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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담 : 호모 와쿠우스, 호명될 수 없는 삶에 대하여

호모 와쿠우스*, 호명될 수 없는 삶에 대하여



출처 : 월간 <현대문학> 2011년 7월호

참석자 : 강정(시인, 뮤지션), 김소연(시인), 심보선(시인, 사회학자), 신해욱(시인), 박준석(문학평론가)

일시 : 2011년 5월 5일

장소 : 홍대 앞

정리 : 김소연, 신해욱


몇 년 사이 시대와 세대에 대한, 사회에 대한, 그리고 문학에 대한 여러 가지 호명이 들려왔다. 루저, 백수, 은둔형 외톨이 같은 말이 유독 또렷하게 들렸다. 일면 수긍되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 다만, 불편함이 가시지 않았다. 이 호명들에는 어떤지 ‘사회적으로 약속된 중요한 무언가가 결여된 존재’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듯 했다. 그 부정적 결여에만 초점이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다른 각도의 호명은 없을까 둘러보다가 ‘공터’에 눈길이 머물렀다. 공터. 비어있음으로써만 의미있는 장소. 쓸모에 노출되는 순간 훼손되는 장소. 마찬가지로 호명되지 않음으로써 가치를 잃지 않는 세계, 혹은 태도가 있지 않을까. 이 만남은 ‘공터’를 생각하는 마음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우리는 '공터'의 삶을 사는 우리를 '호모 와쿠우스'라고 일단 불러보기로 했다. 그리고 자신의 문학과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5월 5일, 아이들이 와글거리는 따뜻한 오후였다. 의도가 얼마만큼이나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을지는 모른다. 바람이 있다면, 우리와 비슷한 누군가에게 이 대화의 기록이 '공터'와 같은 구실을 할 수 있기를.


글을 쓰는 일과 먹고 사는 일 - 외로움의 공동체


신해욱 - 대충 셈 해보니 우리 나이가 30대 후반에서 40대 중반이다. 그동안 글을 쓰면서 현실적인 고민이나 갈등에 부딪힐 일이 있었을 테니, 그 얘기로 시작하면 어떨까 싶다. 생계 문제라든가, 혹은 문학 공간 안에서의 외로움이라든가. 먼저 박준석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얼마 전 평론으로 등단했지만 오랫동안 소속 없이 제도권 밖에서 지내온 걸로 알고 있다. 먹고 사는 일 속에서 읽고 쓰는 일은 어떤 자리와 어떤 의미를 지니나.

박준석 - 얼결에 글쓰기 공간으로 들어서게 된 거라 아직 글쓰는 의미라 할 만큼 뭔가가 생기지는 않았다. 가끔씩 청탁이라는 원고하청을 받아 납품을 하면서, 이제야 조금씩 조금씩 글쓰기의 의미가 생기고 있다. 말로 꺼낼 만큼 실감이 내려앉지는 않아서, 지금은 내가 감당할 수 있고 감당하고 싶은 범위까지만 쓰고 있는 편이다. 연인이 투고를 권유하지 않았다면 아직도 그냥 도서관 생활자로 지내면서, 남들이 보기에 먹물스런 취향을 가진 채 실없이 속없이 살고 있었을 것이다. 대학에서 제적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정상적인 코스를 밟았을 지도 모르고.

신해욱 - 도서관 생활자의 삶이 외롭지 않았나?

박준석 - 그렇고 그런 뻔한 얘기라 외롭다기보다는 지겨움이 맞겠다. ‘비사교적 사교성’일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날이 갈수록 사회 부적응자처럼 되어 간다. 해가 바뀔수록 제도와는 멀어지고 주변에 남는 사람은 줄어든다. 경제적 기반이 있다면 이런 얘기는 쿨하고 시크한 버전으로 포장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싱글족’이 아닌 도시빈민 가욋사람의 처지에서는, 같이 공부하고 싶으면 돈이 없고, 돈을 마련하는 동안은 같이 공부를 못 한다. 기본 생활을 유지하는 데만 많은 시간이 들어가니까. 동거동락은 남의 얘기일 뿐. 그렇다면 독거독락이라도 튼튼하게 하자고 다짐한다. 십 수년 이런 생활을 이어가니 지겹다. 지겹지만, 계속 지겨울 테니 지루하지 않게라도 하자고 몸을 다잡는 편이다.

김소연 - 지금 20대 문학지망생들은 문학을 하면서 동시에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이게 가능한 일일까 이 문제에 다 봉착되어 있다. 꿈꾸는 일을 하는 것과 먹고 사는 일을 병행할 수 있을까에 대한 불안들. 둘 간의 거리조절에 소비되는 피곤을 어떻게 할 것이냐. 혼자서 외딴 길을 가고 있다는 그 외로움을 어떻게 견딜 것이냐. 두 가지 모두를 멋지게 조화시킬 수 있다고 말하기보다는, 그 모순과 아이러니가 더 멋진 문학을 가능하게 한다고 그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강정 - 예전에 직장 나갈 때 야근도 많고 이리저리 시달릴 일이 많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철야를 하면서 잠깐 텀이 생겼다. 일종의 업무 대기 상태였는데, 그때 시를 썼다. 작정해서 쓴 것이 아니라 문득 시간이 비니까 뭐가 생각이 나서 쓰게 됐었다. 한 시간 정도에 시를 세 편이나 썼다. 그럴 때 시간이 평시와는 전혀 다른 물성을 갖는다는 걸 느꼈다. 몸 안에 숨어있는 다른 시계가 작동하는 것 같았다. 내가 내 세상으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이리저리 끌려 다니기만 하다가, 내가 주체적으로 무엇을 했다는 기분이 들면서 잠이 싹 달아났었다. 그 이후로 직장 다니면서 시간이 없어서 못 쓴다, 는 둥의 핑계는 엄살이나 푸념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시간이 남아서 쓰는 게 아니라 씀으로써 없던 시간이 만들어지는 거다. 자기가 정말 그걸 하고 싶은 거라면 그것을 통해 자신만의 시간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런저런 사소한 욕심들에 휘둘리다 보니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미련만 더해지는 거다. 자꾸 남 눈치를 보게 되는 거고. 자신의 진짜 의지와 욕망에 충실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여건이나 성과 따위 곁눈질하지 않고 스스로에게 집중할 수 있다. 자기 재능을 제대로 연마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약간 귀도 멀고 눈도 멀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신해욱 - 그런 점에서는 시라는 장르의 심플함이 특히 좋은 것 같다. 하지만 다른 장르의 경우에는 제약이 좀 더 많지 않을까?

강정 - 음악이나 미술, 영화 같은 것들을 하는 친구들 경우를 보건대 기본적으로 나이를 먹으면 그 일에만 몰두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특수한 성공 사례 몇몇을 빼고는 일단 벌이가 안되니까. 그러다가 생각이 바뀌게 되고, 좌절하게 되고, 심지어는 그것과 이혼한 사람처럼 구는 경우도 있는데, 문학은 그럴 이유가 상대적으로 적다. 여러 현실적인 제약이야 당연히 존재하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자기집중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심보선 - 카프카는, 직장 때문에 미치겠다, 글을 쓸 시간이 필요하다, 고 항상 한탄했다. 그런 싸움은 어느 작가에게나 있다. 랑시에르의 글을 읽다 보니 과거에 글을 쓰려고 하는 노동자들이 자살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자살 자체가 어떻게 보면 일종의 저항이라는 거다. 나도 회의하면서 들락날락하면서 시를 쓴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싸움이 언제나 성공하지는 않는다. 극단적인 경우, 자살로 이르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 싸움이 그나마 힘을 얻기 위해서는 같은 싸움을 하는 다른 친구들이 있거나 동지가 있거나 보이지 않는 또는 보이는 지지나 인정이 있어야한다. 사람들이 더 고통스러울 때에는 완전히 고립되어 있을 때이다. 왜냐하면 고립되어 있을 때에는 자신의 열정이나 의지에 자신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신해욱 - 그렇게 고립되는 시간이 길어질 경우 보통은 체념하거나 원망한다. 슬프지만, 세상의 대부분은 그런 보통 사람이고 나도 그 중의 하나일 거다. 나는 문학 옆에 계속 있고 싶어서 대학도 대학원도 국문학과를 갔는데, 만약 여건이 허락되지 않아 문학이라는 제도, 학교라는 제도, 이런 울타리 안에 있지 않았다면 금방 떨려나갔을 것 같다. 바깥의 시선에 연연하며 경쟁하고 승리하고 인정받기 위해 지금보다 훨씬 더 혈안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고. 자괴감이 든다. 강인한 영혼이라면 이 외로움을 뚫고 위대하게 실패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히겠지.

김소연 - 나는 그것 때문에 책을 읽은 것 같다. 예를 들면 카프카의 일기라든가. 카프카도 이랬는데 이 정도 내가 겪는 것쯤이야. 이런 식으로 동지를 찾아내기 위해서.

심보선 - 책 속의 등장인물들과도 일종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의 비극적 삶과 동일시를 하면서.

신해욱 - 두 종류의 공동체가 있는 것 같다. 사람이 나약하면 사악해질 수가 있는데, 어떤 공동체는 그 나약함을 몰아세워 나약함이 사악해지도록 채찍질한다. 그런데 어떤 공동체는 나약한 인간들이 그 나약함 때문에 사악해지지 않을 수 있도록 보호해준다. 책을 통해 얻은 어떤 친구들은 나에게 두 번째 종류의 공동체를 만들어준다.

강정 - 고립감이나 나약함은 등단하고 이십 년 삼십 년 지난 사람들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자살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고. 자살이라는 것을 사회학적으로 어떻게 부풀려 규정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나의 특별한 이유만으로 자살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때로는 누군가의 자살에서 아무런 현실적인 이유도 발견되지 않을 때도 있다. 자살을 추문으로 만드는 건 전적으로 언론이나 인터넷 찌질이들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복합적인 것들이 개인을 옥죄다가 순간적인 압력이 팽창하면서 벌어지는 일일 텐데 누구나 그런 충동은 한두 번쯤 겪어봤을 거다. 하지만 그 단계를 지났을 때 어떤 한계를 통과한 기분이 든다. 사회적인 통과제도가 아닌 자기 자신을 통과하게 되는 거다. 그랬을 때 글의 순도도 높아질 것이다. 카프카 이야기도 했지만 한 개인이 글을 쓴다는 건 여러 가지 사회적 심리적 맥락과 갈등들을 스스로 감내해내야 하는 순간들의 집적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럴 때 외로움 따위 한없이 깊어져도 상관없다는 생각마저 든다. 홀로 고독한 가운데 세계만방과 교류한다는 신선한 착각이 들 때도 있다. 그건 개인의 영혼 속에서 진자 운동하는 천국과 지옥의 내통이다. 그렇지 않고 자꾸만 외부의 평가와 인정 따위에 연연하다 보면 글 쓰는 힘을 더 빼앗기고 스스로 추루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외로움도 참 괜찮은 보약이다.

김소연 - 그게 내가 불편한 것 중 하나이다. 내 시를 통해서 나를 느껴본 사람들이 그렇게 외로워서 어떻게 사냐고 묻곤 한다. '외롭다'라는 말을 맞지만, '어떻게 사느냐'는 그 걱정은 틀렸다. 외로움을 확보하는 순간 오히려 나는 더 힘이 생긴다.

강정 - 그렇다. 자기 둥지가 튼튼해지는 느낌이 드는 그런 순간이 있다.

김소연 - 외롭지 않은 순간에 놓였을 때는 내 영혼에 흠집이 가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내가 외로운 순간에는 난 외롭지만 내 영혼은 탄력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외로움이라는 것이 참 괜찮은 탄성으로 작용된다.

박준석 - 한국 사회는 갈수록 감정들 사이의 밀착도가 심해진다는 느낌이다. 사회의 경직성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외로우면 슬픈가? 실패는 곧 패배인가? 영원한 어린이들의 세상이 아니라면, 이런 것들은 어렵지 않게 구별될 수 있다. 그런데 외로움 그러면 촤르륵 덧붙어 제시되는 정서각본이 있어야 ‘한국적’이다. 누군가의 감정에 공감한다면서 정서 파도로 휩쓸어버려, 난감하고 느끼하고 오글거리던 경우가 참 많지 않던가. 김소연의 얘기를 내 식대로 풀어 보면, 한정식 반찬과 절밥 반찬 같다는 느낌이다. 김소연의 외로움은 양념 하나로 나물을 무치는 절밥 반찬같은 담박한 외로움인데, 사람들은 온갖 양념을 버무린 한정식 반찬으로 받아들인다.

심보선 - 김소연의 외로움은 김소연이 만들어나가는 서사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김소연 - 심보선의 슬픔, 이것도 마찬가지다. '슬픔'이라고 하면, 일단 부정적인 감정인 것처럼 정서의 각본대로 기우는데, 구분을 정확히 하고 정색할 때에 슬픔의 세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만날 수 있다. 거리조절도 할 수 있고 자기 영혼을 돌본다는 것도 뭔지 알 수도 있다.

신해욱 - 다만 일종의 담백한 맛으로서의 외로움과 아예 맛이고 뭐고도 없이 버려져 있는 황폐함 혹은 황량함은 좀 다르지 않을까.

심보선 - 그런 종류의 황폐한 외로움은 다른 열패감과 버무려진다. 나는 루저다, 나는 잉여다 하는 그런 부정적 감정들과. 그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이, 외로우면 외로울수록 고립되면 고립될수록 좋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 같다.



글 쓰는 일의 동력 - 딴 사람 되기


김소연 - 87년 6월항쟁 때 다 같이 스크럼을 짜고 앉아있을 때, 뭔가 굉장한 염증을 느끼고 벌떡 일어났다. 집에 갔는데 왠지 모르게 처절하게 슬펐던 기억이 있다. 버스로 한 시간 정도 가야 하는 거리를 걸어서 집에 갔다. 걸으면서 생각했다. 뭔가에 골똘했다. 집 근처에 이르렀을 때, 나는 시를 써야겠다 생각했다. 연대 안하기 위해서, 연대 안하고 연대하기 위해서 시를 찾아낸 것 같다. 내가 아는 방법들 중에선 그럴 수 있었던 게 시였다. 지금도 내겐 글을 쓰고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의미다.

강정 - 연대 안 하면서 연대하는 것. 이것은 내가 어릴 때부터 언어로 개념화하지는 못했지만 본능적으로 느꼈던 방식인 것 같다. 남자 중고등학생들 하는 짓들이 빤한데, 어릴 때 나는 그렇게 어울려 다니면서도 괜히 그들하고 놀기 싫었던 때가 많았다. 그들이랑 같은 생각을 하는 게 싫었던 거다. 그래서 괜히 삐딱선 타면서 혼자 음악 듣고 혼자 책방 가서 이런 저런 책들 뒤적이다가 혼자 끼적이기 시작한 것이 글쓰기의 시작이었다. 시를 쓴다 문학을 한다 이런 개념은 없었고, 그냥 이걸 하면 멋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혼자 골몰하다 비슷한 패거리가 생기면 잠깐 어울렸다가 또 따로 놀고.(웃음) 그런 기질은 지금도 여전하다.

박준석 - 나는 글쓰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기회가 없어서라기보다는 글보다 말, 몸이 우선이었다. 평론을 택한 것은 시나 소설과는 다르게 창조성이 없어도 가능한 분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은 없는 세상을 열어주는 사람은 다 시인이라고 본다. 누구보다 앞서서 이후에 해석이 되거나 되지 않을 것들을 세상에 던져놓는 사람이 시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시인이 아니고, 시가 던져놓는 대단한 은유를 지금은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한다. 물론, 은유나 상징은 그대로 놔둬서 고갈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커서도 그렇고. 평론은 시나 소설의 특이성을 환원하거나 요약하지 않는 방식으로 일반화하는 작업에 가깝다. 평론이 시와 소설의 경쟁서사로서, 멋진 이종격투기를 벌여주기만 해도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강정 - 일반적인 패턴과는 양태가 다른 생각이나 언어들이 나한테서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꾸준히 하고 있다. 그리고 그게 자꾸 글을 쓰게 하는데, 그 기저가 변할 땐 더 이상 문학을 안 해도 된다는 생각은 늘 갖고 있다. 이 나이에 별 대안은 없지만 남은 인생 어거지로 문학에 목매고 싶은 생각 또한 별로 없다. 시에 목숨을 걸겠다 그런 생각은 어렸을 때 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여하간 지금은 그렇다. 누가 왜 시를 쓰십니까, 하면 나는 약 먹는 거다, 라고 말한다. 나를 힘 있게 해주는 약.

신해욱 - 마음강장제?

강정 - 그렇다. 마음강장제 같은 거. 어린 시절 처음 시에 빠져 있을 때에는 시를 한동안 못쓰면 밤길을 못 다녔다. 온갖 것이 무서워졌었다. 그러다가 시를 좀 쓰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무서울 것이 없어지고. 어릴 때 시인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기 보다는,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살더라도 시는 쓰고 있을 것 같은 막연한 예감이 있었다. 지금까지 그것 때문에 시를 써왔던 거고. 지금도 시와 멀어졌다는 자각이 들면 내가 추해지는 느낌이다. 물리적으로 쓰고 있고 안 쓰고 있고, 를 떠나서 시의 감을 잃으면 추해진다는 느낌이 확실하게 온다. 그럴 땐 누가 와서 나를 죽여줬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한다. 문학에 목 매기 싫다는 얘기와는 조금 모순되게 들리겠지만, 그 모순 자체가 최근 나의 본성이고 기운인 것 같다. 그러니 결국 그게 그 얘기다.

신해욱 - 나는 오랫동안 못 쓰고 있거나 마음이 멀어져 있으면 갑자기 늙었다는 느낌, 쭈글쭈글해지는 느낌이 든다. 나한테는 마음보톡스인가 보다.(웃음)

박준석 - 나는 '잡히면 죽는다'가 삶의 모토 가운데 하나다. 아무리 잡으려고 해도 붙잡히지 않고, 잡았나 하면 다른 곳에 가 있는 삶. 그런 태도가 생활양식으로 내려앉게 노력을 하는 편이다. 안 그러면 허영이나 기만에 다름 아닐 테니까. 오늘 여기 네 사람도 몇 년 뒤에 나를 만나면 누군지 못 알아봤으면 좋겠다. 글쓰기가 그걸 가능하게 해 주길 바란다.

심보선 - 김수영이 이런 말을 했다. "딴 사람의 시같이 될 것이다. 딴 사람 참 좋은 말이다. 나는 이 말에 입을 맞춘다." 딴 사람-되기가 시의 본질인 것 같다. 나는 시를 쓸 때 내가 쓸 수 없는 걸 쓴다. 나는 단 한 번도 시를 쓰면서 난 쓸 수 있다, 라고 자신 있게 생각한 적이 없다. 딴사람이 나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한다.



어떤 나에 대한 상상 - '나'라는 위화감과의 교감


강정 - 실제로 존재하는 내가 있다고 했을 때, 그가 극복 못하거나 한계치가 있는 것을 글로 풀어 넘어서는 거다. 그래서 나는 늘 내 시는 픽션이라고 생각한다. 또는 살아보지 않은 삶 또는 앞으로 살게 될 것 같은 삶에 대한 하나의 시나리오다. 그것이 밖으로 표출되면서 기존의 세계와 또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 ‘다른 나’가 존재하게 된다. 일종의 가면이지만 이게 그냥 그대로 나의 삶에 흡수될 수 있는 거고 내가 실제로 그것에 따라 변화하게 될 수도 있는 거다. 그러니까 내가 내 시에 대해 계획을 하고 판단을 하는 것은 내 스스로에게 궁극적인 거짓말을 하는 거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때문에 이 시가 무엇을 의미하냐는 질문들은 내겐 오히려 지독히 반문학적인 태도라 여겨진다. 시인이나 작가는 문학의 궁극적인 의미와 기능에 대해 선험적으로 무지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나를 넘어선 나를 지향하는 거니까. 내가 당신이 될 수도 있는 거고 그가 될 수도 있는 거니까. 그런 여러 가지 시점들이 한순간에 엮여져서 나오는 게 시다.

심보선 - 랑시에르가 말하길 글 쓰는 나와 시 안의 화자 사이에 ‘그’라는 타율성을 개입하는 것, 이것이 문학의 정치라고 했다. 여기서 ‘그’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사람, 쓸 수 없는 것을 쓰는 사람이다. 나를 넘어서는 타자이다. 이 타자-되기, 탈정체화, 이것이 문학의 정치이다.

강정 - 시 쓰는 게 약 먹는 것 같다는 말도 그런 뜻이다. 존재가 확장되는 거니까. 마약 때리는 것도 감각이 확장되는 건데, 들뢰즈의 ‘~되기’ 같은 것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쿵푸를 보면 학권, 당랑권, 묘권, 사권 같은 것들이 있다. 요컨대 인간이 짐승의 동작을 흉내 내는 거다. 그러면 인간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신체적인 한계를 넘어가게 된다. 자기 힘을 내처 지르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힘을 역이용하는 것이 무술의 기본이다. 내가 실제로 갖고 있는 힘보다 외부의 힘을 온몸으로 받아 되돌려줄 때에는 그 힘이 몇 배로 팽창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다른 존재가 된다. 그건 일종의 관계의 미학이자, 모든 사물의 본성과 직결된 물리학에 가깝다. 시도 똑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내가 확장되는 거고 일상적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몰랐던 것들이 시를 쓰면서 문득 보이게 되는 거고 그걸 써서 누군가한테 보여주는 거고 그 사람은 또 자신의 세계로 그 시에 관여하게 되는 거다.

박준석 - 쟝 자끄 상뻬가 그린 시위장면이 있다. 정치적 구호를 앞세우고 군중들이 행진을 하고 있는데, 거기서 몇 걸음 비켜선 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나는 온 몸이 아프다’는 피켓을 들고 있다. 이 그림을 봤을 때 정말 나를 잘 표현해주는구나 싶었다. 내 삶의 바탕에는 늘 위화감이 있었다. 나이가 들어서는 그 위화감을 아이러니라고 이해하고 있다. 위화감을 안고 사는 사람에게는, 연대하지 않는 방식으로 연대하기는 공적 주제에 가깝고, 연대하는 방식으로 연대하지 않기는 사적 주제가 된다. 애써 개인들이 벌리고 뚫어놓은 차이를 너무 쉽게 무화하고 봉합해버리는 그 ‘한국적’인 끈끈함 앞에서, 내 피켓에는 뭐라 쓰면 좋을까. 그런 고민을 많이 한다.

김소연 - 내가 꿈꾸는 '나'는 내게 언제나 위화감을 준다. 그 위화감이 동력이 되어 싸움을 걸거나 교감을 형성하는 게 글쓰기의 근원인지도 모른다.

강정 - 인간이란 누구나 우주 안에 순간적으로 떨어진 존재일 텐데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몫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에 충실한 사람이라면 그러한 법리를 몸으로 깨우치고 있을 것이고 그 감을 유지할 수 있을 때 진정한 멋진 인간이 탄생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사라질 텐데 그러나 그 사라짐까지도 같이 느끼는 존재. 그럴 땐 죽음마저도 청명해질 거라고 생각한다. 존재가 가장 멋있게 발산할 때 죽음이 끼어드는 거니까.

신해욱 - 강정과 비슷한 생각을 하다가 나는 다른 고민을 하게도 된다. 나는 나르시스트가 되는 것이 꿈이다. 내가 나를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데 이게 일종의 연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거다. 배우도 나고 관객도 나다. 나는 배우로서 나를 연기하고 관객인 나에게 잘 보이고 싶어한다. 물론 큰 불만은 배우인 나의 연기가 관객인 나의 눈에 잘 차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불만스런 마음조차도, 남들한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속물적 욕망과 어떻게 다른지 헷갈린다.

강정 - 속물이라기보다는 그건 누구나 갖고 있을 허영 아닌가. 그런 허영이 없으면 예술은 출발하지 않을 거다. 그러면서 자기 문답을 계속 하게 되는 거고.

심보선 -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이 속물이 되는 걸 못 견딜 것이다. 거기서 또 다른 연기가 시작된다. 부정의 부정의 부정...... 무대로 치면 무대 안에 무대가 있고 무대 안에 또 무대가 있는 겹겹의 무대라고 할 수 있다.

박준석 - 연행演行이 갖고 있는 가능성에 주목하는 연극 인문학이 있다. 수행성을 통해 도달하는 주체 형식을 생각해 보자. 꼭 니체가 아니어도 많은 사람들이 한 얘기지만, 가면을 썼는데 나중에 가면을 벗고 나도, 그 뒤에 아무 것도 없다. 가면을 쓰면 속물인가. 연행이 일관되게 계속되면 그것이 그 사람이 되고 자아는 납작하게 될 것이다. 그 때 진정성 따위는 그냥 형식으로 남는다고 생각한다.

강정 - 배우들이 연기연습을 할 때 이런 케이스가 있다. 거울을 안 보는 것. 왜냐면 예쁜 표정을 지으려고 하니까. 연기의 기본 전제는, 자신이 연기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려야 한다는 점이다. 글을 쓰면서 나는 그걸 느낄 때가 있다. 내가 만약 무대에 서있다고 한다면 내가 관객을 보는 시선이 있고 관객이 나한테 들어오는 시선이라는 것이 동시에 교차한다. 그러다 문득 그 두개의 겹이 지워지면서 내가 저 관객 뒤에서 객석 뒤에서 그 전체를 보고 있는 시선도 분명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건 이를테면 연출의 시선이다. 그 세 개의 시선을 동시에 아우를 수 있을 때 내가 내 글에 대해서도 적당한 거리가 생기게 된다. 내가 무언가를 할 때 무언가를 한다는 것을 잊고 ‘무엇’ 그 자체가 되는 것. 그러고는 다시 그 ‘무엇’을 잊는 것이 중요하다. 요컨대 거울 뒤쪽에 칠해진 수은을 뚫고 스스로 풍경이 되는 거다.

김소연 - 아주 어렸을 때부터 거창하진 않지만 '되고 싶은 나'를 꿈꿨는데, 그 되고 싶은 초상화가 계속 바뀌었다. 첨가되거나 삭제되면서 점점 까다로운 주문으로 바뀌더라. 나의 이상형에 근접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하는데도 근접거리는 전혀 좁혀지질 않는다. 이제는 좁혀지지 않는다는 게 안전거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강정 - 그게 사실은 자기 긴장이고 거울일 수도 있는 거다.

신해욱 - 그런데 나는 내가 나를 좋아하고 싶은데 좋아할 수 없는 이 상태가 마치 거울 감옥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 거울 벽이 내가 자기 긴장을 유지하게끔 보호해주기도 하지만, 한발 짝 더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 답답하기도 하다.

김소연 - 난 내가 수감생활을 한다고 생각한지 오래 됐다.(웃음)

강정 - 최근 원고 빚이 많아서 집밖으로 잘 안 나오는데 집에서 원고에 매진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이리저리 구심 없이 엄한 짓만 하다보면 하루가 다 간다. 원고 때문에 실행 못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갈증은 갈증대로 심해지고. 이러면서 이거 감옥이구나, 이런 생각이 든다. 글 쓰는 것 자체가 타성화 되고 중노동으로 느껴지기 시작한 거다. 그래도 사십 넘어서까지 글 쓰는 삶을 살기 위해서 자발적이든 나도 모르게든 물리적으로 포기한 것들에 대한 미련 따윈 여전히 없다. 그게 내가 자부심을 갖는 부분일수도 있는데 단지, 내가 그것을 유지하려면 더 내 안에서 모터를 돌려야 하는 상황이 온 거다. 그것 때문에 무술이야기도 하고 그러는 것이다. 일종의 나르시시즘이 남아 있다면 그 긴장을 계속 유지하고 싶은 거다.



타인의 시선 - 유물과 문향 사이


신해욱 - 시를 쓰고 글을 쓰는 일이 우리 자신 안에서 가지는 의미가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타인들의 시선과 고정관념도 또한 항상 존재한다. 그런 시선을 받을 때 어떤가. 사실 나는 몸둘 바를 모르겠을 때가 많다. 특히 문학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쟤 시인이래, 쟤 글 쓴대, 라는 시선을 받을 때. 또는 넌 먹물이잖아, 이런 말 들을 때.

강정 - 간혹 음악 하는 친구들과 놀다 보면, 책 좀 읽어야 알 것 같은 사안에 대해선 나한테 물어볼 때가 있다. 그런데 사실 나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웃음) 글줄이나 쓰고 책도 내고 사니까 그런 편견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건 이해하지만, 그럴 때마다 외부에서 규정된 어떤 인식틀 안에 휘둘리면서 거기에 맞는 역할놀이를 하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한 기분이 든다. 갑자기 외로워지기도 하고. 대충 무시하고 살아도 되긴 하는데, 어떤 것들이 그런 식으로 나를 간섭하거나 오인할 경우 나는 그 규정지음에 엮이고 싶지 않아서 아닌 척을 하게 되거나 딴 짓을 하게 된다.

김소연 - 외부와 불화하고 사회적 약속에 어눌하고, 알지 못할 것을 안다고 감히 말하거나 아는 것도 모른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때, 시인이라는 이 페르소나가 참 괜찮더라. 미꾸라지가 될 수 있어서.

강정 - 모든 것이 용서될 것 같고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점이 있기는 하다.

심보선 - 그 관용도가 나한테는 자유도랑 비례한다. 내가 사회학자라는 사실 또한 문단에서 특이하게 작용한다. 사회적인 이슈와 관련되면 종종 대담이나 특집에서 나의 글이나 목소리를 원한다. 그럴 때 나는 발언을 할 수 있는 공간이 확보가 된다. 시인이면서 사회학자라는 독특성 때문에 내가 그 장에 불려 들어가는데, 불려 들어가서 나는 언제나 사회학적인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단지 나의 목소리를, 발언을 펼치려 노력한다. 그 장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정체성을 갖지 않은 사람은 그런 묘한 위치 때문에 제약과 자유를 동시에 갖는다.

박준석 - 나는 지식인인가, 나는 먹물인가, 이런 식으로 정체성을 의식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누가 ‘너는 먹물이야’라고 하면 그냥 받아들인다. ‘먹물’에 담긴 경멸과 냉소가 거슬려도 그렇게 한다. 나는 아니거든, 하고 모른 체 하는 것이 편하긴 하지만 놓치는 차원이 있어서다. 사적 영역에서야 이런 외부의 규정은 없는 듯 살면 된다. 그런데 공적 영역에서도 그러다 보면 현장을 잃어버릴 위험에 처한다. ‘먹물’이라는 규정을 감당하는 것이 자기창조가 사적 영역에서 게토화되는 것을 막아준다고 본다. 제도 안에서는 ‘먹물’과 구별되는 지식인 등의 규정이 가능하지만, 제도 밖에서는 선택이 폭이 좁거나 없다. 제도 밖에서는 ‘먹물’의 상대적인 지칭이 지식인이 아니다. ‘먹물’과 대비되는 것은 유물이다.‘먹물’과 유물을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대비라고 보아도 좋다면, 사적 영역 안에서 먹향과 문향의 대비도 종종 생각한다. 제도 안에서라면 누가 먹 냄새가 난다고 코를 막아도, 그것을 피해서 문향이 배게 할 기회가 많다. 대학 같은 제도가 울타리가 되는 셈이고 그 안에서 기회가 배양되니까. 제도 밖에서는 먹 냄새를 피하면 문향을 얻을 기회는 거의 사라진다. 공적 영역에서 현장을 잃지 않아야 하고, 동시에 사적 영역에서 자기창조의 기회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유물은 현장이고 문향은 지향인 셈이다. 그러기 위해서 ‘먹물’이라는 딱지를 굳이 사양하지는 않았다.

강정 - 믿기지 않겠지만,(웃음) 공부라는 단어를 내가 굉장히 좋아한다. 물론 학과 공부와는 조금 다른 개념이다. 어릴 적 남들 공부할 때 내가 무엇을 했나 생각해 보면 혼자 책을 많이 봤었다. 책 보고 끼적대고 그랬다. 그런 태도가 아직까지 지속되고 있다. 공부를 하되 이상한 공부(?)를 했다고 할 수 있겠다. ‘工夫’를 중국식으로 읽으면 쿵푸다. 문무를 겸비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중국 사람들한테는 무술을 수련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공부였다. 아까 유물이란 단어가 나왔는데, 나는 그걸 실제적인 삶의 현장이라 이해한다. 거기에서 부딪치는 여러 가지 일들, 사건, 갈등, 그 과정에서 몸을 써야 하는 순간들이 매번 있다. 극단적일 때에는 그것이 물리적인 폭력이 될 수도 있을 거다. 아무튼 어떤 갈등과 마주쳤는데, 내가 상대를 말로 설득시키거나 합의를 볼 수 있는 상황 말고, 상대를 정당하게 받아쳐서 죽여야 하는 상황도 분명히 존재할 수 있다. 나는 그 순간을 제대로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이 가장 올바르기도 하고 미학적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관점에서 유물과 문향, 그것들이 총체적으로 함께 움직이는 상태가 되는 게 중요하다. 나의 삶 전체와 관련된 고양감, 그리고 확신 같은 것을 얻기 위해 문무를 겸비할 수 있다면 그건 나에게 가장 정당하고 아름다운 일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심보선 - 전적으로 동감한다. 박준석이 말한 문향과 유물 사이를 계속 왕복운동 하는 것, 이 둘 사이의 거리를 조절하는 것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정체성은 외적인 규정이나 내적인 본질 둘 모두를 벗어난다. 결국 이렇게 만들어지는 정체성이라는 것은 계속 정체성을 깨트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정체성인 동시에 탈정체성이다.

강정 - 목수나 농사를 오래 지으신 분들을 보면 자연의 흐름이나 사물의 원리 같은 것들을 몸으로 체득하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양반들인데 문득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어떤 말을 던질 때, 비단 그 분야의 문제가 아니라 삶 전체에 대해 한 마디를 흘린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물론 그 양반들은 자신들이 그러고 있는 지조차 모른다. 그저 육체적으로 명징하게 체득하고만 있을 뿐이다. 그런 걸 볼 땐 정말 모든 지식이 하찮게 여겨진다.

심보선 - 나는 그것이 영혼이라고 생각한다.

강정 - 그렇다. 영혼이다. 우주를 꿰고 있는 거다, 그 법칙을. 일부러, 개념적으로 깨우치려 해서가 아니라 삶 자체에 몰두하고 그 안에 자신을 풀어놓음으로써 획득되는 궁극의 진심이라고 할까. 무엇을 하건 간에 자신의 신심, 영혼을 담아서 한다면 그런 깨우침이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한다.

심보선 - 내가 어떤 식당에서 겪은 일이다. 식당에 갔는데 주인아주머니와 남편이 대낮부터 소주를 기울이고 있었다. 분위기가 칙칙했다. 느낌이 묘해 귀를 기울였다. 그러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문을 박차고 들어오더니 형님, 뭐하십니까? 일 안나오고! 이러는 거다. 알고 보니 주인아저씨가 건설현장 일용직 노동자인데 나이 어린 십장하고 싸운 거다. 자존심이 상해 집에 와 버린 거다. 동생이라는 사람이 와서 설득을 한다. 지금 자존심 문제냐, 먹고 사는 게 문제지. 자존심과 먹고 사는 문제가 부딪히는 거다. 이 때 이 주인 아줌마가 남편에게 뭐라고 했느냐면, 당신이 일을 안 나가는 건 영혼을 낭비하는 거야, 그랬다. 여기서 영혼의 문제가 개입을 한다. 자존심 문제도 아니고 생계의 문제도 아니다. 일을 해라, 그런데 그건 먹고 살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자존심의 문제도 아니고 네 영혼의 문제다. 그말이다. 이것이 거리조절이다. 현장에 있지만 동시에 현장과 멀리한다. 왜냐면 나는 영혼으로 영혼의 운동으로 노동을 하는 거니까.

신해욱 - 현장에 있지만 동시에 현장을 멀리한다는 것. 나는 그것이 현장을 새로 만드는 일, 혹은 판 자체를 스스로 짜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미 짜여져 있는 판에 들어가는 것은 상대적으로 수월하다. 혹은 그 판에 끼지 않고 멀찍이서 관망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러나 거기서는 영혼이 움직이지 않을 거다. 내가 있을 자리를 내가 스스로 만드는 것이 정말 어려우면서도 아름다운 일인 것 같다.

박준석 - 영혼을 살찌우는 자리?

신해욱 - 그렇다. 영혼을 살찌우는 자리.



철듦의 문제- 책임을 진다, 그러나 방식은 다르다


김소연 - 영혼을 살찌우는 자리......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사회가 철들지 않았다라고 종용한다는 생각이 든다.

강정 - 문학 안에서 ‘성숙’을 논할 때 옳은 가치는 성숙이고 미성숙은 옳지 못한 가치라는 식의 구분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때마다 이러면 문학 참 재미없겠다,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예전엔 장난처럼 지껄였던 내 삶의 모토가 ‘철들면 지옥이지’였다. 그러다 최근엔 조금 바뀌었다. ‘지옥에서 즐겁게’로.(웃음)

김소연 - 나는 사람들이 하는 '철들다'는 말이 책임진다는 의미로 와닿는다. 이를테면 장남들은 부모를 책임지고 그런 문제. 나는 최선을 다해서 책임질 영역을 좁히면서 살아온 편이다. 한편, 책임을 져야 할 최소한의 것에는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이젠 그나마의 '철'도 내려놓고 싶다. 내가 쓴 글도 책임지고 싶지 않고 내 인생도 책임지고 싶지 않다. 철들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뻔뻔함으로 이동 중인 것 같다.

심보선 - 그게 만족스러운 상태인 거 아닌가?

김소연 - 그렇지는 않다. 그냥 지금은 그래보고 싶다는 거다. 계속 이동하니까 나도 나를 모른다, 사실은.

심보선 - 나는 좀 다른 것 같다. 어떤 경우에는, 관계에 연루되는 것, 책임지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이 없다. 나의 여동생이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전화해서 이야기를 하고, 그래서 내 동생이 상태가 좋아지면 난 만족감을 느낀다. 어머니가 기분이 안 좋으시면, 어머니와 이야기를 한다. 나는 장남으로서 오빠로서, 선생으로서 뭐뭐로서 해야한다는 것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내가 소위 책임을 행사하는 방식은 다른 장남이나 선생들과는 좀 다르다. 나의 고유한 책임 수행이 있고 연루가 있다고 믿는다. 나는 그 관계 속으로 자발적으로 들어간다. 소위 책임 수행의 매뉴얼이 있다고 하자. 선생, 자식으로서 일반적으로 지키는 책임 수행의 매뉴얼. 그런데 나는 내가 지키는 매뉴얼이 있다.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가르치려 들지 말 것, 권위적이지 말 것, 항상 평등할 것, 이런 식이다. 나에게 성숙이라는 것은 내가 믿는 가치와 신념들 속에서 내가 책임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게 나에게 성숙이다. 나는 책임과 의무를 구분하고 싶다. 책임은 내가 그 관계 속에서 무언가를 할 때 내가 중요하다고 믿는 가치와 신념을 따르는 것이다. 반면에 의무는 가치와 신념과 무관하게 지키고 따르는 일반적 준칙들이다.

박준석 - 세상이 요구하는 철듦의 기준이 있다. 그 기준 밖으로 나가게 되면 그 기준들이 오히려 잘 보인다. 가령, 이런 경우. 경제적으로 쪼들리는데, 귀한 분을 모신 모임자리에서 식사대접을 하게 된다. 하루종일 준비해 정성만 가득한 차림을 내놓으면, 나중에 어떻게 그런 볼품없는 대접을 하냐는 군말과 아직도 철이 안 들었네 라는 뒷말을 듣게 되더라. 그런 경험에 자주 노출되면서, 철드는 것에도 자격요건이 있다고 우기기로 했다. 경제적 여유만 연관되지는 않지만, 그 기준에 비추면 나는 철들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니 자격도 없는 나에게 철듦을 요구하지 말라고 하고 다닌다. 사회가 요구하거나 남들이 요구하는 철듦을 나도 지키고 싶은데, 그런 조건이 아무래도 안 되니 어쩌겠나. 열과 성을 다 해도 돌아오는 것은 쟤 아직도 철이 없네, 사람노릇 언제 할래, 라는 말이라서, 나는 그냥 철듦을 일찍부터 포기해 버렸다.

강정 - 철든다는 말 자체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이나 규정이 피곤할 따름이다. 자신에 대해서든 세계에 대해서든 자기 나름의 철리를 깨닫는 게 진짜 철드는 거라고 생각한다.

김소연 - 카프카의 일기를 엿보고 우리가 견딜 수 있는 부분이 생겼던 것처럼, 성숙을 좀 꿈꿀 수 있게 할 전범이 혹시 있을까.

심보선 - 카프카나 그런 사람들은 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런 전범이나 대타자가 나는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난 모르겠다, 하지만 난 계속해서 답을 구한다, 이런 사람이 나의 표본이다. 계속 질문하고 노력하는 사람. 나는 답을 안다고 말하는 사람은 견딜 수 없다.

강정 - 갑자기 벌거벗은 임금님이라는 우화가 생각난다. 사물이나 사태에 대해 정확하게 바라보고 명쾌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 나는 그게 어쩌면 진짜 성숙한 사람이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대한민국 사회에 그런 사람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실제로 만났던 사람 중에서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차원에서 지금 문득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는데, 누군지 얘기해도 다들 모를 거다. 유명한 임금님이 아니라 이름도 알 수 없는 아이에 가까운 사람들이니까.(웃음)

심보선 - 나는 별별 직업의 다양한 사람들을 찾아가 인터뷰를 자주 하는데, 인터뷰이들에게서 많이 배운다. 눈에 띌 리 없는 사람들 중에, 그냥 삶으로 보여주는 사람들이 참 많다. 그 사람들은 나에게 이렇게 살아라, 라고 하지 않는다.


우리들의 키워드 - 뒷모습


강정 - 물리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쾌락을 추구하려 했다. 연대하지 않는 것으로 연대하는 것, 그것 자체도 쾌락과 관련 있다.‘그들’이 옳건 그르건, 그들의 반대를 지향하면서 느끼게 되는 쾌락도 있는 거다. 세상의 모든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반항심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그들’에게 동의하는 순간 나의 색깔을 전혀 내지 못하고 내 생각이 없어질 것 같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 역시 일종의 자기도취다. 스스로 만들고 스스로 충족해나가는 데에서 쾌감을 느끼는 거니까. 반대를 위한 반대일 수도 있지만 어떨 때는 그런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들 안에 있기 싫은 것. 그러면서 그들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는 것. 내가 그들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에게 오게 만드는 것. 그런 게임이랄까. 무의식중에 그런 걸 즐겼던 것 같다. 무언가를 열렬히 반대하는 행위 자체에서 또 다른 윤리가 생긴다는 느낌도 들었고. 이를테면 포지셔닝을 바꿈으로써 새로운 각이 형성되고 그 안에서 조금 다른 세계가 탄생하는 거라고 믿었고, 믿고 있다.

심보선 - 허먼 멜빌의 「바틀비」에 보면 I would not prefer to가 아니라 I would prefer not to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게 흥미롭다고 바틀비 번역한 선생님이 말했다. not to를 would한다는 것이다. ~하지 않는 것을 원한다라는 거다. ~하기 싫다가 아니라. 이 둘 사이에는 아주 중요한 차이가 있다. 견지하고 끝까지 끌고 가는 거다. 그 ‘아니오’의 태도를.

강정 - 어떤 의미에서 나는 반민주적(?)인 인간인 것 같다.(웃음) 민주주의 정말 짜증난다. 소수라도 의견이 있을 것이고 어쩌면 그 소수의 의견이 정확할 수도 있는데 비록 현실적으론 완패했더라도 어떤 통념이나 법칙에 의해 묵살된 것들이 가지고 있을 법한 숨은 가치에 대해 염탐 해보는 거고 돌이켜보는 거다. 그런 의미의 반대를 했다. 일종의 비뚤어진 권력의지일 수도 있는데, 통상의 흐름과는 또 다른 힘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싶은 것이다.

심보선 - 반대를 행하는 사람이 있을 때 하나의 상태는 절대로 고정되지 않는다. 반대하는 사람들 때문에. 설사 합의로 인해서 어떤 것을 하기로 결정했을 때조차 반대자의 이견이 그 합의에 대해 계속해서 회의하게 한다. 그게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는 그런 의미에서 견고한 합의체일 수 없다.

신해욱 - 민주주의라는 말을 들으니 문학과 정치에 관한 몇몇 논의들이 떠오른다. 나는 문학의 정치성보다는 차라리 반정치의 윤리랄까 미학 같은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정치영역 안에 들어가면 정치라는 말을 넓은 의미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어느 지점에서든 동의가 구해져야 하고 합의점이 찾아져야 하지 않나. 심보선은 합의를 회의하게 하는 반대자의 의견까지를 포함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했는데, 그럴 경우에도 합의는 일종의 미래적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현실에서는 완벽한 합의가 불가능하지만, 불가능함을 무릅쓰고 그런 합의를 꿈꾸게 하는 동력이 여전히 작동하는 세계. 그런 세계가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좋은 공동체일 거다. 그리고 이 이상적(?) 공동체의 눈으로 보면, 공동체의 실제적 합의를 끝까지 반대하는 자의 존재가 오히려 더 나은 공동체를 견인하도록 만들 수 있다.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 하지만 단독자의 관점으로 보면,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해 방법적으로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 나의 카오스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 등을 돌리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등을 돌리는 것을 나는 반정치적 지향이라 생각한다. 결과적으로는 정치적 파장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하더라도.

강정 - 민주주의라는 말은 농담처럼 꺼낸 건데.(웃음) 정치는 하나의 제도 이전에 인간이 살아가는 본능 중 하나다. 기본적으로 내가 너 못 죽이면 내가 죽어, 이것부터 정치가 시작되는 거니까. 정치학이라는 범주를 따로 두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문학을 하고자하는 본능과 욕망도 그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김소연 - 나는 줏대가 사나울 정도로 과잉된 사람에 속한다. 그 줏대에 굵직한 무언가가 있다기보다는 자잘하게 메뉴얼들로 꽉 차 있다. 줏대를 자잘한 메뉴얼로 채우고 있다보면 반대할 일이 많아진다. 공동체를 만들고 공동의견을 만들어낼 때에도, 나의 줏대들의 어느 세밀한 메뉴얼 한두 가지를 버리면서까지 합의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도대체 연대를 할 수가 없는 거다. 그냥 혼자 시를 써서 세상에 내놓는 게 내게 가장 잘 어울린다. 혹시 속마음으로 연대할 사람이 어디 있지 않나 세상에 보이지 않는 외침을 하는 거다. 강정의 반대가 일종의 의견표명이라면 나는 반대를 안하고 그냥 돌아앉아버리기. 그러고는 꼭 시를 쓰기.

심보선 - 중요한 것이 등을 보인다는 점이다. 뒷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은 사실 선물 주기이다. 뒷모습을 보지 못하는, 하지만 뒷모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뒷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건 내가 이 판을 장악하겠다는 힘도 욕망도 아니다. 왜냐하면 장악하려면 뒷모습을 갖고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김소연 - 내가 살면서 몇 안 되게 누군가의 카리스마에 장악된 적이 있다면, 누군가의 뒷모습에 장악되었는데? (웃음)

심보선 - 그 때 그 장악됨은 내가 당신에게 복종하겠다, 라는 방식이 아니다. 왜냐하면 뒷모습은 가장 슬프고 연약한 모습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어떻게 굴복이 되는가. 매혹될지언정.

김소연 - 내 삶의 의식적인 키워드는 '줏대'였지만, 무의식적 키워드는 아마도 '뒷모습'일 것 같다. 뒷모습을 보이며 돌아앉아 시를 쓰고, 뒷모습에 매료되어 시를 쓰고.



나를 매료시킨 존재들 - 혹은 우리들의 잠재태


신해욱 - 구체적으로, 자기 마음속에 깊게 박혀 있는 상(像)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문학이든 뭐든.

강정 - 어릴 때부터 도스토예프스키를 굉장히 좋아했다. 중3때 『죄와 벌』이 추리소설인 줄 알고 읽기 시작했다.(웃음) 이상한 세계로 빨려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대표 장편들은 두루 읽게 됐다. 그런데 라스콜리니코프는 좀 찐따 같아서 매력을 못 느꼈다. 『악령』에선 스타브로긴이나 키릴로프 같은 인물들에 ‘뻑’갔었다. 그들의 ‘다크 포스’에 완전히 맛간 거다.(웃음) 그러다 『백치』를 읽었는데 더 멋있는 사람이 나오더라고. 미쉬킨 공작이라고 말 그대로 백치 같은 인물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인물을 만들 때 염두에 두었던 그리스도에 가장 근접한 인물이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막내 알료샤가 성인이 된 캐릭터라고 보면 된다. 미쉬킨은 단순히 선하다 착하다 순진하다 라고 이야기할 수 없는 존재다. 실질적으로 해를 당하거나 여자를 뺐기거나 그 어떤 폭력이나 악덕을 겪고도 그 너머의 지점에서 혼자 울고 혼자 웃을 줄 아는 사람이다. 궁극의 가장 아름다운 인간형이 여기에 있구나, 라고 느꼈었다. 니체의 위버멘쉬(Ubermench)도 그런 유형의 인간이라 이해한다. 단순한 문학 텍스트로만 파악하는 게 아니라 내 삶이, 나라는 인간이 거기까지 지향할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지금도 한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인물이 있을 건데, 하나만 이야기하자면 이십대 초반에 외국의 패션잡지에서 봤던 광고사진이미지다. 그랜드 캐년 같은 곳에 어떤 남자가 가만히 서 있다. 폼을 잡고 있는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가만히 서 있다. 그걸 보면서 서늘한 바람 속에 서 있고 싶다, 그러면서 잊을 것을 잊고 멀리 바라볼 것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상(像)이 20년 넘게 뇌리에 박혀있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되는 건 정말 어렵더라.(웃음)

심보선 - 나는 토마스 하디의 『이름 없는 주드 』의 주드를 좋아한다. 주드에게도 멀리 바라봄이 있다. 자기가 사는 시골동네에서 저 멀리 대도시 크라이스트민스터에 있는 대학의 아득한 불빛을 바라본다. 그런데 주드는 계속 실패한다. 실패하는데 계속 추구한다. 이 사람이 나한테는 일종의 영웅이다. 주드는, 궁핍, 비참, 편견, 이런 것에 떠밀려서 결국 크라이스트민스터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다. 돌아오는 날은 마침 축제가 있는 날이다. 대학생들이 학위 가운을 입고 거리행진을 하는 날 돌아온 거다. 그러니 얼마나 열패감에 젖어있겠는가. 그런데 주드가 거리에서 사람들 앞에서 일장연설을 한다. 내가 실패한 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라 가난 때문이다. 가장 연설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 아무도 귀 기울여 듣지 않을 그런 비천한 자가 연설을 하는 거다. 자기가 속하지 않은 자리에서 연설하는 자. 자기가 속하지 않는 것을 향해 계속 추구하고 궁극적으로 실패하는 자. 그가 나의 영웅이다.

신해욱 - 심보선은 영웅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나의 경우는 딱히 영웅이라고 하기에는 뭐하지만 여하튼 요즘 최승자 시인을 많이 생각한다. 한국이라는 사회의 안전장치 안으로 들어서지 않은 그분의 시간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내가 감히 갈 수 없는 저기까지 갔구나. 내가 감히 머물 수 없는 저기에 머무는구나. 직접 만난 적은 없으니 주위에서 들은 이야기나 글로 읽은 것이 전부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나 역시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으면 마음이 설레는데, 강정과는 좀 다른 맥락이다. 그의 소설에는 원조 히키코모리들이 꽤 많이 나오는데, 어떻게 이런 걸 썼지? 싶다.

강정 - 자기 혼자 세상을 만들어가려고 하는 망상가들 말인가. 사실, 그런 거 흉내 내다가 글 쓰게 됐다. 까까머리 고등학생이 뭘 안다고.(웃음)

신해욱 - 세계를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인데 한편으로는 그 세계에 푹 빠져 있으니 자기밖에는 안 보인다. 얘는 완전 또라이잖아, 라는 생각이 곧바로 들 만큼 적나라하다. 외설이 되기 직전까지 밀어붙이는데, 그 어딘가에서 개그를 보는 것 같은 착각도 든다.

강정 - 그런 유형의 인물들이 실제로 많이 존재했다. 사드 같은 사람도 그렇고. 문학을 통해 세계의 극한이 어디인지 갈 데까지 가보자 하는 욕망을 실천하는 사람들인 거다.

김소연 - 집 책꽂이에서 「어린왕자」를 읽은 것이 초등학교 때였다. 거기에 나오는 좋은 구절은 사실 초등학생이어서 의미를 잘 몰랐고, 사막 그림 같은 것에 매료되었던 게 까마득한 첫 기억이다. 그 다음 시기에는 쥘 베른 것들. 여기가 아닌 낯선 공간을 상상할 수 있어 좋았다. 낯선 공간에서, 처음부터 다시 사는 인물의 서사에 지금도 관심이 많다. 표류기에 속하는 것들. 난파를 당하고 살아남아, 새로운 질서로 새롭고 이상한 삶을 꾸려나가는데 그게 가장 이상적인 삶에 가까운. 거기는 꼭 폐허 같기도 하고 이상향 같기도 하다. 나에게 가장 사랑하는 시인을 꼽으라 하면 늘 오래 생각하다 결국 김종삼을 말한다. 김종삼이 바라본 세계가 좋다. 그 세계의 여운. 현실감각은 아닌 어떤 다른 것.

강정 - 내 상상력의 근원을 돌이킬 때 스스로 꼽는 책 두 권이 있다. 『2001 우주 스페이스 오디세이』와 『캣피플』. 둘 다 영화로도 나왔는데 중학교 때 소설로 읽은 적이 있다. 그 두 작품 모두 존재의 변형, 다른 주체, 제3의 존재, 이런 걸 다루고 있다. 일종의 SF나 기담의 형식이지만, 나는 SF가 과학을 통해 과학 너머의 세계, 그러니까 초이성에 관한 상상이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내가 있으니까 우주가 있는 거지, 우주가 있어서 내가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죽고 나서 이 우주가 어떤 것인지 어떻게 작용하는 지 어떻게 알겠는가. 실존하는 동안 스스로 꿈꿔 보는 우주의 비밀 같은 게 내 문학의 영원한 화두인지 모른다. 현세적 기준으로 봤을 때 내가 없으면 우주도 없는 거 아닌가. 그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그럼에도 엄연히 존재할 수 있는 세계를 들여다보는 게 SF의 진짜 역할이라 생각한다.

박준석 - 소설 속의 인물은 아니고, 헨리 다거라고 아웃사이더 아티스트가 있다. 최근 몇 년 간 내가 끊임없이 상상하는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다. 보이지 않던, 그저 살아가는 듯 여겨졌을 사람에게 아무도 모르는 삶이 있었다. 그 사람이 죽고 나서 집주인이 방청소를 하러 갔는데, 방문을 열었더니 수 십 년에 걸친 어마무지한 작품들이 집안에 가득 있는 거다. 그는 자신의 삶을 <비현실의 제국에서>라는 작품으로 만들어버렸다. 헨리 다거 같은 인물도 자기계발적으로 읽어내어 소비할 것 같은 수상한 시절이니 자세한 소개는 아끼고 싶다. 나는 헨리 다거의 방 사진을 보면서 그가 그 긴 세월동안 그 방에서 보낸 삶을 상상한다. 요즘은 그가 죽고 나서야 발견되었다는 것, 그래서 실은 동시대는 그를 결코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김소연 - 헨리 다거 같은 인물을 발견하기 이전에는 어땠나?

박준석 - 내게 가장 중요한 자기 규율 중 하나는 내상 방지이다. 도시빈민 생활을 계속 하다보면 내상을 입으면 치명적이다. 사는 게 희생인 사람들에게 희생이 더 이상 그럴듯한 가치가 될 수 없듯이, 내상을 입으면서도 튼튼한 일상을 꿋꿋이 꾸려간다는 환상은 일찌감치 버리는 것이 좋다. 지나고 나면 어찌할 수 없게 꼬인 성격만 남는 것을 자주 봤다. 내게는 헨리 다거가 지나칠 수 없는 준거가 된다. 아마 내가 부르주아 세계에 가까웠다면 프루스트를 자랑스레 꼽았을 것 같지만. 아까 김소연의 '뒷모습'에 관한 얘기가 인상적이어서 그냥 멋대로 끌어오자면, 나는 프루스트의 세상으로 들어가 등 돌리고 헨리 다거를 보는 사람이다.

신해욱 - 그래서 나는 심지가 굳은 영혼들을 자꾸 생각하게 된다. 주위에서 누군가 봐주지 않고 도와주지 않고 오직 혼자서 그냥 헤쳐가야만 하는데, 강한 영혼이기 때문에 자기를 끝까지 지켜나갈 수 있는 이들. 독백 속에 방치되어도 견뎌내는 이들.

박준석 - 크리스티안 문주의 영화 <4개월, 3주... 그리고 2일>를 보면 주인공의 주변에 민폐 캐릭터들이 가득하다. 계속해서 주인공의 삶을 꼬이게 만든다. 어떤 평론가가 이 영화의 진짜 교훈은 ‘친구를 잘 사귀자’라고 한 적이 있는데, 나도 그 말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렇게만 말하고 끝내지는 못하겠다. 이 영화는 주인공이 친구를 잘 사귈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 결국 그런 친구를 사귈 수밖에 없는 구조를 보여준다. 나는 그런 영혼들이 묻어 들어가 있는 전체 이미지에 더 맘이 쏠린다.

심보선 - 나는 그것을 영웅이라고 말했고 신해욱은 강한 영혼이라고 했고 박준석은 이미지라고 했다. 영웅이나 강한 영혼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이 비범하거나 출중한 사람들일 필요는 없다. 스피노자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한다. 거미한테 가장 어려운 것은 거미줄을 안 뽑는 거라고. 그들에게는 추구하지 않는 것이 가장 어려운 것일 수도 있다.

강정 - 미쉬킨 공작이 아름답다고 생각을 했던 것은 그가 정말 강하기 때문에, 힘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겪는 삶의 여러 가지 한계와 극악한 조건들에 대해서 물결을 잘 탔다는 의미다. 물살 속에서 허우적대다가도 그 힘의 반동을 이용해 고개를 들고 웃을 수 있는 사람인 거다. 그런 점에서 심보선 말에 공감한다. 멋있고 강력한 존재가 있어서 그걸 따라하고 싶은 거라면 그러한 의식 자체가 그걸 못하게 만든다. 자기도 모르게 자꾸 힘이 들어가게 될 거고.

신해욱 - 그럼 나는 자꾸 힘이 들어가는 경우일 텐데, 결국 그러니까 특별한 영혼들이 있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한다. 물결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그 힘의 반동을 이용해 고개를 드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싶은 거지. 앞에 나왔던 이야기를 잠깐 다시 꺼내면, 연대하지 않는 연대라도 가능하려면 직접적이지 않더라도 누군가 내 손을 잡고, 나의 동지가 되어준다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럴 때 보통 사람은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고 선한 의지를 발동시킬 수 있다. 그런데 누군가와 손잡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내 의지를 밀고 나가다 보면 외적으로 볼 때 실패와 마주하게 된다.

김소연 - 실패는 아니고 극단적인 코너까지 가는.

신해욱 - 맞다. 자기를 코너로 몰고 나갈 수 있는 힘. 그런 것은 환경에 의해서만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심보선 - 눈앞에 펼쳐진 대양 같은 세계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거기서 어떤 사람이 튀어나온다. 특별한 영혼이라고 하는 이 사람들은 나한테 일종의 파도다. 그 사람이 그렇게 타고나서가 아니라 전체의 물결 속에서 어떤 파도들이 높게 솟구치고 잦아들고 하는 것과 같다.

신해욱 - 익명적인 것 중에 우연히 솟구친 걸까?

심보선 - 물론 파도를 만들려고 하는 의지가 있다. 물방울들의 움직임이 있다. 사람 안에도 수많은 물방울들이 움직인다. 물방울이 움직이려고 하고 솟구치려고 하는 그런 의지에 의해 파도가 만들어진다.

김소연 - 누군가가 어떤 인물이 되는 것은 굳센 자기의지의 소산이라기보다는 선택의 순간에서 선택하는 태도, 그 태도를 낳는 환경이 중요하다. 태도와 환경의 차이들이 종국엔 어떤 인물을 만든다.

신해욱 - 선택, 선택, 선택. 이렇게 계속되는 선택 속에서 사실 지치게 된다. 그런데도 지치지 않고 끝까지 선택을 지속하는 데에는 천성과 본성도 작용한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김소연 - 갑남을녀 중에서 굳센 느낌을 주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굳세 보이는 것이지 실제로 정말 굳센 영혼은 없다고 생각한다. 굳센 영혼일수록 내상방지를 위한 자기만의 굳센 노력이 있을 것이다.

신해욱 - 빈곤에 허덕이며 고립되어 있는 경우, 내상방지는 정말 힘들다. 그런데 견디는 이들이 있다. 내가 굳센 영혼이라 한 것은 이런 의미였다. 보호막이 없는 상태에서 나를 끝까지 믿고 견디는 것.

심보선 -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어떤 영혼들에게 감동받고 배우고 그 위에 내 영혼을 겹쳐본다. 감동을 주는 영혼이 있고 아닌 영혼이 있다. 나도 호오가 있다. 하지만 누구나 그런 특별한 영혼이 될 수 있는 잠재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전제가 나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최근 우리 문학에 대해 - 불만과 불안 사이에서


신해욱 - 최근의 우리 문학에서 눈여겨 본 점들에 대해서도 들려주었으면 좋겠다.

박준석 - 출판사 ‘자음과모음’과 KT에서 작가 오디션 같은 기획을 시작했다. 등단제도 개선을 두고 문단 내부에 관심이 있던 사람들이 주춤하는 사이에 자본이 발빠르게 지형을 바꿔나가고 있다. 김수영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시인의 사명은 시인을 발견하는 거라고. 어떻게 작가가 되는가라는 질문에 못지않게 작가는 어떻게 이어지는가라는 질문도 중요하다.

김소연 - 우리 문단의 등단절차가 낡은 방식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 대안이 결국 텔레비전 쇼프로 따라하기로밖에 갈 수 없느냐 싶어, 제도를 바꾸려는 태도는 좋으나 상상력의 빈곤을 느낀다.

강정 - 문단이라는 말, 어떨 땐 쓰기도 싫고 듣기도 싫다. 미리 정해진 커리큘럼 안에서 진행된다는 생각이 들 때면 이거 자체도 하나의 학교가 아닌가 하는 느낌인 거다. 그 지긋지긋한 학교 겨우 졸업했더니 더 큰 학교에 코 꿰인 거다.(웃음) 반장 부반장도 있고 전학 온 놈도 있고, 잘린 놈도 있고. (웃음) 커다란 학교가 또 움직이고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드니까 자퇴하고 싶은 충동도 종종 느껴진다. 어떤 판에 박힌 룰 안에서 모든 것이 논의되고 이슈가 생산되고 그렇게 지속되어 오는 것 같다. 그런 게 싫어서 시를 썼는데 분위기가 이렇다면 굳이 뭣하러 시를 쓰나 싶은 생각도 든다. 시를 쓰는 나만의 미적 윤리랄까 그런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닐까싶은 거다. 뭔가 정해진 코스로 흘러가는 것이 있으면 비껴가고 다른 물결을 타는 것이 시인이라고 했을 때 같은 방향으로 안전빵으로 유람선 타고 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자기 목소리를 잃어가게 되는 거고 갈고 닦여서 체제가 원하는 인간유형으로 정격화 되고 싶진 않다. 계속 비껴가고 싶을 뿐이다. 유람선 안 좇고 계속 수영이나 해야지.(웃음)

김소연 - '비껴간다'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

강정 - 작전이 은근히 쉬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게, 그 유람선을 그냥 잊어버리면 되는 거다. 그렇게 혼자 수영하다 낙오하면 하는 거고 죽을 수 있으면 그냥 죽으면 되는 거지. 그리고 그것 자체가 나의 삶의 내용이자 과정이 되는 거니까 후회할 것도 없다. 유람선 애들이 쟤 왜 저래 그래도 그들 앞에서 내가 당당하게 죽을 수만 있으면 상관이 없는 거니까.

김소연 - 매순간 우리가 또 게으른 면이 있어 멍청하게 있을 때, 유람선이 와서 너그럽게 '태워줄게' 하면 타잖나.

강정 - 그것도 작전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잠깐 올랐다가 밥만 얻어먹고 또 내리면 되니까. 어, 밥맛 별로네, 하면서.(웃음)

신해욱 - 좀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여기 네 사람은 소위 말하는 메이저 출판사에서 시집을 냈다. 번듯하고. 서점에도 깔리고. 문단 안에서 꽤 많은 걸 누린 셈이다.

김소연 - 그것도 유람선을 탄 거다.

강정 - 나는 그것을 길항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것 자체가 싸움이고 게임인 거다. 유람선을 잊자라는 것은 사실 그게 없어서 잊자는 것이 아니니까. 사실 어떤 식으로든 늘 같이 엮이고 마찰이 생기는 건데 그 과정에서 어떤 싸움, 게임을 벌이자는 거다. 사실 유람선에 오르려고 시를 쓰기 시작한 건 아니지 않은가. 나에게는 나만의 목적과 명분이 있다. 내 식대로 강을 건너고 싶은 거다.

박준석 - 시인도 소설가도 다른 상상력으로 새로운 문학 공간을 열어 가는데, 평론가들이 초를 많이 치는 편이다.

김소연 - 나는 문학평론가의 태도를 탓하고 싶지 않다. 사르트르 같은 사람은 자기가 소설도 쓰고 평론도 쓰고 다 했잖는가. 자기 몫만큼 장르불문하며 발언하는 작가가 많았다. 나도 어떤 평론들에 대해 성이 안차면 내가 직접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런 마음으로 드물게 평론에 가까운 글을 쓴다. 그만큼의 범주 안에서 우리는 평론행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박준석 - 평론가들에게 익숙한 지배적이거나 유행하는 비평 양식이 있다. 그걸 환기하기 위해서라도 시인이나 소설가가 비평 공간에 개입할 필요가 있다. 과거를 내다보거나 미래를 돌아보는 다른 시선이 도와주지 않으면, 비평은 현재에 머물러 정체된다. 평론가는 동시대의 이론적 관심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비평 양식이 시인이나 소설가가 하는 평론만큼 자유롭기 힘든 측면이 있다. 나는 시인이나 소설가가 비평 공간에 개입해서 평론가들의 지면을 빼앗는 것을 환영한다.

강정 - 시인들이 평론가처럼 이야기할 수 있는 발언권이 분명 있어야 하고 누가 안준다면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시집 해설의 경우는 기본적으로 타의에 의해서 선택되는 거지만 하나의 기회라고 생각한다. 내가 누군가의 시에 대해서 말꼬리를 붙이는 건데, 그럼으로써 문학에 대한 나의 태도가 드러나고 그것과 관련된 발언을 하게 되는 거다. 시를 바라보는 비평적인 시각이나 언술방식이 너무 관성화 되어 있으니까 나는 시집 해설을 쓰면서 그것을 내 나름대로 바꿔보고 싶은 시도를 모색하게 된다. 시인들끼리니까 가능한 큰 교감의 상태인 거고 그걸 공적으로 노출시킨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좋아하면서도 힘든 말인데, 시인은 모두 형제라고 랭보가 그랬다. 핏줄이 땡기면 마음이 얼마나 힘든가. 힘든데도 기꺼이 말을 하고 싶어지고. 누가 전화해서 나 힘들어 죽겠어, 하는 얘기를 들어주는 게 서로 편하지만은 않지만 기분 좋기도 한 것과 비슷한 것 같다.

박준석 - 가끔씩이지만 청탁을 받을 때 충분히 공대 받는다고 느낀다. 그럼에도 청탁이 원고하청인 것도 사실이다. 이미 다 짜여진 상태에서 책이 선별되어서 온다. 그래서 정말 쓰고 싶은 책이 그 책인 것도, 정말 쓰고 싶은 얘기가 그 주제인 것도 아닌 경우가 많다. 지금 하고 있는 작업 하나가 청탁과 상관없이 전체 미발표된 원고로 된 비평집을 쓰는 것이다. 타고난 게으름 탓에 진척이 더딘 것을 형편이 어려워서 그렇다고 정신승리 중이지만.

김소연 - 평론가야말로 청탁에 의한 글쓰기를 방어하고 자기가 쓰고 싶은 것을 쓰는 것에 치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자기를 지키는 데에 굉장히 큰 에너지가 필요할 것 같다.

박준석 - 평론가의 비평보다 시인이나 소설가가 쓴 비평이 더 좋은 경우가 드물지 않다. 그런 비평이 논의의 대상은 되지만 온당하게 인정해 주지 않는 것은 이상하다. 무슨 평론상에 시인이나 소설가가 쓴 평론이 선정된 경우가 있었나 모르겠다.

김소연 - 지나친 필드 나누기도 여전한 우리문학의 징후 중 하나다. 이미 섹터가 견고하게 배후에 있기도 하지만, 장르에 대한 창작자의 자기억압도 심한 것 같다. 나 같은 경우에는 문학에서 공간을 주목하다 보니, 문학하는 우리의 공간, 즉 '판 읽기'를 하게 된다. 내가 사랑하는 이 작가가 이 공간 안에서 이렇게 가고 있구나. 그 영향력은 이렇구나. 그걸 지도처럼 읽는 것을 즐기는 편이다. 내가 갈 수 없는 재미난 길, 어려운 길, 독특한 길에 대해 호기심이 있다 보니, 다른 작가의 행로를 주목하게 된다. 그러니까 실패로 가는 작가들. 혹여, 작품은 실패해도 태도는 멋지게 성공하는 작가들.

심보선 - 등을 돌리는데 등을 반만 돌리는 건가?

김소연 - 황병승 시인은 "나의 진짜는 뒤통순가봐요"라고 했다. 시인은 얼굴이 뒷통수에 있는 것 같다.(웃음).

신해욱 - 김소연은 문학하는 공간의 판 읽기를 즐긴다고 했는데, 요즘의 소감은 어떤가.

김소연 - 최근 몇 년 동안 우리문학의 캐릭터들을 히키코모리, 루저, 백수, 한량, 좋게 말해야 노마드. 이렇게 담론화되곤 했는데, 그게 다는 아닌 거 같다. 실패자를 내세우는 소설들은 대개 위험에 대해 스토리텔링을 한다. 그건 어쩌면, 실패자를 너무 많이 양산해내는 사회구조에 대한 고발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박준석 - 인상비평이라는 비판을 달게 받더라도 한마디 하자면, 요즘 소설들에서는 안으로든 밖으로든 눈치보기가 내면화된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이 든다. 한국적 ‘소설’을 기대하고 읽다 보면 ‘한국적’ 소설인 경우가 많다. 특히, 이른바 ‘젊은 소설’들은 곱게 자란 상처 입은 영혼들의 아름다운 문장이 많아서, 힘들다.

김소연 - 아까 나눈 대화들 중에 철듦에 대한 것이 있었는데, 문학판에서는 철들지 않는 태도를 기본으로 여기면서 화폐처럼 통용되고 부분이 있다. 청춘도 아니고 그 이전의 사춘기. 반성장에 대한 욕망이 더 자주 눈에 띈다. 시에서는 정말 모스부호에 가까운 수사학의 향연이 벌어지고 있는데, 뭣 모르는 것을 뭣 모르기 화법으로 전달하려다 보니 시적 화자가 어려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든다. 이젠 사춘기 이전의 아이다. 시적 화자만 놓고 보면 퇴행인데, 이 퇴행이 어떤 점에선 진화인지 혹은 아닌지, 한가할 때마다 생각하는 중이다.

강정 - 기본적으로 후배 시인들의 삶의 태도가 나랑 많이 다르고 멀어졌구나 하는 전제가, 이제는 생긴 것 같다. 한동안은 그런 것들 때문에 후배들을 만나면 내가 옛날에 진하게 느꼈던 어떤 것들을 은연중에 전달하고 싶고 강요하게 될 때도 있었는데 이제 그게 통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들만의 언어가 있겠거니 하고 좋게 보려고 한다. 이 사람들은 이런 시를 쓰는구나 할 뿐이지, 그 다음엔 생각을 안 하려고 한다. 그럼에도 내 나름의 기준은 여전히 더 튼튼해지는 게 있다. 그들이 쓴 시를 읽다가 치장을 벗고 알몸으로 드러난 것 같은 시가 문득 보일 때, 계속 그런 모습을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시인들이 왜 자꾸 김 대리 박 대리가 되나, 이런 불만은 여전히 있다.(웃음) 시인이 세상 눈치 보기 시작하면 끝장 아닌가.

김소연 - 김 대리가 박 대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 시를 썼는데.

강정 - 그러게 말이다. 김 대리 박 대리가 되었으면 회사를 때려치우든가 시를 때려치워야 하는 거 아닌가.(웃음) 과장 언제 되지, 이런 생각이나 하는 머리로 시가 써질 수 있다면 나로선 불가사의다. 전반적인 풍토에 대한 그런 불만 또는 의구심이 있다. 근데, 이 얘길 시인은 취직하면 안 된다고 알아듣는 사람은 없겠지?(웃음)

심보선 - 불안이 깊어졌다는 이야기일수도 있을 것 같다. 나 같은 경우 오랫동안 <21세기 전망> 동인에서 시집을 안 낸 유일한 사람이었다. 근데 불안하면서도 든든함도 있었다. 그 이유는 언젠가 내 시집원고를 보여줄 수 있는, 내가 시를 썼다고 말할 수 있는, 출판사나 비평가가 아니라, 그런 친구들이, 동료들이, 선배가 있어 든든했다.

강정 - 내 경우엔 학교든 어디든 적응을 잘 못 하고 혼자 많이 떠도는 편인데, 돌이켜보면 혼자여서 더 강했다, 라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혼자라는 것을 즐기기도 하니까. 때로 여럿이 있게 되면 다시 혼자가 되는 것에 대한 불안과 기대가 동시에 생긴다.

심보선 - 또 하나, 당시 동인의 특징은 불안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뭔가를 해보려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이 사람들이 바로 시인이구나 하는 로망이 동인을 겪으며 구축되었다. 요새는 불안 때문에 모이는 것 같다. 서로 괜찮다, 다독거려주려고.

김소연 - 동인의 힘을 받고 우리가 외로웠던 시간을 잘 지낼 수 있긴 했지만, 밖에서 보면 그 동인에 함께 하고 싶었는데 함께 하지 못했던 몇몇 사람들에게는 우리도 패거리 문화로 비쳤고 나중에야 반성이 되기도 했다. 돌아보면 김소월, 윤동주, 이상 모두다 독고다이들이 좋은 시를 썼더라.

심보선 - 그때는 시인들이 불안함에도 불구하고 독고다이로 갈 수 있는 시의 시대, 시정신의 시대가 후광처럼 있었던 거다.

김소연 - 지금은 왜 그 후광이 사라진 걸까.

심보선 - 대량의 공급과잉. 제도, 학교, 잡지의 영향력 때문에 후광이 사라지지 않았을까. 지금은 시인으로서의 자긍심, 나는 시인이다, 라는 존재 증명을 시인이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과 제도에 의해 부여받는 상황이다.



내 문학을 위한 최소 조건


신해욱 - 시간이 많이 지났다. 당신의 문학을 위한 최소 조건, 진담 반 농담 반 섞어 던지며 끝내자.

강정 - 최소 일곱 시간 이상의 숙면. 어제 잠을 못 자서 그게 제일 먼저 생각난다.

신해욱 - 플러스 삼십 분의 이불 속.

강정 - 영양식도 필요하다.

심보선 - 나는 연애다, 아니 사랑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뮤즈다.

강정 - 2, 30대 땐 연애가 꽤 중요한 요소였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연애에 관해선 용량 초과, 서버다운 상태다.

박준석 - 연인의 여유시간. 자가발전이 잘 되는 편이지만, 연인이 바쁘면 사는 재미가 반값이 된다. 자가발전이 건전지라면 연인충전은 발전소랄까.

신해욱 - 멍때림.

강정 - 그것도 중요하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김소연 - 낯선 사물이나 낱말들이 많이 있는 이상한 바깥들. 바깥에 나가 히키코모리가 되는 것.

강정 - 배회도 필요하다.

심보선 - 어떤 사물이나 사람들과의 조우들.

신해욱 - 긴 버스와 긴 기차.

김소연 - 적절한 불안도 꼭 필요하다. 이사를 한다거나 욕을 잔뜩 먹었거나 세상 돌아가는 것에 심각한 한숨이 나올 때, 그러니까 정신사나울 때 꼭 시가 써진다.

강정 - 나이 드니까 오퍼레이터도 필요한 것 같다. 글 쓰는 게 이제 중노동이다.(웃음)


* vacuus : 비어있는. blank 혹은 empty에 해당하는 라틴어. 우리가 흔히 쓰는 '바캉스(프랑스어 vacance)'의 어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