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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노숙인의 죽음

어느 노숙인의 죽음 - 살아남은 우리는 누구인가

정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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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14일. 왕십리 뉴타운 3구역 빈집에서 처참하게 부패한 주검 한 구가 발견되었다. 시체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석면 해체 작업을 하던 인부였다. 시체는 담벼락 아래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시체의 목에는 텔레비전 케이블이 감겨 있었다. 시체는 하체 일부만 빼고 살이 심하게 썩었기 때문에 악취를 풍겼다. 시체가 입고 있던 푸른 남방과 양복바지에서 나온 것은 만 원권 지폐 두 장과 버스표 한 장. 그는 썩었기 때문에 지문도 얼굴도 잃었다. 틀니만이 남아 있었다. 인근 주민들은 그를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 누구였을까? 신분증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구두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노숙자였을까? 세입자였을까? 경찰의 추정으론 그는 70대, 자살, 사망 시점은 최소 3주에서 두 달 전. 그가 소주병과 음료수 캔 3개를 남겨놓고 죽은 장소는 철거 예정인 빈집.

우리는 이 시점에서 셜록 홈즈 같은 추리력을 발휘해야 하는가? 하지만 누구의 의뢰로? 누가 그의 죽음을 해명해 달라고 요구할 것인가? 도대체 우리는 누구를 처벌해야 하는가? 그런데 정작 죽어버린 그는 이 모든 것이 해명되길 원하긴 했을까? 그것은 죽어가는 순간 그가 누군가가 구하러 오는 꿈-다급한 구급차 소리, 경찰차 소리, 전화 벨소리, 발자국 소리, 손길을 한번쯤은 기대했었는지에 달려 있을 수도 있다. 어쩌면 버려진 매트리스, 플러그가 뽑혀진 냉장고, 깨진 유리 같은 쓰레기 더미만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고 그 또한 오래전부터 그래왔듯이 무감각하게 자신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도둑고양이들은 그를 봤을 수도 있다. 무심한 밤하늘은 너의 죽음은 정당한 것이라고 말해주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의 죽음이, 비록 자살이라 할지라도, 성급했다 할지라도 그의 인생에 가장 극적인 사건은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결코 되돌아갈 수 없었다.그 무엇에게로도.

이 뉴스를 보도한 한겨레신문은 쪽방촌 노인들과 노숙자들의 죽음에 대해 기획 특집 기사를 덧붙였다. 자살한 70대 노인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을까?

그렇다면 살아남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돌아오지 못할 것을 지켜봐야 하는, 떠나는 것을 지켜보지 못한 점에서 공통 운명인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얼마만큼 자유로울까?) 우리는 그가 누구였든간에 우리는 그가 살아있는 동안 결코 그와 몸을 맞대고 싶어 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의 체취마저도 공기를 오염시키는 더럽고 불길한 병균인 양 잠시 호흡을 멈추려 했을 것이다. 우리는 결코 그와 깊이 알고 지내고 싶어 하지 않았을 것이며, 할 수만 있다면 그를 보이지 않는 인간처럼 다루고 싶어 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에게서 말보다는 침묵을, 고개를 뻣뻣이 드는 것보다는 시선을 내리까는 것을, 내게 다가오는 것보다는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길을 건너오지 않고 조용히 사라질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수치스럽지만 은밀한 안도감을 느끼기도 했을 것이며, 주머니 속의 동전과 지폐 중 어느 것을 내줘야 나 자신의 만족감과 그래도 좀 과하게 후했다는 느낌 사이에서 균형 감각을 유지 할 수 있을까 잠시 계산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그가 혹여 내 아파트 앞을 어슬렁거린다면 불길한 느낌에 몸서리를 쳤을 것이며, 그가 만약 꽃향기를 맡고 있거나 보름달에 넋을 잃고 있거나 사랑 노래에 심취해 있으면 ‘저 사람은 아예 정신이 나가버린 것이 아닐까? 어딘지 비정상적이군!’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배경으로, 햇볕에 그을고 알코올에 찌든 거무튀튀하고 야윈 얼굴을 발견하게 된다면 눈꺼풀 한 번 깜박이는 동안에 우리는 또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을 느끼기도 할 것이다.그 얼굴의 주름살에서 이 도시의 미로들을 보았기 때문이며, 너무도 확연한 무의미를 보았기 때문이며 진정한 모욕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고 그리고 그 모든 것들 때문에 수치심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도시의 삶은 견디기도 외면하기도 벗어나기도 순종하기도 저항하기도 힘들다. 혹시 혼자서라면, 나에게만 해당되는 일이라면 견딜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혼자가 아니지 않은가?

적나라한 빈궁이라는 표현을 쓰는 데는 이유가 있다. 가난을 남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시작된 관습으로 숨겨진 실상의 천분의 일 정도만 보여줄 뿐이지만 여기서 가장 해로운 것은 관찰자가 느끼는 동정 혹은 관찰자가 자신의 냉정함에 대해 스스로 놀라는 마음도 아니다. 그것은 관찰자의 수치심이다. 독일의 대도시에서 극도의 빈곤층은 배고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행인들의 지폐에 의존하는데 그 지폐로 행인들은 수치심으로 상처받는 맨살을 가리고자 노력한다. 이러한 독일의 도시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견디기 힘든 일이다.(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 중에서)

나는 죽어버린 70대 노인의 기사를 읽은 후 수많은 이야기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이를테면 나의 선배는 기초생활수급자들을 결정하는 어느 사회복지사의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나의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모두 자신에게 무엇이 있는가? 즉, 있음을 증명하려 한다. 운전면허증 있음. 아파트 있음, 자가용 있음. 워드프로세서 자격증 있음. 그러나 기초생활수급자로 결정되는 과정은 자신에게 무엇이 없는가? 즉 없음을 증명해야 한다. 자식 없음. 아파트 없음. 돌봐줄 사람 없음. 강아지 없음, 자존감 없음. 그렇게 없음, 없음을 외치다가 존재는 살아있는 동안에도 이미 부재로 몸을 옮겨간다.

나는 그렇게 말하다가 한 사람이 입을, 말을, 근육을, 살을, 시절들을, 사건들을 잃어가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그의 것이었던 것들이 이제는 그의 것이 아닌 것이 되어 간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있긴 있었지만 그건 예전에 그랬었단 뜻이고 지금도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나의 선배는 또 노숙자들과의 대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모든 대화들의 가장 큰 특징은 횡설 수설이었다. 노숙자들은 자신 인생에 일어난 모든 것, 일어난(혹은 일어날) 것으로 추정되는 일들을 닥치는 대로 이야기 하려 한다. 마치 자기가 누구인지에 대해 생각할 수 없게 된 것 같이 말하곤 한다. 이것은 보르헤스의 소설 『기억의 천재 푸네스』에 나오는 푸네스에게 벌어진 일과도 어느 정도 비슷하다. 포도나무에 달려 있는 모든 잎사귀들과 가지들과 포도알들의 수와 1882년 4월 19일 새벽 남쪽 하늘에 떠있던 구름들의 형태와 단 한 차례 본 스페인식 장정의 어떤 책에 있던 줄무늬들과 파도의 물결무늬들과 그 밖에 단 한 차례 본 모든 것들을 기억하는 푸네스는 “나 혼자서 가지고 있는 기억이 세계가 생긴 이래 모든 사람들이 가졌을 법한 기억보다 많을 거예요”라고 말한 뒤 이렇게 덧붙인다.

“나의 기억력은 마치 쓰레기 하치장과도 같지요.”

쓰레기 하치장과도 같은 기억이란 무엇일까? 그 기억들이 쓸모도 의미도 없다는 말일 것이다. 설사 의미가 있다 해도 그 의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삶은 이야기하려 해도 불분명하고 혼란스럽다는, 자신의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삶에 대해서 가장 예리하게 포착한 것은 지그문트 바우만이다. 그는 『쓰레기가 되는 삶들』에서 쿤데라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가 그의 기억 속에 자신이 체험한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다면, 언제라도 과거의 모든 편린을 환기할 수 있다면 그는 인간이 아닐 것이다. 그의 사랑, 그의 우정, 그의 분노, 용서하거나 복수할 수 있는 능력도 그 어떤 것도 우리들과 닮지 않을 것이다.

과연 우리와 노숙자들은 닮지 않았을까? 아직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점에선 완벽하게 닮았다. 우리는 불확실성에서, 그로 인한 우울에서 서로 닮았다. 바우만은 쓰레기가 되는 삶들에서 이런 말을 한다.

우리 모두가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 존재가 버림받고 배제 되고 거부되고 배척되고 부인되고 빼앗기는 것이며 우리가 되고자 하는 바가 거절당하는 것이다, 우리는 난감하고 불행한 상태로 혼자 남겨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친구와 애정과 도움의 손길을 빼앗기는 것을 두려워한다. 우리는 버려지는 것, 쓰레기장으로 갈 차례가 돌아오는 것을 두려워한다. 우리가 가장 절실히 그리워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는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확실성이다.

우리는 우리가 홈리스가 되는 것이나 외롭게 버려진 노인이 되는 것에 상상하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잉여는 어떤가? 잉여에 대해서라면 끊임없이 생각해 보고 있다. 바우만은 잉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잉여라는 개념은 어떤 비정상적인 상태. 이상한 것. 잠깐 건강하지 않게 된 것이나 일시적인 하락 등의 의미와는 완전히 무관한 것이다, 잉여는 그러한 상태가 영원할 것이라는 속삭임이며 그러한 상태가 일상적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 다른 사람들은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당신 없이도 잘 할 수 있고 당신이 없으면 더 잘할 수 있다. 버려져도 무방하기 때문에 버려진 것이다.

그래서 도시의 게임에서 탈락한, 자격증이 부족한, 선수로 더 이상 뛸 수 없는, 인간쓰레기들까지를 포함하는 잉여는 기껏해야 참아줄 만한 대상으로 취급되고, 자비, 자선, 동정의 대상이고, 게으르다고 비난받고, 범죄적 성향이 있다고 의심받고, 권리를 요구하면 뻔뻔하고 몰염치하다고 비난받는다. 누군가 일부러 계획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래서 바우만은 이런 잉여들은 창조물이 아니고 부산물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도시의 이미지는 ‘자기 꼬리를 먹는 뱀’이다. 우리는 안전하기 위해서 우리 같은 사람들을 먹어치우고 있다.

이제 이 도시의 유령들은 산자와 죽은 자 사이를 오가는 드라큘라가 아니고 잉여로서의 인간이고 우리가 ‘우리는 안전하다!’는 확실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유기하고 거부하고 배제하고 외면한 인간들이다. 애드가 앨런 포의 『어셔가의 몰락』에 서 어셔가는 더할 나위 없이 음산한, 심장이 내려앉을 정도로 우울하게 하는 곳이다. 묵직하고 굼뜨고 어슴푸레한 납빛 기운이 도는 그 저택은 곰팡이가 처마에서부터 외벽 전체에 퍼져 있다. 벽돌 하나하나가 삭아가고 있어서 온전하게 서 있는 것이 이상할 정도인 그 어셔가가 마침내 주저앉아 버릴 때 우리는 그 집이 너무나 낡은 탓에 자체 붕괴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산 채로 서둘러 매장해 버린 병약한 쌍둥이 여동생이 마침내 관을 뚫고 벽을 뚫고 흰색 수의를 입은 채로 다시 나와 방문 앞에 서 있었기 때문에 어셔가는 산산이 붕괴되어 호수 깊숙이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도 『어셔가의 몰락』을 읽었을 때의 공포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달빛이 건물 지붕에서 시작해 벽을 타고 지그재그 모양으로 바닥까지 내려와 세세하게 비춘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건물의 균열들이었다. 그리고 한순간 회오리바람이 불 때 보름달이 폭발하고 균열들이 폭발했다. 서둘러 산 채로 매장해버린 쌍둥이 여동생의 이미지는 내 상상 속에서 끝없이 증폭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가 서둘러 쓰레기장으로 보내버린, 우리가 운명을 공유할 수도 있었던 사람들이 바로 그 이미지다. 나 역시 언제든지 여동생의 자리로 갈 수도 있다. 그런데 혹시 우리는 필사적으로 끌어안고 매달릴 수는 없었던 걸까?

바우만은 두 개의 빅브라더, 즉 빅브라더 형제를 소개한다. 즉『1984』의 조지 오웰식, 옛날의 빅브라더들은 사람들을 통합시키고 그것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려 한다. 그런데 오늘날의 빅브라더들은 사람들을 배제시킨다(수많은 CCTV들의 역할이 바로 그것이다).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을 몰아내고 쫓아내고 그들에게 어울리는 곳으로 돌려보고 추방하고 아예 처음부터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작은 빅브라더의 역할이다. 그래서 바우만은 묻는다. 인류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이 두 빅브라더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뿐인가? 포함/배제의 게임이 공통의 인간 생활을 영위하게 하는 유일한 방식인가? 그리고 그러한 게임이 우리가 공유하는 세계가 결과적으로 취하게 될 것이라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형태인가?

나는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다시 또 한번 만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의 비유를 빌리자면 이런 순간에 만날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어린이의 말을 하고 어린이의 생각을 하고 어린이의 판단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렸을 때의 것들을 버렸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사를 읽던 날 오후 나의 다정한 벗은 내게 네루다의 시를 이야기해 주었다. 우리는 우선 ‘돌아가는 사람은 떠난 적이 없다’는 말에 매료되었었고(모든 사람이 돌아온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만나는 풍경을 상상해보라) 그리고는 「죽은 가난한 사람에게」란 시를 읽었다. 그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가난한 사람을 묻는다
우리의 가난하고 가난한 사람

그는 너무도 어렵게 지낸 나머지
그가 사람으로서 인격을 지니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집도 땅도 없었고
알파벳도 이불도
구운 고기도 없었으며
그리하여 여기저기로 노상
옮겨 다녔고 생활의 결핍으로 죽어갔다
죽어갔다 조금씩 조금씩
그게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살아온 삶이다
- 「죽은 가난한 사람에게」 중에서


시의 중반에 이르면 우리는 그 죽은 이의 뼈가 너무 무거운 나머지, 그가 너무 많은 걸 갖지 못했었단 것을 알게 된다. 만일 그의 힘이 계속 쓰였다면 돌을 골라내고 밀을 거두고 땅에 물을 주고 땔나무를 운반했을 텐데. 그래서 우리는 그가 사는 동안 그가 힘을 쓰도록 돕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알게 된다.

이제 우리는 안다 우리가 그에게 주지 않은 모든 걸
우리가 짊어지고 있음을 그리고 때가 늦었음을
마음이 선량한 나의 벗은 이런 가난한 죽음 앞에서 네루다의 또 다른 시 「민중」에 이런 시구가 나옴에 깊이 안도감을 느꼈다. ‘나는 하늘이 이 인간을 감싸서/적절히 구두를 신기고 명예를 회복 시켜주리라 믿는다’
(내 상상 속에서 구두를 신겨주자 헐벗은 발은 서둘러서 뛰어다닐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내가 전율을 느꼈던 시구는 다음의 구절이었다.

그러니 내가 혼자인 것 같거나 혼자가 아닌 것 같거나 할 때
그 누구도 불안해하지 말기를:
나는 친구들이 없지 않으며 또 나는 모든 사람을 위해 말하니


내가 이 구절을 보았을 때 나는 어느 버려진 빈 집의 창문을 떠올렸다. 쓰레기의 잔해가 남아있는 어느 버려진 빈집, 유리창이 뜯겨져 나간 자리에 한 미술가는 검은색 널빤지를 창문 크기에 딱 맞게 댔다. 그리고 수많은 별을 그려 놨다. 멀리서 보면 그 방은 별로 가득한 밤하늘을 향해 열어젖힌 창과도 같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면 우리가 별로 생각했던 것은 별이 아니었다. 검은 널빤지에 뚫린 수많은 구멍들이었다. 그렇다면 별빛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구멍을 통해 햇살이 들어와 별같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 순간 구멍은 숨구멍이었다. 그 구멍을 통해 보이는 것은 바깥, 외부였다. 꽃과 하늘과 돌멩이와 흙, 그리고 더운 날 시원한 바람이 불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계단에 앉아 해가 지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피곤해질 때까지 자신의 몸으로 삶을 살아내고자 하는 사람들, 별과 우주와 하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빛이 오고 있었다. 바깥으로 뚫린 구멍은 쓰레기 더미의 빈집과 세상의 경계를 없애 버렸다. 이것이 삶을 향한 창의 이미지다. 인간은 인간의 품이 아닌 다른 곳에서 빛을 찾을 수도 없고, 혼자서는 안전해질 수도 없고, 결국 우리는 끝없이 타인을 찾아 헤맨다는 것을 난 버려진 빈집 창문 구멍에 눈을 대고 알았다. 어떤 곳은 어둡고 어떤 곳은 밝았다. 어둠이 밝은 것을 명백하게 했다. 그런데 이 도시 서울이 빈집이라면 구멍은 노인의 시체인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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