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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성스러운 침묵에 기초한다.

우리는 소통이 부족하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다. 우리는 소통을 너무 많이 한다. 우리는 침묵이 필요하다.

어떤 신기한 일을 겪은, 사람이 일어나 소리친다. 나는 오늘 이러한 일을 겪었노라!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경탄하고, 외친 자는 자신의 안으로부터 오는 희열에 우쭐해진다.

공감은 중독적이다. 자신이 겪은 일을 누군가 역시 겪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사람은 안도하고 기분좋아한다. 심지어 이미 보편적으로 모두가 공유되고 있다고 알려진 경험조차도 그렇다. 공감하는 것은 진실로 중독적이다. 그것은 아편과도 같다. 중독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해결책을 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렇기에 우리에겐 침묵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비난은 중독적이다. 다른 누군가를 적대시함으로써 비로소 자기 자신을 규정지을 수 있을 때, 그 사람은 불행하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를 비난하고, 그들과 구분지음으로써 스스로를 구분지으려 한다. 구분된 자들끼리는 모인다. 그들끼리는 공감한다. 하지만 그 비난이 왜 나왔는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없이는 그는 불행하다. 

비난만 하면 나의 삶은 저절로 행복해지는가? 공감은 왜 하는가, 비난은 왜 하는가. 둘은 쌍둥이다. 같은 자를 비난하는 자들끼리 모여서 공감하기 때문이다. 비난에는 해결책이 없다. 그런데 비난은 왜 하는가. 쉽기 때문이다. 성찰보다는 비난이 쉽다. 

모른다는 것은 큰 두려움이다. 자신의 삶 주변에서 일어나는 많은 것들을 이해하기 힘들 때, 사람들은 이유를 찾는다. 기독교인의 삶은 평온하다. 모든 것이 신으로 설명된다. 이것은 비꼬는 것도 아니고, 찬양하는 것도 아니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많은 것들이 신의 섭리로 이해된다. 자신에게 찾아오는 불행과 행복이 신으로써 설명되고, 그 행복보다 그것이 설명될 수 있다는 것에 더 안도한다. 이렇게 되지 않으면 그건 기독교인이 아니다.

기독교인이 아닌 자들은 어떻게 하는가, 비난한다. 공감한다. 하지만 나아가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성찰이 필요하고 침묵이 필요하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 타인에게서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로부터 자신을 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침묵, 이다. 

인간의 침묵은 투명하고 밝다. 왜냐하면 인간의 침묵은 어느 순간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말을 솟아나게 하고, 어느 순간에는 그 말을 다시 자기 자신 속으로 흡수하면서 말과 마주 서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말에 의해서 움직여지며 말을 불러 일으키는 풍요한 침묵이다. 인간의 침묵은 낮의 빛에 의해서 환히 밝혀지는 북극지방의 백야와 같다.

성찰함으로써 찾아야 할 대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통속적일 지 모르지만 꿈이다. 꿈은 기독교인에게 신이고 우리에게 이유다. 제일 원인, 원인의 원인을 거슬러 가다보면 도달하게 되는 그 무엇. 그것을 찾기 위해선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자기 자신이 우선하는 가치를 찾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자신에게 충실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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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문단은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로부터 빌려 왔다. 

http://aquavitae.egloos.com/3129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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