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은 ‘경쟁의 연속’입니다. 어릴 땐 형제들과 먹을 걸 두고 다투고, 학교에 입학해서는 등수를 놓고 다투죠.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치열해지죠. ‘경쟁’은 사회에 진출한 다음에 본격화되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어린 시절 겪었던 경쟁들은 사회에서 겪어나가야 할 경쟁을 대비하는 훈련이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겁니다. 이렇게 경쟁에 경쟁을 거듭하다보면 마치 ‘경쟁’이 상식인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 세계의 자연만물이 원초적으로 그렇게 살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죠. <동물의 왕국>을 봐도 그렇습니다. 빨리 뛰고,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사자가 톰슨가젤을 잡아먹죠. 우리는 그 모습을 인간 사회에 대한 은유로 읽습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그야말로 지구 전체가 자본주의화 되는 격변의 시기를 살았던 러시아인이 있었습니다. <상호부조론>의 저자 크로포트킨이라는 사람이죠. 당시는 자본의 지배가 관철되는 시기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다른 세계를 꿈꾸는 사람들이 많았던 시대이기도 합니다. 즉, ‘혁명의 시대’였던 것입니다. 국가가 모든 억압적 권력의 정점에 있다고 보았던 아나키스트들은 국가 폐지를 최대의 과제로 삼았고, 노동자 계급이 새로운 시대를 도래하게 한다고 생각한 맑시스트들은 노동자 국가를 건설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크로포트킨은 자연에서는 각자가 경쟁하는 만큼이나 서로 돕는 ‘상호부조’의 원리도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보여주는 예는 보지 않아서 안 보일 뿐,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함께 사냥하고, 동료가 먹이를 먹는 동안 주변을 지켜주는 독수리 무리들, 충분히 먹이를 먹은 후 굶주린 동료를 위해 먹이를 게워내 주는 개미들, 한사람에게 부가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율적인 시스템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에스키모인들 등등. 특히 에스키모인들의 경우 부의 집중이 부족의 단합을 깨고 지배적인 권력을 만들어 낸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 부가 쌓이면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하고 자신의 부를 모두에게 나눠줍니다. 그리곤 “다시 가난해 졌지만, 우정을 얻게 되었다”라고 말하죠. 이런 시스템이 바로 ‘포틀래취’라고 불리는 제도입니다. 이 제도를 통해 에스키모인들은 부의 집중 과정 속에서 벌어진 혼란 상황을 수습하고 부족 내의 평등을 재건합니다. 이런 예들을 보면 오히려 자본주의적인 질서가 자리를 잡은 곳에서만 ‘경쟁’이 상식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상식’은 사실 아주 무서운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상식’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삶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통념과 상식 전체를 늘 의문에 붙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의문 속에서 삶을 풍요롭게 하는 다른 상식을 창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죠. <상호부조론>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싫더라도 인정해야 했던 것들이 사실은 얼마나 빈약했던 것인지, 경쟁적 삶 외에도 삶을 살찌우는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곧장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는 희망으로 연결된다는 그런 교훈들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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