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새학기 들어 예술의 인식론과 비트겐슈타인으로 강의실 안을 온통 공포로 몰아넣고 있었다. 강의를 하다 보면 학생들의 눈이 곤혹과 고통의 표정을 보이다가 흐리멍덩해지곤 했다. 내 관심사는 무엇을 가르치느냐보다 어떻게 학생들을 이해시키느냐에 집중되어 있었다. 예술에 있어서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를 이리저리 생각하고 있는데 거실에서 피아노 뚜껑이 열리고 의자를 잡아끄는 소리가 들렸다. 나스타샤가 피아노를 치려나 보다. 선율 고를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나는 연필을 내려놓고 방문을 열었다. 창문 틈으로 제법 차가운 바람이 들어온다. 사과나무 가지가 앙상하다. 그 가지들은 열매와 새들로 여름 내내 처져 있었다. 열매들은 사과의 향기를 마당에 남겨놓은 채로 이제는 모두 떨어졌다. 사과나무는 어떤 새가 오갔는지 알까? 모를 것이다. 가지가 전보다 가벼워진 것은 알 것이다. 여름의 노래는 끝났다. 길고 혹독한 눈의 겨울을 견뎌야 한다.
영국 모음곡이다. 나는 기대에 찬다. 나스타샤는 천천히 연주하기 시작한다. 음악 소리는 계단을 타고 방 안으로 울린다. 집 전체가 악기가 된 듯하다. 피아노 소리에 맞춰 집 전체가 같이 춤춘다. 집은 나스타샤와 나를 싣고 느리고 예스럽고 우아한 춤을 추고 있고 나는 음의 물결 속에 잠겨 있다. 내가 꿈속에 잠겨있는 것이 틀림없다. 글렌굴드홀에서 이런 소리를 들었었다. 나스타샤는 세련되고 자신 있게 아름다운 연주를 하고 있다. 가보트(Gavotte)에 이르고 있다. 매혹적인 가보트의 선율이 파고들듯이 방 안으로 스며들어 온다. 간소하면서도 아름다운 선율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듯이 이어지는 옛 시절의 아름다움이. 커다란 위안이.
나는 일어섰고 이끌리듯이 걸어 나갔다. 그리고 계단에 앉아서 얼굴을 무릎에 묻었다. 낭랑하지만 가슴을 파고드는 느리고 슬픈 선율들이 계단을 채우고 2층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초연하지만 서정적이고, 잔잔한 기쁨이지만 다시 슬픔이 되는 그 선율들이. 나는 눈을 감고 모든 생각을 몰아냈다. 가슴이 조여지는 감동이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고 있었다.
이 삶이 무의미하고 덧없다 해도 이것 하나만으로도 살아갈 가치가 있게 만들어주는 기쁨, 흘러간 시간과 앞으로 올 모든 시간이 마치 이 순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듯한 그 설렘, 영원조차도 순간에 고정시키는 감동, 인간인 나에 대한 감사와 헌사, 운명이 주었던 외로움과 고투에 대한 보람. 이것들이 거실에서 울리고 있었다.
나는 행복했다. 행복감으로 가슴이 조여왔다. 나스타샤가 내게 무엇이고 우리의 운명이 어떻게 된다 한들 지금 이 순간이면 족했다. 지금 이 한순간만으로도 운명과 신에 대해 감사할 이유가 충분했다. 나의 과거의 인생이 지옥이었고 미래의 삶이 어떠한 것이 된다 해도 이 순간은 영원이었다. 공간에 응축된 모든 시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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