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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얼레지

 

                   - 김선우

 

 

 

 엣 애인이 한밤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자위를 해본 적 있느냐

 나는 가끔 한다고 그랬습니다

 누구를 생각하며 하느냐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랬습니다

 벌 나비를 생각해야만 꽃이 봉오리를 열겠니

 되물었지만, 그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얼레지……

 남해 금산 잔설에 남아 있던 둔덕에

 딴딴한 흙을 뚫고 여린 꽃대 피워내던

 얼레지꽃 생각이 났습니다

 꽃대에 깃드는 햇살의 감촉

 해토머리 습기가 잔뿌리 간질이는

 오랜 그리움이 내 젖망울 돋아나게 했습니다

 얼레지의 꽃말은 바람난 여인이래

 바람이 꽃대를 흔드는 줄 아니?

 대궁 속의 격정이 바람을 만들어

 봐, 두 다리가 풀잎처럼 눕잖니

 쓰러뜨려 눕힐 상대 없이도

 얼레지는 얼레지

 참숯처럼 뜨거워집니다

 

 

 

  물속의 여자들

 

                                 - 김선우

 

 

 

 늦봄 저수지 둑 위에 앉아

 물속을 오래 들여다보면

 거기 무슨 잔치 벌였는지

 북소리 징소리 어깨춤 법석입니다

 

 바리공주 방울 흔들어 수문 열리자

 시루떡 찌고 있는 명성황후가 보입니다

 구름이 내려와 멍석을 펼치고

 축문을 쓰고 있는 황진이 쪽찐 머리

 가르마 따라 흰 새 날고 바람 불어옵니다

 난설헌이 어린 남매를 위해 소지를 사르다가

 문득 눈을 들어 감나무를 봄니다

 우듬지에 걸려 펄럭이는 나비연

 황진이가 다가와 장옷을 걸쳐줍니다

 두 여자 마주보고 하하 웃습니다

 명성황후 다가와 붉은 석류를 내밉니다

 석류알 새금새금 발라먹으며

 세 여자 찡그려 하하하 웃습니다

 물보라치는 눈물,

 이승을 혼자 노닐다 온 여자들이

 휘모리 장단을 칩니다 지전 흩어지고

 까치밥마냥 미쳐서

 술잔 속에 한 하늘이 천년을 헤매었습니다

 

 물속에 웬 잔치 벌였는고?

 어머니 입 속에 상추쌈 넣어드리니

 저수지의 봄날이 흐득 깊어갑니다

 

 

 

  봄날 오후

 

                        - 김선우

 

 

 

 늙은네들만 모여앉은 오후 세시의 탑골공원

 공중변소에 들어서다 클클 연지를

 새악시처럼 바르고 있는 할마시 둘

 조각난 거울에 얼굴을 서로 들이밀며

 클클, 머리를 매만져주며

 그 영감탱이 꼬리를 치잖여 ─ 징그러바서,

 높은 음표로 경쾌하게

 날아가는 징 · 그 · 러 · 바 · 서 ,

 거죽이 해진 분첩을 열어

 커티분을 꼭꼭 찍어바른다

 봄날 오후 세시 탑골공원이

 꽃잎을 찍어놓은 젖유리창에 어룽어룽,

 젊은 나도 백여시처럼 클클 웃는다

 엉덩이를 까고 앉아

 문밖에서 도란거리는 소리 오래도록 듣는다

 바람난 어여쁜 엄마가 보고 싶다

 

 

 

 

  해질녘

 

                         - 김선우

 

 

 

 조루증을 앓나 잎 떨군 은행나무

 흰 뼈 나부끼며 지느러미 쓰윽

 노을 속을 미끄러져 헤엄쳐오는 사이

 

 한 노인이 극장 간판 아래 서성이고 있습니다

 고개를 들어 여배우 젖꼭지를 지그시 물어봅니다

 달큼한 입 속, 어린 시절 어머니가 물동이 이고 와

 젖이 담긴 바가지를 그에게 내밉니다 부끄러워

 어머니 귓불에 분꽃귀고리 달아드립니다 웃을 때마다

 딸그랑거리는 분꽃에서도 젖이 흘러나옵니다 꽃잎 감추며

 새색시는 무명치마 말기에 새들을 풀어놓습니다

 벌게진 얼굴의 그가 분첩을 내밉니다 아이들이

 속곳 속에서 굴러나오며 새소리 연을 날립니다

 노을 속을 지즐대며 날아가는 쪽빛 연, 연 위에서

 맨발의 어머니가 앞섶을 풀며 그를 부릅니다

 

 잎 떨군 은행나무 지느러미 즈려 타고

 그 노인, 변두리 극장 안으로 헤엄쳐 들어갑니다

 마지막 잎새 노을 속에 흠뻑 붉습니다

 

 

 

 

  내 뒤에서 우는 뻐꾹새

 

                                        - 김선우

 

 

 

  나는 목련나무 아래 누워 있었다 흰나비 모빌처럼 목련은 흔들리고 뻐꾹새 울음 그때 우리 사랑을 나누었던가……

  그를 만난 건 성탄절 무렵이었다 눈을 내려 발등에만 쌓이고 걸음이 무거웠던 우리는 서로의 어깨를 잠시 빌렸다 수척한 그가 소주잔을 들 때마다 손등에 선명한 못자국이 보였다 간간이 검붉은 피가 흘러 화무, 화무십일홍…… 술잔에 빠진 꽃잎을 건져내며 눈물이 날 때까지 우리는 웃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느낌표 뒤에 물음표가 와야 했던 건 아닐까 가지런히 젓가락을 놓는 그의 손끝이 떨렸다 탁자가 흔들리고 술잔이 떨어지면서 이미 젖어버린 깃발이 얼룩졌다 선명한 발자국들, 절망을 전유하지 않고서 어떻게 희망을 말할 수 있을까 엘리, 엘리……, 엘리…… 그날밤 나는 그의 애인이기를 청하였다

  내가 그에게 줄 수 있었던 건 맑은 물 한사발. 그는 내 앞에서 꼭 두 번 울었다 그것도 한번은 등뒤에서였으므로 뻐꾹새처럼 딸꾹질하는구나 뻐꾹새, 이봐, 봄이 오면 목련나무 아래에서 사랑을 나누고 싶어 그림자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꽃잎이 내 이마를 덮기 전에 내게로 와 불탄 자리처럼 선명한 얼룩이 심장에 남을 거야

  그가 더이상 내 앞에서 울지 않게 되었을 때 못자국에서도 더이상 피가 흐르지 않았다 그만 나를 떠나줘 목련나무 아래에서 쇠못을 줍던 내가 말했다

 

 

 

 

 

  시집『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창비 2000

 

 

 

 

 

 

  - 1970년 강릉 출생. 강원대 국어교육과 졸업.

     1996년『창작과비평』겨울호에< 대관령 옛길>등 10편의 시가 당선 등단.

     시집<도화 아래 잠들다>창비 2003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문지 2007. 등

     현대문학상, 천상병시상, 이육사문학상, 2008년 올해의 작가상, 올해의 좋은시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