 과정을 통해 치유될 수 있다. 작가가 소설 내에서 강조하는 세계관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우리가 어떻게 타인을 판단하고 분류하고 꼬리표를 붙이는지를 보여 주는 지능검사로는 누군가의 정직성과 진짜 생각을 판단할 수 없다. 그것은 다만 이기적인 생존에 관한 것일 뿐인데도, 우리는 그런 식으로 영원히 타인을 가둔다.
아이들을 교육적으로 ‘갱생’하여 행복한 사회인으로 만들고자 하는 강제적인 사회 교육적 실험은 실패로 끝나고 철학적인 문체와 개념, 아이들이 느끼는 복잡한 심리와 우울한 시각이 이어지지만 이 작품은 분명 희망을 전하고 있다. 일렬로, 순위대로 늘어선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인간 실존을 인정할 때, 인간은 비로소 스스로 창조한 문명과 사회적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시간 또한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졌으나 한없이 개인적이고 특수한 개념으로 바라볼 때 무의미한 줄서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희망과 자신에 대한 반성, 타인에 대한 애정, 시간을 상대적으로 인식하는 것임을 어린 페터와 성인이 된 페터 모두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무기력하고 나약하고 시간에 지배당하던 페터는, 카타리나를 사랑하고 아우구스트에게 부성애를 느끼면서 비로소 몸과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우리가 한때 그 모습이었던 과거이고, 지금 만나는 현재이며, 우리의 미래이다. 아이들이 없다면 달리 시간을 인식할 도리가 없기 때문에, 아이들은 곧 시간의 역사이다. 그러니 아이들이 행복하도록 노력하자는 것이 어쩌면 『경계에 선 아이들』이 전하는 가장 단명한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상처받은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시스템이나 권위, 처벌이나 심판이 아니다. 이해해야 하고 분류해서는 안 된다. 심판이 아니라 보살핌이 필요하다. 사랑하고 사랑받아야 한다. 인간적인 유대와 사랑, 개별적인 이해만이 그들을 구원하고, 또 다른 외로운 이들을 보듬는 진정한 어른으로 성장케 할 수 있음을, 페터 회는 소설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며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 안에서 개구리들은 죽지 않고 꼼짝없이 깊은 겨울잠에 빠져든 채로 빛이 비쳐 들기를 기다렸다. 개구리를 꺼내어 손바닥에 올려놓으면, 온기를 찾아 몸을 쭉 뻗으며 다시 살아났다. / 우리는 만났고 그 이후로는 다시는 완전히 포기할 수가 없어졌다. 나는 왜 이렇게 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 나는 그게 사랑이었다고 믿는다. 한번 사랑을 만나게 되면, 다시는 가라앉지 않게 된다. 항상 빛을 찾아 표면 위로 떠오르기를 갈망한다. --- p.329
마치 그 애를 놔두고 오면서부터 시계가 똑딱거리기 시작한 느낌, 초읽기가 시작된 느낌이었다.
어떻게 사람들이 자기 아이를 버릴 수 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아이를 버릴 수 있나? --- p.103
입맞춤은 시간을 앗아 갔다. 나는 그 입맞춤을 영원히 기억하게 될 것이며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누구라도 내게서 영원히 빼앗아 갈 수 없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순간 두려움은 송두리째 사라졌다. --- p.205
나는 그 아이들이 어떤 일을 저질렀건 어떤 면에서는 너무나 순수하다는 것을 알았다. 각자 그들 나름대로, 현재의 자기 모습으로 남아 있으려고 애썼다. 나와는 달랐다. 한 번도 아무것도 아니었던 나는 평생 다른 존재가 되려고 발버둥쳤다.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나는 그 아이들도 이 사실을 이해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들은 이해하고 있으며 괜찮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중요한 인간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때 시간이 점점 희미해졌다. 나는 아우구스트가 얼마나 작은지 깨달았다. 아우구스트가 나이가 더 많은데도 마치 나중에 생길 나의 아이와도 같았다. 그 순간, 두 사람은 하나가 되었다. 그 애와 나의 아이. 그리고 둘을 다시는 떼어놓을 수 없게 되었다. --- pp.265~266
나는 완전히 받아들여진 느낌이 이런 기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른 사람 곁에 가까이 앉아 이해받는 느낌. 모든 것이 이해되고 아무것도 판단당하지 않으며 내가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느낌. 208 “우리가 만난 뒤로, 처음 같이 변기 위에서 라디에이터에 기대앉았던 이후로, 난 한 번도 완전히 외로웠던 적이 없어. 네가 나를 떠난 후에도 말이야. 그전에는 내 삶에 아무것도 없었어. 하지만 누군가 내가 따뜻한 물에 샤워할 수 있도록 냉수 샤워기 아래서 오래 견뎌준 덕분에, 나는 다시는 진정으로 외롭지 않게 되었어.” --- pp.248~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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