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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윤, 고전 연재를 마치며, 동시에 시작하며 / 행복이 당신 곁을 떠난 이유는? / 별일 없이도 기분 좋아지고 싶은 날



고전 연재를 마치며, 동시에 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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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일 : 2010-06-09 조회수 : 1,480
글 / 정혜윤(CBS 라디오 PD) coffeepearl@hanmail.net
처음 고전에 다시 관심을 둔 것은 사실은 꽤 오래전의 일입니다. 그 일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편의점 계단에 앉아 누군가랑 통화하고 있었습니다. 내 다정한 친구는 “만약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면 진짜 슬퍼하는 건 뭘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친구는 사랑을 시작하기도 전에 사랑을 잃게 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도 공식이 있고 사랑도 영원한 반복처럼 느껴지니까요.

저는 난데없이 이사벨 아엔데의 『영혼의 집』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소설의 초입부에 로사라는 아름다운 여인이 나옵니다. 그 여인이 얼마나 아름다우냐 하면 벌꿀 같은 황금빛 눈동자, 초록빛 머리카락과 나는 듯한 사뿐한 몸놀림, 싱그러운 바다를 연상시키는 우아함 때문에 인어 또는 인간과 신화적 존재 사이의 불분명한 경계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로사가 등장하는 곳마다 술렁거리는 동요가 있었고 그 일대의 교통이 마비되었습니다. 그녀가 사라진 대문 뒤에는 보랏빛 여운이 남았지요. 그 로사를 사랑한 약혼자는(그는 50년이 넘게 그녀가 처음 자신의 인생으로 들어온 날을 잊지 못합니다. 기억 속에서 로사는 무심한 천사와도 같이 그에게 날아옵니다) 그녀를 위해 2년 동안 산속에 처박혀 광맥을 찾아 헤매며 거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두터운 광맥을 찾아냅니다. 그 가슴 벅차도록 행복한 날 오후, 그는 로사에게 편지를 쓰며 상상 속에서 로사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로사의 사망을 알리는 전보를 받습니다. 로사는 로사 아버지의 정치적 적들이 보낸 독약을 잘못 마셔 죽어버린 것입니다. 약혼자가 보낸 첫 번째 반응은 분노였습니다. 그는 손에서 피가 나올 때까지 주먹으로 사방을 칩니다.

그리고 서른 시간을 여행하여 아직 땅에 묻히지 않은 로사를 보게 됩니다. 로사는 그가 기억하는 모습보다도 훨씬 더 아름답게 누워 있었습니다. 그는 우주 전체를 다 뒤져도 초록색 머리카락을 가진, 인어처럼 아름다운 여자는 로사 이외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마침내 로사의 무덤 곁에서 하룻밤을 보냅니다. 그의 일평생을 뒤져봐도 그보다 긴 하룻밤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무덤 속의 로사에게 말했습니다. 너를 마음속의 깃발로 삼아 살았기에 막장에서 길을 잃어도, 형편없는 음식 때문에 일 년 내내 배앓이를 해도, 밤에는 추워서 얼어붙어도, 낮에는 더워서 헛것이 보여도 계속하여 산을 파헤칠 힘을 얻을 수 있었다고. 그런데 그녀가 자신을 배신하고 떠났다고, 그리고 또 그는 그녀가 자신을 갖고 놀았다고 따지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둘이 있어본 적도 없고 키스도 단 한 번밖에 해보지 못했으니까요. 그는 나중에 두고 두고 해주려 했던 애정 표현과 깜짝 놀라게 하며 주려고 했던 선물들에 대해서도 들려주었습니다.

그렇게 밤을 보낸 뒤에 그에게 남은 최후의 감정들은 뭐였을까? 난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내 친구는 알아맞히지 못했습니다. 그에게 남은 것은 경건한 슬픔일까? 죽음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혼란이었을까? 다시는 사랑을 못 하리란 예감이었을까? 셋 다 아니었습니다. 좌절된 욕망이었습니다. 그때 내가 인용한 문장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내 손길로 그녀를 애무하고…… 샘물과도 같은 초록빛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뒤 그녀 속으로 풍덩 빠지고 싶은 그 간절한 욕망을 이젠 절대로 이룰 수 없었다.

우린 그 순간 불쌍하고 거친 약혼자의 감정을 각자 자기 방식으로 이해했습니다. 나는 “어느 다사로운 가을 저녁 두 눈을 감고 훈훈한 그대 젖가슴 냄새 맡으면 단조로운 태양빛 눈부신 행복한 해안이 내 눈앞에 펼쳐진다. 그것은 게으르게 하는 섬”이란 보들레르의 시구를 떠올렸습니다. 나에게 사랑의 손길은 그런 것입니다. 자연이 쑥쑥 자라는 섬, 게으른 섬, 나에게 애무는 그런 것입니다. 껍질을 벗겨내고 한 수줍고 뜨거운 인간을 끄집어내는 것. 인간의 꼬리에 심장이 딸려 나오게 하는 것. 그런데 그것을 할 수 없다면? 아마 인생이 변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 같았습니다. 로사가 영원한 천국에서 행복을 얻기를 축원하지 않은 약혼자의 솔직함에 나는 마음이 끌렸습니다. 로사의 천국은 곧 자신의 지옥이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또 다른 생각도 듭니다. 이를테면 한 그루의 나무를 그려놓고 자신이 나무 그림을 그린 이유는 가지를 뻗기 위해서라고 말한 피카소가 생각이 납니다. 그래서 그가 그린 나무는 그 자신이며 결국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나뭇가지가 아니라 자신만의 가지였습니다. 피카소라면 아마 이런 파괴를 전적으로 삶으로 받아들이려 했을 겁니다. 인간들의 몸을 자신만의 생채기로 가득한 가지를 달고 있는 한 그루의 나무로 상상해 보니 울고 싶기도 했지만 또 조금은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나뭇가지가 어떤 방식으로 나무의 몸통을 뚫고 나오는지 나는 그때 결코 알지 못했으니까요.

그때 내 친구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단지 내 친구는 수화기 너머로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 한숨은 충분히 자극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내면의 오렌지 껍질이 열리는 소리였으니까요. 내 친구는 사랑에 뛰어들었고 나에게는 더 많은 고전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때 읽고 순간을 나눴던 고전들의 제목이 지금 막 떠오릅니다. 『적과 흑』, 『미겔 스트리트』, 『금각사』, 『이름 없는 주드』, 『인생의 베일』, 『그리스인 조르바』, 『닥터 지바고』, 그 후 같은 옛 고전부터 『피아니스트』,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쉼보르스카 『끝과 시작』, 폴 오스터 『달의 궁전』, 스티븐 킹의 『스탠 바이 미』, 레이먼드 카버와 존 치버의 소설들까지. 어쩌면 나는 들려주기 위해, 말하기 위해 읽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마르케스 자서전의 제목이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인 것을 알았을 때, 저는 서점으로 뛰어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르케스의 의견은 그러니까 이런 거더군요.

삶은 한 사람이 살았던 것 그 자체가 아니라 현재 그 사람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며, 그 삶을 얘기하기 위해 어떻게 기억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엔 진실과 허구가 얼마나 뒤섞여 있을까요? 모래 속의 금을 찾아내는 것과도 같을까요? 진실과 허구 중에 무엇이 모래이고 무엇이 금일까요? 저는 오래전 우리 고장의 강가에서 금을 찾아 모래 사장을 뛰어다니던 어린아이들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냇물 바닥을 훑어서 모랠 퍼올리고 거기서 체를 흔들며 금을 찾는다는 건 완전히 불가능해 보였는데 그래도 우리 엄마는 자기가 한 움큼의 금을 모았고 손바닥의 홈에 발랐다고 주장하더군요. 그 금을 어떻게 했느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나중에 ‘이야기해줄게’라고 대답했습니다. 조금 실망했지만 그래도 금이 공중으로 튀어 올라 이야기로 변해 쏟아져 내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야기들은 사랑을 나누기 위해 황금빛 빗방울이 되어 쏟아져 내린 제우스처럼도 생각되었습니다.

책은 우리와 이런 식으로 만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책 또는 나 둘 중의 하나는 진실이고 둘 중의 하나는 허구, 그리고 우리 둘이 만나 이야기가 되고 그것이 황금 빗방울이 되어 쏟아져 내립니다. 그 빗방울을 먹고 나는 나만의 가지를 뻗겠지요. 자기만의 가지를 뻗기 위해 우리에게는 얼마나 많은 불면의 밤과 이야기가 필요한 것일까요?

쥘리앙 소렐의 마호가니 옷장에 자만심과 사랑의 감정으로 뒤범벅되어 숨어 있던 『적과 흑』의 마틸다, ‘죽은 건 개였다’란 골드스미스 애가(한 남자가 미친 개에게 물렸는데 죽은 건 물린 이가 아니라 미친 개였다)의 마지막 구절을 남기고 죽은 『인생의 베일』의 윌터. 옥스퍼트 대학 쪽을 한없이 바라보던 『이름 없는 주드』의 주드, 병원에 누워서 최고로 형편없는 친구까지도 그리워하던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 그 녀석(지금 왜 이름이 기억 안 날까요?) 나는 그런 이야기들을 나는 마치 어느 시절 오후의 일들처럼 받아들였습니다. 그런 수많은 날, 나는 눈이 부셔 전부를 다 볼 수는 없었겠지요. 그 오후에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어떤 움직임과 시간과 감각의 떨림에, 나뭇잎의 그늘에 형체를 부여하는 또 다른 현실이자 삶의 이면이 바로 책 속의 이야기들이었고 그래서 우리의 이야기는 책과 나 사이의 왕복 운동 같이 진행되었습니다.

우리의 이야기는 알리바이가 아닙니다. 차라리 우리의 이야기는 감정에 가깝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현실에서 빠져나왔고 고립의 감각과 고독의 감각이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될 만큼 쓸쓸하기도 했지만 자유로웠습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감정을 갖는다는 것이 뭘까? 감정을 나눈다는 것이 뭘까? 감정을 헤아려 본다는 게 무엇일까? 다시 생각해 봅니다. 천재에겐 직관이 있다면 나는 나 같은 평범한 사람에겐 감정이 있는 것 아닐까라고 짐작합니다. 왜냐하면 타인의 감정에 대해서 생각할 때 나는 나에게 큰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나와 대화를 나누는 상대방에 대해서도 큰 관심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뭔가 다른 것들이 늘 더 중요하고 생생했었습니다. 변함없는 거리의 소음을 배경으로 책장을 넘길 때 나는 내 것이 아닐 수도 있었던 깊은 슬픔과 기쁨과 또 다른 감정들을 느끼곤 했었습니다. 그리고 문득 궁금해지곤 했습니다. 이런 슬픔들은 어디서 오는가? 어디선가 술에 취해 탑에서 떨어지는 지붕장이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지붕장이는 떨어지면서 탑의 시계가 열한 시 반을 가리키고 있다고 말합니다. 나는 그 지붕장이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인간의 대지』에서 길을 잃고 리비아 사막을 헤매는 생텍쥐베리는 사막의 여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 작은 여우야, 나는 지금 절망적이란다.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절망적인데도 네가 어떤 성격일지 관심이 생기니 말이야…….”

나는 이 문장이 정말 좋습니다. 나는 절망적인데 네가 궁금해. 너무나 근사합니다. 그 전날 생텍쥐베리는 밤새도록 지도를 탐독합니다. 하지만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얻은 것은 있습니다. 종교시설, 우물 같은 인간의 존재를 드러내는 모든 기호 위로 몸을 숙여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 언덕 위에 우물이 없어도 우리는 단지 그 이유로만 울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결국 헤매다 만나지 못할지라도 인간들의 신호는 단지 신기루에 불과한 것은 아닐 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동경의 대상이니까요.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 르 끌레지오가 했던 말도 기억이 납니다. 그는 강과 바다가 섞이는 곳에 서서 그곳에서라면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오류와 배반의 실타래를 풀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섬진강이 바다로 흘러가는 곳에서 벚꽃 지는 계절에 굴을 먹으면서 그 글을 읽었습니다. 그 책 『아프리카인』에는 오로지 자기가 걸었던 걸음만으로 지도를 그리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래서 그 지도에서 거리는 킬로미터로 표시되지 않고 오로지 도보로 걸었던 날과 시간으로만 표시됩니다. 그 지도는 그래서 하나의 기호이면서 한 인간의 신호겠지요. 그날 강과 바다가 만나는 만에 서 있는 것처럼 책과 책 바깥의 세상이 만나는 곳에 제가 서 있었습니다. 그것은 저 역시 풀어야 하는 오류와 잘못의 실타래 속에 있고, 최초의 근원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다고 고백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저 자기 발로 걸음을 걸어야만 흔적을 남길 수 있는,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한 인간으로서요.

고전 연재를 마치는 이유와 새로 연재를 시작하는 이유는 동일합니다. 나의 『세계가 두 번 진행되길 원한다면』 고전 책이 나오고 몇 차례의 강연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많은 분이 고전을 특별히 어렵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모든 책은 특별히 어렵다는 게 저의 생각이지만요.) 고전은 세계 문학 전집이란 이름을 달고 있는 거실의 인테리어 용품도 아니고, 대학생이 되기 위해 읽어야 하는 필독서도 아닙니다. 고전에 관해서는, 그러니까 언제나 고전을 가슴 설레게 바라봐야 하는 이유는 루이스 캐럴의 시구를 빌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우리는 잠자리에 들며 칭얼대는 나이 든 아이일 뿐이란다
창 밖에는 서리와 매서운 눈바람
폭풍이 미친 듯이 몰아쳐도
방안에는 활활 타는 화롯불과
즐거움이 넘치는 어릴 적의 요람이 있지
마법 이야기가 너를 사로잡아
넌 사나운 눈보라는 금세 잊게 될 거야
- 「거울 나라의 앨리스」 중에서


혹시 우리는 아직도 나이 든 아이, 금방 요정이야기에 사로잡히는 꼬마 녀석들 아닐까요? 어쨌든 분명한 건 어린 시절에 읽었던 고전, 까맣게 잊어버렸다고 생각한 고전들은 사실 우리의 내적 매커니즘을 이루고 있고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감수성을 이루고 있습니다.

다만 앞으로 시작할 연재는 고전 혹은 책과 나와의 만남의 ‘순간’에 바쳐지는 내용일 것 같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책들이 나오겠지요. ‘나는 절망적인데도 네가 궁금해!’라고 말하는 책들, 추락하면서 시간을 알려주었던 책들, 책이면서 또 책 바깥의 세상이기도 했던 책들. 아마 그 책들에 굳이 이름을 붙여준다면 ‘가능성의 책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이제 나는 내가 읽었던 책들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궁금합니다. 아마 내가 읽었던 책들은 나와 같이 살게 되겠지요. 세자르 바예호의 시구 중에 ‘사랑이 있던 곳이야. 잊지 마’란 것이 있습니다. 그 앞 문장들은 이렇습니다.

너는 아까 다른 일 때문에 여기 왔었지
그리고 지금은 가버렸구나, 이 구석에서
어느 날 밤, 네 곁에서
너의 부드러운 품 안에서
도데의 콩트를 읽었지, 사랑이
있던 곳이야 잊지 마.


잊지 말라고 누군가 부탁을 해도 우리는 결국 많은 것을 잊게 되겠지요. 그곳이 사랑이 있던 자리인지도 모르고 다른 일로 왔다가 가는 사람처럼 덜컥 문소리만 남기고 가버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어느 날인가는 품 안에서 알퐁스 도데의 책들을 읽었던 날을 떠올릴 것이고 그 자리가 사랑이 있던 자리임을 느낄 것이고 그 기억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임을 느낄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이야기와 삶은 또 섞이기 시작하겠지요.

이상하게도 나는 책 읽기를 멈추지 말란 말을 하고 싶을 땐 꼭 브레히트의 시 「밤의 안식처」를 속으로 생각합니다. 그 시 속에서 한 사내는 뉴욕 26번가 브로드웨이 골목에 서서 잠자리가 없는 사람들을 위해 밤의 안식처를 걱정하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희사금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세계는 그것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은 밤의 안식처를 찾아 그 밤 동안만은 바람을 피하고 그들 몸뚱이 위에 쌓였을 눈이 거리에 떨어지기는 합니다. 그다음 시구는 이렇습니다.

책을 놓지 마십시오. 이것을 읽고 있는 사람들이여

몇몇 사람들이 밤의 안식처를 얻어
그 밤 동안만은 바람을 피하고
그들 위에 쌓였을 눈이 거리에 떨어지기는 한다
그러나 세계는 그것으로 바뀌지 않는다
인간들 서로의 관계가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착취의 시대가 그것으로 단축되는 것도 아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의 무게를 나는 이 시의 무게로 느낍니다. 책을 읽고 이야기를 하는 동안 우리는 고작 이슬 한 방울을 나누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 보이지 않는 것에서 출발해 보이는 세계로 나가려고 의지를 발휘해야 합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한 평범한 사람이 온전한 인간이 되는 길이 무얼까 누구도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이야기와 삶이 섞이는 순간 우리는 희망을, 자기 자신을 자신의 바깥에서 찾는 법을 알아내게 될 거란 점입니다. 이야기는 알리바이가 아니듯이 단지 내면의 문제, 취향이기만 한 것도 아니고 나를 다른 세계와 만나게 하는 감정들, 움직이게 하는 감정들인 것 같습니다.

새 연재의 제목은 ‘사랑이 있던 곳이야. 잊지 마’입니다. 아!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떨어야 나의 가지를 뻗을 수 있을까요? 서리 내리는 아침. 이슬 젖은 밤. 근심어린 수많은 날 책은 나를 아름다운 연인처럼 유혹합니다. 만지지는 마라. 그러나 다가오라! 나는 그렇게 할 것입니다.


 

 

『행복의 정복』은 러셀식 행복의 비법입니다. 그리고 러셀 자신도 그 비결대로 살면서 행복해졌습니다. 이 책의 일장의 전체 제목은 ‘행복이 당신 곁을 떠난 이유’입니다. 러셀은 행복이 우리 곁을 떠난 이유로 대략 아홉 가지를 꼽습니다. 자기 안에 갇힌 사람, 이유없이 불행한 당신. 경쟁의 철학에 오염된 세상. 권태. 걱정, 질투. 불합리한 죄의식. 모두가 나만 미워해. 난 세상과 맞지 않아 등입니다. 첫 번째로 나오는 주제가 ‘자기 안에 갇힌 사람’입니다. 행복이 당신 곁을 떠난 이유의 첫 번째 장에 자기 안에 갇힌 사람이 나오는 것은 너무나 의미심장합니다. 저는 우리가 모두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자기애의 시대에 살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하곤 합니다.

러셀의 행복관은 단순합니다. 분명한 외적 원인이 없는데도 불행한 사람이 행복해지는 가장 본질적인 비결은 자신에 대한 집착을 줄이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몰입하는 사람은 대략 세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자기 도취에 빠진 사람.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과대 망상에 빠진 사람입니다. 자기 도취에 빠진 사람은 화가가 되면 존경받는다는 이유로 화가 지망생이 되는 유형의 사람들입니다. 법관이 되면 성공한 인생이라 평가받을 수 있다는 이유로 법관이 되려는 사람입니다. 그때 그림이나 법이란 목적에 이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 받는데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목적을 이루기 어렵고 그래서 불행합니다. 이런 허영심은 자존감이 부족한 경우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자존감을 키워야만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존감을 기르는 유일한 방법은 외부적인 대상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한 활동에서 성공을 거두는 것 뿐입니다. 그러니까 자존감을 기르기 위해서 거울을 보면서 자기 자신을 칭찬하거나 위로할 필요는 없는 겁니다.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실제로 죄를 지었다기보다는 죄의식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죄의식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신을 열등하다고 생각하고 원한 감정에 사로잡힙니다. 과대 망상에 빠진 사람은 사랑받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권력을 가진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남들이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이런 식으로 러셀의 행복의 비법을 몇 가지 더 정리하면 이런 것들이 됩니다.


-불행은 심리적인 공통점은 결국 어느 한 가지 만족을 다른 만족보다 소중히 여기고 자신이 이룬 성과에 대해서도 자신에게 만족감을 주는 활동과는 상반되는 것이라고 과소 평가하는 것이다. 지나치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야말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적을 것을 얻게 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자아 성찰을 하지 말아라. 자아 성찰은 고쳐야 할 질병인 자아 몰입의 기회를 늘리기 때문이다. 관심이 외부로 향하고 있는 사람은 어쩌다 한 번씩 자신의 영혼으로 눈을 돌릴 때면 자신의 내면이 대단히 다채롭고 재미있는 종류의 원료들을 분류하고 재결합하여 아름다운 혹은 발전적인 조합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다른 조건들이 모두 비슷할 경우 어느 것 하나에라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떤 것에도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에 비해서 훨씬 잘 세상에 적응할 수 있다.

-아무 노력 없이 산다는 것 자체가 행복의 본질적 요소를 앗아가 버린다. 원하는 것 중 일부가 부족한 상태가 행복의 필수 조건이다.

-어느 정도 권태를 견디는 것이 행복한 삶에서 필수적이다. 훌륭한 책도 지루한 부분이 있고 위대한 삶에도 지루한 시기가 있다. 어린 시절부터 단조로운 삶을 견디는 능력을 길러야한다. 그런 점에서 현대의 부모들은 비난받아야 한다. 현대의 부모들은 날마다 비슷한 생활을 하는 것이 아이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어린아이는 자신의 노력과 창조력에 의지해서 스스로 환경으로부터 즐거움을 찾아야한다.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모든 종류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올바른 방법은 이성적으로 침착하게 그러나 집중적으로 그 두려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두려움은 그것을 직시하지 않으면 반드시 더욱 심해진다.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질투에 대해서 말한다면 질투의 치료법은 행복뿐이다. 질투심이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서 즐거움을 얻는 대신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 괴로워하는 것이다. 불필요한 겸손도 질투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인간 본성에는 질투를 상쇄할 다른 격정 즉 탄복이라는 감정이 있다. 행복의 증진을 바라는 사람은 틀림없이 탄복은 증가시키고 질투는 감소시키고 싶어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제일 부러운 것은 행복 아닌가?

-하고 싶은 일은 있는데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불행한 사람이라면. 예를 들어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라면 글을 쓰려는 생각을 버려라. 그 대신 글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해보라. 세상으로 나가라 해적도 되어 보고 노동자도 되어보라. 기본적인 신체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모든 에너지를 쏟아야하는 생활을 해라. 진지함과 깊이를 느끼려면 공동체의 삶과 긴밀하게 접촉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모두가 나만 미워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것은 자신이 가진 장점을 지나치게 과장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신의 장점을 과대 평가하지도 말고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당신 자신과 마찬가지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상상하지도 말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신을 해코지하고 싶다고 생각을 가질 만큼 당신에 대해 골몰하고 있다고 상상하지 말라.

-충분히 인정받지 못해 불행하다면 자기 생각이 옳은지 따져볼 기준이 하나 있다. 만약 글을 쓰는 것을 예로 들자면 어떤 관념이나 감정을 표현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껴서 쓰는가? 아니면 갈채를 받고 싶은 욕구 때문에 쓰는가?

-당신이 박애주의적인 유형이라서 불행하다면 즉 선행을 베풀고는 선행을 받은 사람들이 전혀 고마워하지 않는 것에 자주 놀라는 사람이라면 당신의 동기는 당신 자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반드시 이타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자신과 아무 관련이 없는 모든 행동들을 자신과 관련되는 것으로 보는 사람도 허영심과 관련된 피해 망상이다. 자기 기만이야말로 쉽게 피해 망상과 연결된다.

-행복의 필수 조건은 단순하다. 진실이 아무리 불쾌한 것일지라도 단호하게 그것을 직시하여 그것에 익숙해지며 그 진실에 입각하여 삶을 구축하는 것이 옳다.

이런 것들이 러셀의 행복론입니다. 러셀에게 있어서 행복은 노력이고 투쟁입니다. 일상 생활에서 크고 작은 곡절과 실망스런 일을 겪어도 맘 속 깊은 곳에선 행복감을 갖고 있는 사람이 되는데 필수적인 것은 다시 정리해도 이렇습니다.

-행복의 비결은 되도록 폭넓은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관심을 끄는 사물이나 사람들에게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외부적 환경이 불행하지 않은 경우라면 열정과 관심을 자기 내부가 아니라 바깥 세계에서 찾는 것만으로도 누구나 행복을 성취할 수 있다. 자신에게 감정적으로 몰입하는 것을 피하고 늘 자기에게만 집중하는 것을 막을 수 있도록 애정의 대상과 관심거리를 찾아야한다. 철저하게 관심이 끌리는 것만이 당신을 도울 수 있다. 남들이 좋다는 것 말고. 중요한 것은 자기 부정이 아니라 관심을 외부로 돌리는 것이다.


김선일 선생님께 질문

http://www.yes24.com/chyes/ChyesColumnView.aspx?title=005044&cont=6063

2 http://ch.yes24.com/Article/View/17505

인터뷰 http://ch.yes24.com/Article/View/17529

(내 불만족, 냉소, 환멸, 패배감, 허영, 불행을 다루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독서다.)

 

 


 

-더운 밤에 스메타나의 몰다우를 들으면 참 좋다. 중세의 유서 깊은 도시에 퍼지는 물결 찰랑 소리가 그들의 비운을 달래주는 듯 내 귀에도 애잔하게 들린다.

-오늘 아침에 ‘will you still love me tomorrow?’를 캐럴 킹 버전으로 들었을 때 기분이 좋았다.

-먼 곳에 친구가 있어서 꼭 전해줄 책이 있다고 핑계를 대면서 찾아오면 기분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좋다. 나에겐 ‘지금 뭐해?’라고 문자를 보내는 후배가 있다. 그러면 나는 내 자리에서 바로 일어난다. ‘지금 뭐해?’ 난 대답한다. ‘딱 너를 기다리는 시간이지.’

-더운 날 막 뛰어가서 “사장님! 여기 맥주 한 병이요. 큰 걸로!” 이것도 정말 좋다. 추운 날 막 뛰어가서 “여기 정종 한 잔이요. 큰 걸로!” 이것도 정말 좋다.

-이유 없이 기분 상하는 날이 있다면 이유 없이 기분 좋아지는 날도 있는 법. 내게 주어지는 상황이 있다면 찾아나서야 하는 상황도 반드시 있게 마련인 법. 그런 날은 책상을 탁 소리가 나게 집고 일어난다.

-‘처음처럼’이란 말을 하며 결의에 가득 찬 건배를 남들이 외칠 때 (개인적으로는 ‘처음처럼’이란 말이 참 답답하다. 수많은 실패의 순간을 수많은 가치 있는 순간으로 돌려놓지 않고선 ‘처음처럼’이란 말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지? ‘처음처럼’이란 말은, 한때는 우리 모두 순수한 사람이었단 희망 넘치는 단서 정도로만 남겨두고 싶다.) 속으로 다른 구호를 외칠 때. 이를테면 ‘나방처럼!’ ‘쇠똥구리처럼!’ 이런 작은 배반의 순간에 기분이 좋다.

파블로 네루다
(Pablo Neruda, 1904~1973)


-호수의 동심원 무늬 물결을 보면서 ‘내가 나를 떠나서 멀리 퍼져 나간다’란 생각을 할 때 네루다의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민음사)에 나오는 시구의 힘을 빌리면 더 기분이 좋아진다. “나긋나긋한 황갈색 여자, 나를 네게로 끄는 건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게 나를 더 멀리 실어간다.” (이건 내가 거의 졸도할 만큼 좋아하는 구절이다. 나를 더 멀리 실어간다는 말!)

덩달아 네루다의 다른 시구가 생각나면서 인생의 다른 순간들이 떠오를 때 기분이 좋다.

“내 심장을 위해서는 네 가슴으로 충분하다.”
“나는 멀리 떨어져서 내 말들을 관찰한다. 그것들은 나의 것이라기보다는 너의 것이다.”
“내 말들은 네 사랑으로 얼룩졌다. 너는 모든 걸 점령했다. 너는 모든 걸 점령했다.”
“내 여자의 육체, 나는 네 우아함을 통해 살아가리.”
“제일 큰 별들이 너의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
“너의 가장 큰 약점은 감정이입이다. 손쉬운 감정이입을 하는 한, 넌 행동하지 못한다.” 나는 이 말에 어리둥절했었다.

이 말을 제대로 해석해준 책은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이다. 수잔 손택은 “당면의 과제가 타인의 고통에 눈을 돌리는 것이라면 더 이상 ‘우리’라는 말을 당연시해서는 안 된다”라고 선언한다.

수잔 손택은 ‘사람들은 왜 전쟁의 참사를 기록한 끔찍한 사진을 보는가?’라고 묻는다. 수잔 손택이 우리에게 경계하라고 말하는 것은 재빠르고 편안한 연민이다.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주는 셈이다. 따라서 연민은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오로지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두어야 하는 이유, 그것은 내가 세계를 대하는 방식은 내가 나를 대하는 방식과 같기 때문이다. (혹은 같아야 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우리라는 말을 쓸 때 가슴에 손을 얹고 조심하게 되었다. 뭔가 행동해 줄 수 있을 때에만 (적어도 그러려고 노력할 때) ‘우리’라는 말을 쓸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우리’라는 말을 하는 관계를 늘리는 것, 그것이 내가 이 사회에서 할 일이다.

“책이 당신을 기분 좋게 하는 이유가 뭔가요?” 책은 고독 속에 있으면서도 끝없이 세상과 연결하고 대면할 기회를 갖게 한다는 점 때문이라 우선은 대답하고 싶다. ‘우리는 그 무엇이긴 하지만 전체는 아니기 때문이다’라는 파스칼의 말을 알게 되는 것. 그건 참 기분 좋은 양보다.

http://www.yes24.com/ChYes/ChyesColumnView.aspx?title=005011&cont=2078
정혜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