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 그릇에서 나왔으나 짠맛을 알지 못했다
절여진 생선도 조려놓은 과일도 아니었다
누구의 입맛에도 맞지 않았고
서성거렸다 꽃이 지는 시간을
빗방울과 빗방울 사이를
가랑비에 젖은 자들은 옷을 벗어두고 떠났다
사이만을 돌아다녔으므로
나는 젖지 않았다 서성거리며
언제나 가뭄이었다
물속에서 젖지 않고
불속에서도 타오르지 않는 자
짙은 어둠에 잠겨 누우면
온몸은 하나의 커다란 귓바퀴가 되었다
쓰다 버린 종이들이
바람에 펄럭이며 날아다니는 소리를
밤새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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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의 끝 무렵, 오르한 파묵의 '새로운 인생' 한 모퉁이를 적어 보냈더니, 진은영싯구 같다고 했었다.
어떤 문장이었는지 왜 그것을 보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마음이 대책없이 일렁이고 덜걱였던 하찮은 슬픔들이 한 사람으로 기억에 남는다. 하고 싶은 말들이 있는데 떠오르지 않는다. 11. 5. 3
심보선, 청춘
거울 속 제 얼굴에 위악의 침을 뱉고서 크게 웃었을 때 자랑처럼 산발을 하고 그녀를 앞질러 뛰어갔을 때 분노에 북받쳐 아버지 멱살을 잡았다가 공포에 떨며 바로 놓았을 때 강건너 모르는 사람들 뚫어지게 노려보며 숱한 결심들을 남발했을 때 한 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는 것을 즐겨 제발 욕해달라고 친구에게빌었을 때 가장 자신 있는 정신의 일부를 떼어내어 완벽한 몸을 빚으려 했을 때 매일 밤 치욕을 우유처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잠들면 꿈의 키가 쑥쑥 자랐을 때 그림자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에서 그 그림자들 거느리고 일생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을 때 사랑한다는 것과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이 같은 말이었을 때 솔직히 말하자면 아프지 않고 멀쩡한 생을 남몰래 흠모했을 때 그러니까 말하자면 너무너무 살고 싶어서 그냥 콱 죽어버리고 싶었을 때 그때 꽃피는 푸르는 봄이라는 일생에 단 한 번뿐이라는 청춘이라는
심보선, 소년 자문자답하다
소년이여, 너는 질문을 던진다
거대한 호기심이
손가락 끝을 집어 올려 우주로 향하게 한다
이 숲을 건너가라
건너편에서 무쇠처럼 단단한 대답을 주마
하지만 대답을 주는 이는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다
머나먼 별
휘날리는 깃발
적의 없는 입술
삶에 던져졌던 은밀한 영향력들
소년이여, 숲 끝에 이르기 전에 너는 넘어질 수도 있다
그때 너는 끝날 것이다
그리고 노인이 시작될 것이다
혼란 다음에 환란
환란 다음에 환멸
소년이여, 무섭지 않은가
문명이 죽은 아버지들의 유언처럼
바스락거리기 시작할 터인데
소년이여, 너는 질문을 던진다
보다 더 큰 질문의 부스러기인 그것을
이 숲을 건너가라
건너편에서 불덩어리처럼 뜨거운 대답을 주마
하지만 대답은 네가 기대했던 선물이 아니다
그것은 단 한 줄의 문장일 것이다
그 문장을 따라 읽어라
그러면 소년이여, 너는
너의 죽음을 영영 잊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