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모토바나나, 하치의 마지막 연인
그때부터 나는 말로 설명하지 않기로 하였다. 하염없이, 하염없이 설명하면 내 혈관으로 흐르는 피까지 알아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나의 생각의 안이함은, 실제 나이보다 늙어 보이는 내가 쓸쓸한 내 육체로부터 전 우주를 향하여 발신한 유일한 어린 마음이었다. 그때 나는 비로소 어른으로 홀로서기를 하였고, 내 혼과 사랑에 빠졌다.
단 한 순간이라도 자기 자신과 농밀한 사랑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삶에 대한 증오는 사라진다. 고마워요,하치. 그렇게 소중한 것을 가르쳐 준 일, 평생 잊지 않을게요. 설사 사이가 나빠져서 말조차 걸지 않게 되더라도, 서로를 미워하게 되더라도, 그 일에 대한 감사는 지우지 않을게요.
열 다섯 살 나는 굳게 결심하였다.--- p. 26
'그렇게 열심히 그리다니, 그거야말로 재능이로군' 한참을 보고 있던 하치가 말했다.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아무도 나한테 크레파스와 하얀 종이를 주지 않았던 나날, 할머니가 내 안에서 보았던 것, 그것은 하치란 단계를 거쳐 비로소 나의 뇌에서 손으로 흘러나오는 물이었다. 나는 그때 갑자기, 지금껏 막연하게 좋다는 느낌이 아니라, 정말로 그려볼까, 하고 처음으로 생각하였다.
그렇다는걸 몰랐다. 매일 아침이 다르다니. 처음이었다. 햇빛에 손이 빛나고 그런 일들을 유심히 바라보다니, 신기했다.--- pp.48-50
굳이 말을 하지 않고서도 조화로울 수 있었다. 잠들기 전에 한 사람이 물을 끓이면, 한 사람이 주전자에 차잎을 넣었다. 밖으로 나가고 싶을 때와, 그냥 집에 있고 싶을 때도 일치하였다. 만약 여기에 장래성이란 것이 개입한다면 나는 끔찍하여 숨을 쉬는 것마저 고통스러워질 것이다. 사랑의 생활은 유배지로 모습을 바꿀 것이다. 하지만 우리한테는 기한이 있고, 그것은 외로움보다 완벽함에 연결되어 있었다.--- p.64-65
그 과거의 느낌을 분명하게 말하고 싶어서, 그 기분을 뜨겁게 가슴에 간직하고, 검푸른 초원같은 추억의 향에 직실해 죽고 싶다. 타오르는 햇볕속, 온통 보리밭을 상상하며, 걸어 사라진다. 끝없이 하치에게로 이어지는 길을. 친밀했던 모두에게 성실하게 작별을 고하고, 마침 적당한 어느 여름날에, 나는 죽고 싶다.--- p.137
... 이런 시간이 조금씩 늘어나, 나는 하치를 잊지는 않지만, 잊으리라. 슬프지만, 멋진 일이다. 그렇게 생각한다.--- p.142
웃는 얼굴을 다시 한 번 보고 싶다. 차례로 옷을 벗고 또 그것을 개는 모습을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보고 싶다. 우는 모습까지도 보고 싶지만, 울면 너무 슬프다. 그런 마음만이 사랑이다. 어떤 사람이고 무슨 일을 하고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그 모든 것이 결국은 웃는 얼굴 안에 들어있다. 다시 한 번 마주 보고 싶고, 만져 보고 싶고, 웃고 싶다. 그런 기적이 있고, 앞으로도 있을 수 있다는 것으로 충분하다. 웃는 얼굴이 보고 싶고, 사라지는 눈물 방울마저도 보고 싶다. 너무도 투명하고 예쁘니까. 그리고 두 번 다시 눈가에서 빛나지 않을 수 있으니까. '지금이 지금밖에 없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 연애'라는, 아주 당연한 것을 나는 그를 통해서 처음 알았다. 왕국
사소한 것에 의미부여 하지 않고, 우연에 쉽게 설레지않고, 직시하고 변화하며 지키고 간직하며 살아있을 것.
2010/12/10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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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창작품이다. 그래서 사랑은 우리들 자신을 완전히 주어버려야 하는 그 어떤 구체적인 존재를 찾는 일이 아니라, 말하자면 일종의 자기만족감 (Vergnuegen/ plaisir)인 것 이다. (...) 그 사람에게 품게 되는 걷잡을 수 없는 열정, 하지만 이내 그 사람이 나에게 완전히 속해있지 않다는 사실 혹은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속해있다는 사실이 불러일으키는 질투, 이 질투가 눈뜨게 만드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알고 싶다는 참을 수 없는 호기심, 지독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호기심이 가져다주는 광적인 관찰 (Interesse), 그 관찰들이 가져다주는 그 어떤 지적인 만족감 (intelligente B efriedigung) - 사랑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M. 프루스트, 'Jean Santeuil'
당신이 곁에 없으면, 당신의 모습은 점점 더 커져서 , 온 우주를 다 채운다. 당신은 올올이 풀어져 공기 처럼 흐르다 사라져서 유령이 되어 버린다. 당신이 곁에 있으면, 당신의 모습은 점점 더 작아지면서 수축한다. 무거운 철물처럼, 납덩이처럼 딱딱하게 농 축된다. 그 납덩이는 내 가슴으로 떨어지고 나는 그 무게를 못 이겨서 죽고 만다.
M. 유르세나르, ‘불꽃 (Feu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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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히로시, 사랑이 뭐야? 사랑이란 거…… 정말 있다고 생각해? ……우리, 인생의 아주 작은 부분, 섹슈얼한 욕망과 미모 추구, 공통의 관심, 계급상의 이해 및 동류의식을 갖는 것, 노후의 타산 따위를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있던 건 아닐까? 앗, 아니면, 사랑이란 원래 그런 걸까? 아니면, 진정한 사랑은 그런 게 아니지만 오늘날에는 그런 것들이 사랑의 왕좌를 빼앗아 대신하는 걸까?
하지만 히로시, 화내지 말아줘. 나, 너랑 잤을 때, 케이 때처럼 기쁘지는 않았어.
그렇다면 결국, 그 케이와의 일은 역시 나의 사랑이었을까? 그거야말로 진짜 사랑이었던 걸까? 그것을 케이는 왜 몰라줬을까? 게다가, 이런 것과 케이가 늘 말하던 민중에 대한 사랑은 별개인 걸까? 한 인간의 사랑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인간을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런데 너는 왜,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 걸까…….”
아래 사진, 소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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