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위한 나라와 청년을 위한 나라가 있다고 치자. 아마 시간이 흐르면 청년을 위한 나라만 남을 테니, 서로 싸울 일은 없을 것 같지만 그게 또 그렇지 않을 것이다. 청년을 위한 나라 국민들은 끊임없이 노인을 위한 나라 국민들에게 시비를 걸게 돼 있다. 청년들은 간디에게도 옷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시비를 걸게 돼 있는 인간들이니까. 암튼 그렇게 해서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나는 피 같은 거 보는 건 싫어하니까 무기 같은 건 사용하지 말고, 두 나라의 세계관만 이용해서.
노인의 세계관과 청년의 세계관이 서로 부딪히게 되면 과연 누가 이걸 것인가, 라는 질문을 채 끝맺기도 전에 청년들의 세계관은 대리석에 떨어진 크리스털 잔처럼 산산조각이 나는 걸 볼 수 있다. ‘세상에, 이렇게 허약한 세계관이라니’, 아연실색하며 부서진 조각들을 만져보면 그건 고강도 금속처럼 단단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노인을 위한 나라의 세계관은 얼마나 강하기에 이처럼 강한 금속이 산산조각이 난단 말인가? 고개를 돌려 그 쪽을 바라보다가 나는 깜짝 놀라게 된다.
아무리 해도 너는 이 세계를 바꿀 순 없어
주노 디아스.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이 책의 표지에는 다음과 같은 찬사들이 적혀 있다. 뉴욕타임스, 타임즈 선정 올해의 소설 1위, 아마존,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2008년 퓰리처상, 전미비평가협회상 수상, 뉴요커 선정 ‘21세기를 빛낼 최고의 작가 20인’에 선정. 내가 아는 한, 이런 수상 경력의 의미란 주노 디아스라는, 이 도미니카 출신의 작가가 지금 미국에서 글을 제일 잘 쓴다는 걸 뜻한다. 아마존과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야 늘 있는 것이지만, 퓰리처상과 전미비평가협회상을 동시에 수상한다는 건 보기 드문 일이다. 뭐, 읽을 책이 없나하고 주말에 서점에 갔다면 바로 이런 책을 사야만 한다.
이 소설은 제목에서 알 수 있다시피 오스카 와오라는, 도미니카 출신의 한 소년의 짧은 삶을 다룬다. 하지만 소년만이 주인공이 아니고, 소년의 누나와 엄마, 할아버지와 할머니까지도 모두 주인공으로 나오는데, 그 과정에서 도미니카 현대사가 매우 코믹한 문체로 묘사된다. 오스카 와오는 여러 대중적인 이야기들, 그러니까 SF, 판타지, 그래픽노블 등에 익숙한 소년으로 나오는데, 그런 대중적인 이야기들의 과장된 수사법이 이 소설에는 그대로 나온다. 이런 수사법을 사용한 건 독재의 공포로 점철된 도미니카 현대사를 간접적으로 서술하기 위한 고육책처럼 보이지만, 더 정확하게는 아무리 현실의 고통이 크더라도 이를 초현실적으로 표현하는 중남미 문학의 전통과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마르께스의 경우에는 민간전승과 신화를 통해서 이를 표현했다면, 그 다음다음 세대인 주노 디아스는 자본주의 문화를 거쳐서 이를 서술하는 셈이다.
이 소설을 읽는 첫 번째 재미는 재치 넘치는 표현들을 발견하는 일이다. 대략 3페이지에 하나 정도씩은 건질 수 있다. “내가 반바지를 입고 나서면 사람들이 모여서 내 다리를 구경하느라 교통체증이 생길 지경이었다.” 이건 중남미 소설에서 미녀를 묘사할 때, 많이 본 표현이다. 그들은 주로 교통체증을 얘기하는데, 나는 중남미 도심의 교통체증은 일상적인 건 아닐까 의심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그해 여름, 우리의 소녀는 공식적으로 미친 듯한 속도로 육감적인 몸매를 갖추었고, 그건 포르노 감독이나 만화가만이 맑은 정신으로 그려볼 만한 몸뚱이였다.” 이건 대중문화에 익숙한 작가만이 사용할 수 있는 표현법이다. “열여섯일 땐 이런 몸매가 공짜지만 마흔에 이런 몸매를 유지하려면, 쯧, 그게 아예 직업이 돼야 하거든.” 이 정도라면 인생의 지혜에 가깝다
낄낄거리며 이런 재치의 성찬을 즐기다보면, 어느새 도미니카의 끔찍한 현대사를 알게 된다. 그 현대사의 교훈은 무엇일까? 이게 바로 청년의 세계관을 산산조각 낸, 진정한 익스트림울트라파워를 자랑하는 노인의 세계관이다. 그게 바로 아무리-해도-너는-이-세계를-바꿀-수-없어라는 것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에서 늘 최고의 무기로 받드는 그 ‘아무리-해도……’는 언제 사용하는 것일까? 청년들은 열망한다. 나이와 신분을 뛰어넘는 위대한 사랑을. 그때, 이 진리가 발사된다. 아무리 해도 너는 이 세계를 바꿀 수는 없단다. 청년들은 열망한다. 모두가 행복하게 되는 세상을. 힘없고 외롭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자비로운 세상을. 하지만 이때도 레이저처럼 그 진리가 발사된다. 아무리 해도 너는 이 세계를 바꿀 수는 없단다. 청년들이 그 어떤 세계관을 가져와도 노인들의 이 무기 앞에서는 꼼짝달싹하지 못한다.
지상에서 천국을 느끼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뿐
소설에서는 이 노인의 세계관을 ‘푸쿠 아메리카노’, 즉 신세계가 발견된 이후 서인도 제도로 숨어 들어온 악령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건 인간이라면 도저히 이성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지만 제3세계 사람들이라면 너무나 잘 이해할 수 있는 어떤 고통 앞에 직면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상상의 소산이다. 소설에 나와 있다시피 이걸 판타지라고 말한다면, “산토도밍고보다 더한 SF가 있나? 카리브보다 더한 판타지가 있어?” 우리에게는 고난이 미리 정해져 있다는, 말하자면 숙명적 세계관. 노인의 지혜라는 건, 아무리 좋게 봐도 이 숙명적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왜냐하면 청년들은 몰라도 그들은 이제 알고 있으므로. 사람이란 생로병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걸. 약육강식의 논리도 그와 마찬가지로 작동한다는 것. 청년들이 제 아무리 자유와 평등과 자비를 외친다고 해도, 노인들은 그건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래서? 그래서 청년을 위한 나라는 완전히 전쟁에서 패배하는 것일까? 모든 청년들은 희망을 잃고 좌절하는 것일까? 이게 소설이 아니고 경제학책이라면, 사회학책이라면, 심지어 종교서라면 결론은 언제나 그렇다는 게 될 것이다. 굳이 오래 생각해보지 않아도 그 사실은 알 수 있다. 역사를 되돌아봐도 잠시 순수한 논리가 먹혀드는 것처럼 보이던 순간도 시간이 조금만 흘러가면 다시 예전의 약육강식의 논리에게 밀려났다. 청년들은 지상에서 천국을 원하는 사람인데, 이 땅 위에 발을 디딘 채 천국을 느끼는 방법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건 소설이고, 모든 위대한 소설들은 상상의 힘으로 논리와 이론을 뛰어넘는다.
마지막의 반전은, 대중문화의 여러 영웅들이 지나간 반전과 마찬가지다. 늘 죽을 위험에 처했던 슈퍼맨은 마지막 순간에 다시 일어나 적을 무찌른다. 아무리-해도-너는-이-세계를-바꿀-수-없어 앞에서 맥없이 나가떨어졌던 청년이 마지막 순간 힘을 모아서 다시 일어나 그 세계관을 무찌른다. 그러니까 사랑의 힘으로. 여기까지 쓰면 정말 통속적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맞다, 정말 통속적인 결말이다. 하지만 통속적이라는 건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결말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위대한 이야기는 늘 그들이 원하는 바를 들어줬다. 다만 어떤 식으로 들어줬느냐가 중요했을 뿐이다. 이 소설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결말을 만들어낸다.
김연수 http://larvatus.egloos.com/4131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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