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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 황병승 / 아방가르드 최근 "시와 정치" 논의에 대하여

1정신병 전쟁영화에서덜떨어진애 나중에미쳐서지가뒤지든가 합의하에죽이든가함
싸이코 광기 언어치료불능 약물치료 극단적 충격 앞에서 탈출하기 위해 자기만의 세계로

2신경증 주인공묵묵히고뇌하는표정 나중에집으로돌아가도 적응잘못하고강박증심해짐
히스테리(여) 짜증 질문하고 대답에 만족을 못함 내가 진짜로 원하는건이게아니라며 상대방을 난감하게 함. 나의 결핍을 타자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내가 의미있는, 가치있는 욕망의 대상인가 궁금해함. 거리를 유지하려고함 소유하면 욕망의 대상이길 멈출테니 그걸 원하지도, 너무 떨어져도 불안하고 거리두기에 전전긍긍함 -내가 저사람에게 필요한 존재인가? 내가 여자로 안보여? 내가 쉬워?
강박증(남) 내가 여전히 나인가? 불가능한 꿈을 꿈으로써, 다른사람에게 나를 열려고 하지 않음, 타자와 떨어짐으로써 지키려고 함. 규칙만들기 타자의 욕망에 허덕이면 나를 읽을 것이다. 여자로 인해 내가 상실 될 것이 두려워서 친구한테 전화걸라고 해놓는 것

3도착증 결국죽는나쁜넘
새디즘-가학 매조키즘-피학성음란증(공격이 자기 내부로 향함... 죄의식 때문) 정상적 방법 외의 모든 행동에서 쾌락을 얻으려고함 패티시즘 복장도착증(크로스드레서)... 구조적으로 남자만 가능

황지우 엘리트
10대 다난 장정일
군인 아버지 - 학교 군대 안가려고 여호와의 증인 행세해서 중졸
살인미수로 소년원 권력관계 강간 조직 제도 환멸
글쓰는 사람이 되기로하고 애쓰다 박기영한테감
전두환이 잡지 없애 MOOK지가 많아진 시대 (진입작벽높아 창비문지)
장석주발간<언어의 세계>에 등다
김수영문학상 (황병승김경주김행숙진은영김원)

DESTRUCTIONX 견교한 체계의 균열지점을 찾아내어 무너뜨리는 것
DECONTRUCTION 데리다 해체 폭탄을 던지는게 아니라 구조의 나사를 풀어
서사해체 이야기 없는 소설, 이야기를 해체할 수 있는 사람은 이야기를 정말 잘 만드는 능력을 받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거임.

윤대녕이전
거대담론 이야기 체계 GRAND NARRATIVE 역사가 주인공인 내러티브
헤겔 역사철학 인류의 역사는 점진적인 자유의 증대 과정이다.
마르크스 역사관 원시 공산주의 자본주의 사회, 공산주의//기독교 XX 80년대에는 확신
*지식인>>민중. 대학생이 공단가서 사회주의 공부
*realism 시대적 정신 미학적 방법 >>> 말도 안 되게 해체함. 거대담론 조롱 지식인 조롱
불편하게 하는 에너지

내게 거짓말을 해봐
아버지와의 싸움이 끝장까지 가서 징징거리다가 되려 아이러니하게 아버지를 화나게 함

유희성
품위없음 낄낄
키치 캠프
예술은 무용하기 때문에 유용성을 반성하게 해준다 (김현)
http://blog.naver.com/yehann/50010413717
SELF reflexiblility 자기반영성 소설이 소설 아닌 척을 하지 않고 작가 등장하고 그르는 거 리얼리즘아니고 모더니즘 경향 > 길안에서의 택시잡기
예술작품 -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하는 아우라

>> 아버지를 화나게 하기
군인 아버지의 변태자식
도착증적 자기모멸 너는 무능한 아버지다 // 나는 너라고 권위 까발리기 너는 음란한 아버지다
아버지를 향하는 분노가 죄의식으로 돌아와 자기 처벌로 이어짐 새디즘>매조키즘
도스도옙스키의 간질, 도박

들뢰즈는 반대로 자기 안의 아버지를 처벌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하기도 함. 메조키스트의 유머 연극적
피학적인 방식으로 유머러스하게 조롱하는 것. 천안함이 터지자 위대한 대통령의 지휘하에 학도병을 조직합시다.
법을 어김으로써 무력화-새디스트
곧이곧대로 지켜 무력화-매조키스트... 소크라테스 예수 장정일... 아버지와 시에 대해 권력과 싸웠다.





제5강 장정일 : "자비를...자비를...자비를... (운다)"

■ 등단 사항
1984년 『언어의세계』 3집에 「강정 간다」 등을 발표하면서 등단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희곡 「실내극」당선
1987년 첫 단독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민음사 1987)으로 제7회 김수영문학상 수상
1988년 『세계의문학』 봄호에 단편소설 「펠리칸」 발표하면서 소설가 겸업


■ 저서 목록
시집
0. 성(聖) 아침 (청하 1985) *박기영과의 공동시집
1. 햄버거에 관한 명상 (민음사 1987)
2. 상복을 입은 시집 (1987)
3. 길 안에서의 택시 잡기 (민음사 1988)
*시 「요리사와 단식가」가 「301 302」로 영화화됨. 박철수, 1995
4. 서울에서 보낸 3주일 (청하 1988)
(김영승이랑 심판처럼 두려운 사랑이라는 2인시집 냄)
5. 통일주의 (열음사 1989)
6. 천국에 못가는 이유 (문학세계사 1991)
 >>장정일문학선집 (최근에 시 냈는데 별로)

소설
1.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열음사) 1989
2. 아담이 눈뜰 때 (미학사 1990) *김호선, 1993
3. 너에게 나를 보낸다 (미학사 1992) *장선우, 1994 꿈/내삶을표절했다며찾아와설왕설래하다가집에삼
4.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 (미학사 1994) *오일환, 1996
5. 내게 거짓말을 해봐 (김영사 1996) *장선우, 1999, 영화 제목은 「거짓말」싸드새디즘 메조히즘 지루하고 씁쓸하고 이런게 인간이구나 싶은... 컨텍스트가 있고 거기에 섹스가 동원되었을 때, 야한 거리 유지 안하고 익스트림클로즈업했을 때
(삼국지 황석영 이문열 사이)
6. 중국에서 온 편지 (작가정신 1999)
7. 보트 하우스 (산정미디어 1999)
8. 구월의 이틀 (랜덤하우스코리아 2009)

희곡
1. 긴 여행 (미학사 1995)
2. 고르비 전당포 (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에세이
1. 펄프 에세이 (하늘연못 1997)
2. 장정일의 독서일기 1~7 (범우사 1994~ 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3. 생각 (행복한책읽기 2005)
4. 장정일의 공부 (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 작가 이력

* 인터넷에서 발견한, 필자를 알 수 없는 글입니다.
내용이 비교적 정확하고 알차서 옮겨 놓습니다.

1962년 경북 대구에서 출생했다. 84년 당시 문학평론가 장석주 씨가 운영하던 도서출판 청하에서 출간하는 무크지 《언어의 세계》 3집에 '강정 간다' 외 4편의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첫 선을 보이게 된다. 그의 새로운 시들을 읽게 된 문학평론가 장석주 씨는 장정일의 감각적이고 재기발랄한 언어 감각과 남다른 상상 세계에 매료되어 시인 박기영과 장정일의 공동시집 『성(聖) 아침』(청하)을 출간한다. 하지만 평단과 몇몇 평자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다.

박기영과의 공동시집에 실려 있던 시들을 중심으로 민음사에서 첫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을 출간한다. 우스꽝스런 제목 때문인지, 서점에 들려 시집을 바라보는 독자들 대부분의 반응은 빙긋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우스꽝스런 제목이 시집을 향해 손길을 뻗치게 만든다. 급기야 장정일의 시들은 80년대의 암울한 정치상황과 그에 맞선 민족문학계의 치열한 전투적 성향의 시들로 가득했던 한국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던지게 된다. 새로운 도시 세대의 감각과 불온한 젊은 시인의 상상 세계는 이제까지 한국 문단에서 볼 수 없었던 매우 이질적인 것이었다.

장정일, 그의 시와 그의 이름은 한국문단에 매우 낯설게 다가왔지만 마치 도시 게릴라처럼 그의 문학은 순식간에 독자들을 사로잡는 무서운 흡입력을 갖고 있었다. 그의 첫 시집을 대면에 많은 평자와 독자들은 금세 장정일의 새로운 도시풍의 시세계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후 장정일은 80년대 후반의 한국 문단에서 가장 주목받는 시인으로 각광을 받는다.

장정일의 이러한 문학적 성공은 첫 시집을 출간한지 얼마 안돼 민음사에서 운영하고 있던 '김수영 문학상'의 최연소 수상자로 선정되면서부터였다. 대구에서 올라온 낯선 젊은 시인을 둘러싼 수많은 중앙 일간지 문학담당 기자들을 향해 장정일의 느릿느릿한 답변은 참으로 어눌하기 짝이 없었다. '잘 모르겠심더'로 일관하는 이 젊은 시인에게 그 누가 한국 문단의 가장 문제적인 작가, 21세기를 이끌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읽을 수 있었겠는가.

장정일은 그의 두 번째 시집으로 기록되는 『상복을 입은 시집』을 대구에서 출간한다. 지금은 그의 저서 한 귀퉁이에 올라가는 약력에 이 시집 목록은 누락되어 있다. 이 시집에는 소년원 시절의 기억을 담고 있는 연작시들과 민족문학계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정치적인 시들까지 수록되어 있다. 장정일은 아마도 첫 시집의 성공 이후 그의 시적 재능을 너무도 과신한 나머지 함량 미달의 습작 시들까지 겁 없이 세상에 내놓은 것은 아닐까. 이상하게도 이러한 수준 이하의 시집을 출간했음에도 전혀 그의 시의 대한 불신감은 들지 않는다. 보기 드문 일이다.

첫 시집을 출간한 다음해 장정일은 그의 세 번째 시집 『길안에서의 택시잡기』를 다시 민음사에서 출간한다. 그간 여러 문예지를 통해 발표한 시들을 모아 출간한 이 시집을 통해 장정일은 그의 도시적 감각의 새로운 시적 유형을 창출하게 된다. 한때 각 문예지 신인상에 투고된 젊은 문학도들의 작품들이 상단 부분 장정일의 시적 경향을 모방한 작품들이 많았다. 이를 두고 '장정일 현상'이라 불리기까지 할 정도였으니 그의 시가 갖고 있는 감염력은 젊은이들에게 가히 폭발적이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그의 시집들을 교실 한 귀퉁이에서 몰래 숨겨보다 교우들에게 빼앗기게 된다. 다시 내 손에 들어온 장정일의 시집은 그야말로 걸레가 다 되어서였다. '이런 것도 시냐?' 주변 친구들의 반응은 그러했다. '그렇다, 재밌지 않냐!' 그런 것도 시라고 강변하고야 말았다. 실로 그의 시들은 재미있었고, 또 나로 하여금 시에 대한, 문학에 대한 '다른 한 꿈'을 갖게 했던 것 같다.

장정일은 『상복을 입은 시집』에 불문학도 '용숙이'로 잠시 등장했던 신이현 씨와 결혼을 한다. 대구에서 서울로 거주를 옮기면서 셋방살이를 시작한 장정일에게 시를 써서 들어오는 고료는 그야말로 살인적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그의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이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백만부, 이백만부에 달하는 밀리언셀러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이상 시인 장정일의 생활고는 서울 이주 이후 더욱 심해졌을 법하다.

그리고 그는 소설을 쓰게 된다.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희곡이 당선되기도 했던 장정일은 몇몇 문예지 기획자들의 청탁으로 단편소설을 쓰게 되고, 시를 통해 얻었던 문학적 인기는 고스란히 그의 소설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의 소설 작업은 본격적인 것이 아니었고, 시와 소설에 대한 서로 다른 장르의 이견을 좁히지 못하던 '딱딱한' 문단 풍토는 젊은 작가 장정일에 대해 그리 호의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80년대 후반, 젊은 시인들은 한때 시와 소설, 혹은 시와 평론을 겸업하는 탈장르 현상을 보였다. 이러한 작가들의 문학적 변신은 각 문학담당 기자들의 먹기 좋은 기사감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시인들의 산문에 대한 문학적 역량은 상당히 떨어지는 것이어서 대부분의 젊은 시인들은 탈장르에 대한 실험에 실패하고 만다. 그것은 그들 개인의 문학적 욕심이었고, 또한 시의 시대가 끝나가는 전초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 사이 장정일은 세 번째 시집 『서울에서 보낸 3주일』을 청하에서 출간하고, 이어 열음사에서 『통일주의』, 문학세계사에서 『천국에 못 가는 이유』를 출간한다. 장정일이 직접 자신의 시집들 중 『햄버거에 대한 명상』『길안에서의 택시잡기』 단 두 권의 시집만을 손에 꼽을 정도로 그의 다른 시집들은 그리 주목할 만한 문학적 성취를 이루지 못했다.

장정일 역시 시를 써서 번 돈보다는 소설을 써서 번 돈이 더 내게 유익했다는 식의 발언을 서슴없이 하게 만든다. 생활고, 그것은 IMF 시대가 아니더라도 언제나 살인적인 것이다. 소설은 장정일에게 비좁은 셋방에서 그나마 좀 넓은 방 두 개짜리 전셋집으로 옮기게 해주었고, 그 옛날 선배들을 찾아가 걸식(?)을 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어도 되었던 것이다. 또, 역시 장정일의 시에 대한 역량은 그쯤에서 접어두는 것이 옳을 법했다. 그의 시는 그 자체로 충분하다. 이 말은 그의 시세계가 완벽한 문학 세계를 이루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발 빠르게 명예퇴직(?)을 선택함으로써 또 다른 작가적 전기를 마련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소설가가 되었다.

열음사를 운영하던 시인 김경수 씨는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연극연출가였던 이윤택 씨와 함께 소위 시인들의 '깽판치기'를 내세워 시인들이 쓴 소설을 기획 출간하기 위해 장정일을 끌어들인다. 장정일은 이 기획의 일환으로 그의 첫 장편소설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라는 매우 재미있고 어설프기 짝이 없는, 또 지금도 꽤나 기억에 남는 첫 소설을 우리 앞에 내놓게 된다. 성탄절 성당에 다녀오는 소녀를 강간한 죄로 소년원에 들어가 결국 여장 게이로 전락하며 에이즈에 감염된 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소설이었다. 이 소설은 그간 발표한 장정일의 시와 희곡, 산문 등이 절묘하게 삽입되어 있어 당시 장정일의 문학을 총집결시킨 한 권의 문학선집으로 불려도 좋을 만한 성질의 것이었다. 소설의 종국, 에이즈를 치료하러 미국으로 건너가는 비행기 안에서 발기불능의 주인공을 간호하는 수녀는 바로 주인공이 그 옛날 강간했던 어린 소녀였다. 그 어린 소녀가 수녀가 되어 주인공의 발기불능인 성기를 어루만지며 다시 주인공의 '성'을 되찾아주려는 장면은 꽤나 코믹하고, 역시 장정일 다운 발상이다 싶을 만큼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이 소설을 이끌던 저자의 목소리는 결국 이 소설의 제목,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라고 한마디 남기고는 '믿거나 말거나'의 사회자처럼 휘리릭 망토를 끌며 사라진다. 지금도 작가 자신이 이 소설은 '소설을 모를 때' 썼던 탓에 꽤나 애를 먹고 쓴 작품이라고 회상한다. 이 작품을 쓴 이후 비로소 소설을 쓰는 법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뭐니뭐니해도 장정일의 작가적 성공은 첫 소설집 『아담이 눈 뜰 때』(미학사 1990)가 아닌가 싶다. 미학사에서 출간된 이 소설집은 독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하지만 일본에서 출간된 이 책의 일어 번역판에 대한 일본 언론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자, 이러한 현상에 대해 다시 보도를 내보내었던 국내 언론의 힘을 입었던지 장정일의 첫 소설집 『아담이 눈 뜰 때』에 대한 독자, 평단의 관심은 몰라보게 달라졌던 것 같다.

장정일의 본격적인 소설 세계는 그의 두 번째 장편소설 『너에게 나를 보낸다』(미학사 1992)를 출간한 이후 정점을 이룬다. 그의 작품이 출간될 때마다 문단의 비상한 관심은 언제나 작가 장정일에 대한 한 예우처럼 받아들여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만큼 장정일이 내놓는 새로운 작품들은 늘 초미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문제적'이었다. 그것은 문학에 대한 새로운 편견이었고, 그 편견이 문학적 승리를 거두는 그날, 낯설고 새롭고 어설프기 짝이 없었던 작품은 일약 현대의 고전, 정전으로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그러한 연장선상이었을까. 집안에 틀어박혀 CD 플레이어에 소중하게 수집한 천여 장의 재즈 음반들을 집어넣으며 쓰기 시작한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미학사 1994)가 출간되자 '재즈적 글쓰기'라는 평단의 집요한 조명이 시작된다. 아무래도 이 작품에 대한 평단의 관심은 지나친 바가 없지 않았다. 이 작품 때문에 작가 장정일은 이름을 밝히지 않은 모 재즈 애호가로부터 심야 전화폭력을 당하기도 했다. '내가 평생 동안 재즈를 했는데……' 식으로 나오는 일부 독자들의 폭력에도 불구하고 '아담' '너에게' 이후 세 번째로 '너희가 재즈' 역시 영화화되었다.

그리고 작가로서는 참으로 치욕스럽고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될 '작가 구속'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그의 네 번째 장편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김영사 1996)의 외설 문제를 둘러싸고, 부인 신이현 씨가 유학중인 프랑스에 체류 중이던 작가 장정일에 대한 국내의 조짐이 심상치 않았다. 소설이 출간되기 이전부터 출판사 내부에서조차 자체 심의, 혹은 출판 평가 비슷한 준비 작업을 한 듯하다. 결국 소설은 출간되었고, 작품의 파격적인 내용으로 인해 곧바로 심의에 걸리게 된다. 눈치 빠른 출판사는 이런 조짐을 미리(?) 간파하고 장정일 소설을 자진 수거하기에 이른다.

결국 예정된 일이었던 작가 구속 사태가 벌어지고, 젊은 문인들을 중심으로 작가 구속 반대 성명이 발표된다. 늘 그렇듯이 헐레벌떡 게눈 감추듯이 서명운동이 벌어지고(민음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자진해서 후다닥 발표해버리고, 그렇게 엉성한 서명운동이 끝났다. 서명에 참여한 이름들을 보면 한국 문단이라는 게 이렇게 조악한가 싶을 정도로 빈약하다. 그래서였을까, 2차 서명운동이라는 불발탄을 준비하기에 이른다. 역시 불발탄…… (후략)


■ 작품 해설

입을 맞춰 줘… 음… 됐어… 이젠… 내… 보X를… 핥아… 아… 기분이 좋아… 이리와… 너의 성기를 빨고 싶어… 냄새가 좋아… 이젠 너의 것을 내 항문으로… 집어넣어… 그렇게… 아… 이번엔… 가죽혁띠를 가져와… 나의 등을 때려… 더… 세게… 세게… 세게… 넌… 네… 어머니의… 젖을 빨고 자랐을테지… 오늘은… 내 젖무덤에… 오줌을 갈겨… 아… 따뜻해… 아… 됐어… 네가 더럽혔으니… 깨끗하게… 네 입술로 닦아 줘… 그래… 그래… 젖처럼… 달지… 꼭…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것… 같지? … 나도… 엄마나 된… 듯… 기분이 좋아… 이젠… 뭘… 할까… 그래… 동전을 한 움큼 가지고 와… 그걸… 보X에 넣어봐… 그래… 하나… 둘… 셋… 다섯… 열… 끝없이 넣어줘… 끝없이… 그런 다음… 우리 다시 한 번… 하는 거야…

그런데… 넌… 왜… 꼼짝도 하지… 않는 거지… 미안하다고… 미안해서… 시키는 대로… 할 수 없다고? … 멍청이… 미안한 부분마저 나를 사랑해 줄 수는 없어? … 사랑은 너와 나 사이에 가로놓인… 미안함을… 미안하다는 뜻의 추악함을… 하나씩 없애가는 거야… 자… 해봐… 해… 난… 사랑을 확인하고 싶은 거야… 얼마만큼 네가… 나를… 사랑하는지… 아마… 네가… 나를… 끔찍이도 사랑하고 있다면… 내가 말한… 모든 것들을… 너는… 맛볼려고… 들 거야… 해… 하라니까… 난… 괜찮아… 난… 난… 멍들거나… 찢어져도… 좋아… 자존심 같은 거… 옛날에 팽개쳤어…

그런데… 넌… 못하는구나… 진정으로… 날… 사랑하지… 않는구나… 넌… 바지 지퍼만 내리고… 간단히… 하고 싶은 거지… 벽에 세운 채… 나의 치마를 들쳐 놓고… 빨리… 한 번만 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거지… 그렇지? … 그렇지? … 개새끼… 너는 개새끼야… 그래… 난… 너 같은 놈들을… 알아… 잘 안다구… 흐흐… 좋아… 빨리해… 그리고… 꺼져… 꺼져… (여자, 개처럼 짖는다.) 멍멍… 꺼져… 멍멍… 가… 멍멍… 멍멍… (하늘에는 달, 어둔 골목에는 개. 그 막막한 사이를 바라보며, 여자 혼자 운다.)

-「늙은 창녀」 전문

(『길안에서의 택시 잡기』, 민음사, 1988. 원래는 전체가 한 연으로 되어 있으나 독서의 편의를 위해 세 단락으로 나눠 옮겼다. 강조는 인용자의 것.)

장정일에게 아버지, 권력, 문학은 유의어(類義語)다. 80년대의 많은 자식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이 셋과 적대하면서 성장했다. 그러나 그에게 80년대의 어떤 자식들의 투쟁은 스스로 아버지가 되어 권력을 쥐고 주류문학에 안착하기 위한 욕망의 산물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들과 거리를 두어야만 했다. 그와 같은 입지가 그를 특별한 존재로 만들었다.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그는 지배담론과 대항담론 모두에 거리를 두면서 궁극적으로는 두 담론 모두 아버지의 언어일 수 있음을 꿰뚫어본 거의 유일한 존재였다. 덕분에 그의 문학은 호로자식이 되어 권력의 바깥으로 도망치는 반(反)문학으로서의 문학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 전략으로 그가 택한 것은 도착증적 자기모멸의 연극이었다. 그것은 두 가지 목표를 겨냥하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권력이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그 하나였고(나는 네 아들이다, 고로 너는 무능한 아버지다), 도덕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의 외양 아래에 있는 아버지의 도착(倒錯)적 실재를 까발리는 것이 다른 하나였다(나는 너다, 고로 너는 음란한 아버지다). 장정일은 도착증의 문학으로 문학의 도착증을 폭로했다.

인용한 시는 소설에 비해 상대적으로 온건한 그의 시 중에서도 특별히 기억해 둘 만한 작품이다. ‘늙은 창녀’의 목소리를 빌리고 있지만, 이 장치는 창녀의 내면을 재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차라리 남성 주체의 자기모멸을 상연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야 한다. 첫 단락은 남성의 섹스가 대부분 일정한 환상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섹스의 대상이 창녀이기 때문에 그 환상은 더욱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었다. 창녀에게는 환상이 없다. 그래서 그녀는 오로지 고객의 환상에만 집중한다. “꼭…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것… 같지? … 나도… 엄마나 된… 듯… 기분이 좋아…”에서 보듯 이 섹스의 기저 환상은 근친상간으로 세팅되어 있다. 여기까지 이 둘의 섹스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결정적인 한 대목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젠… 뭘… 할까… 그래… 동전을 한 움큼 가지고 와… 그걸… 보X에 넣어봐…” 이 순간 남성 주체는 얼어붙는다. 미안하다, 시키는 대로 할 수 없다, 라고 그는 말한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창녀와 고객의 ‘환상-무대’가 원활하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남성 주체가 창녀에게서 창녀를 보지 않아야 한다. 창녀는 내가 원하는 ‘바로 그 여자’로만 움직여야 한다. 그런데 창녀가 동전을 자신의 성기에 집어넣어달라고 말하는 순간, 그녀는 ‘바로 그 여자’의 자리에서 이탈해 버리고 만다. 그 돈은 이 연극이 은폐하고 있는 ‘팔고 사는’ 관계의 본질을 순간 가시화하여, 남성 주체의 환상에 흠집을 낸다. 남성 주체에게 이전까지의 섹스가 환상 속에서의 자위에 불과한 것이었다면(그녀는 나의 어머니이다), 돈을 매개로, 창녀의 타자성이 비로소 가시화되면서 이 섹스는 괴로운 연극이 되어버리고 만다(그녀는 어머니를 연기하는 창녀일 뿐이다). 그러니까 “미안하다”라는 남성의 말은 그 무슨 윤리적 죄의식의 소산이 아니다. 창녀의 타자성이 산출한 부담으로부터 물러서겠다는 것이고, 이 섹스의 ‘실재’로부터 고개를 돌리겠다는 말이다. “미안한 부분마저 나를 사랑해 줄 수는 없어? … 사랑은 너와 나 사이에 가로놓인… 미안함을… 미안하다는 뜻의 추악함을… 하나씩 없애가는 거야…”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창녀의 타자성을 견딜 수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은 결국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과 동의어가 된다. 그것은 추악한 말이다. 그리고 사랑은 미안함의 추악함을 돌파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창녀의 말과 더불어 사랑의 맨 얼굴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것은 사랑에 대한 모욕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냉철한 규정이다. 사랑은 ‘미안하다’라는 비겁한 말이 필요 없는, 타자의 심연과 정면대결하는 ‘목숨을 건 도약’이어야 한다고 이 시는 말한다. 장정일의 소설들을 참조한다면, 이 창녀-남성의 사랑 없는 섹스는 80년대의 민중-지식인 관계의 일각을 은유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민중을 사랑한다는 것은 민중의 타자성을 견뎌낸다는 것이다. 지식인이 자신의 환상 체계 안에 정립한 민중을 소비할 때,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자위일 뿐이다. 적잖은 이들이 민중을 사랑한다고 자신했지만, 민중이 그 타자성을 드러내면서 ‘너무 가까이’ 다가올 때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도망쳐야 했던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특정 시대의 지식인들에게만 한정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시는 여성을 환상의 틀 안에서만 소비하는 남성 주체 일반의 무능력을 폭로하는 시로 읽혀야 마땅할 것이다. 남성은 여성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후배위에서 가장 큰 자유를 누리겠지만, 바로 그렇게 믿는 순간 그는 가장 무기력한 자위에 빠져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후배위의 시다. _신형철, 「시는 섹스를 한다」(『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2008) 중에서




















미래파 길고 낯설고 섬뜩한 시를 생산하는 요즘 시인들
나는 있을 때 마다 틀렸어

80년대 초반 이성복황지우 시의시대
후반 장정일 기형도

동인21c전망 90년대
유하 함성호 차창룡 허수경 김소연
대중문화

신서정 90년대중~00중반
장석남 이윤학 박형준

이후 2005 황병승
김경주 김민정 진은영 김행숙
시인&평론가 권혁웅<미래파>라고 지칭

이 시대의 흐름을 언어화하고 충족시켜 준 시인
감수성의 혁명
야금술에서 연금술로
일본문화 영향




미화 합리화 변호 가짜자아에서 거리두기
자기폭로의 에너지와 용기
자아양육
>
황병승부터는
시는 1인칭의 고백이라는 통념을 깸
최승자의 내면이 뜨겁게 전달되는 것과는 다르게 이야기를 읽게됨
자기얘기를 하는 거는 촌그러운거다
허위와 위선 오그라듬 >>고백
(고해성사 이래 근대문학의 장치였음, 내면고백, 실연의 상처, 독백)
아닌 대사

고백이 먼저있고 내면은 뒤따라온다
스스로 착각하는 어떤
내가 진실한 형식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따라가는!!
제도안에서는 이게 자꾸 나를 방해해

권태로움 도착성
미니홈피가 독립된 정체성을 부여하는 힘이 시들해져 블로그로 트위터로
시스템은 진화를 하는데 점점더 충만함을 느끼는지는 별개
커터칼로 손목긋는 사람들의 공허와 같이
사회학적으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얻기 어려워진 시대의 징후

마이너리티를 말하는게 아니라 시 안에서 마이너리티가 말한다.
우리가 이제까지 만나지 못했던 캐릭터들

프로이트는 남자가 게이를 더 싫어하는 건 질투때문이라고 설명함
전위라는 것은 사회가 만든다.


역할 수행
인위
내면보다 취향 정서 스타일


정서적가치
자신을 망가뜨리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슬픔과 분노
알고있는 정서를 낯설게 몰랐던 것을 비로소 느끼게도
대단한 교훈 이런 거 보다


시만이 할 수 잇는 것
덕분에 세계를 타자를 사람을
그 정서를 알게 되는 것.




제6강 황병승 : "죽을 때까지 어떤 이름으로도 불려지지 않으리."

■ 기본 개요

역사적인 시집들이 있다. 한 시대의 기념비 같은 책들이다. 이를테면 이성복과 황지우의 첫 시집은 1980년대 초반 한국 사회의 양심이 쓴 혈서다. 철조망 같은 시집들이었다. 다가가 부딪치면 살갗을 뚫고 들어왔다. 독서가 곧 출혈이었다. 장정일과 기형도의 시집은 80년대 후반 한국 사회의 진단서다. 전자는 삐딱한 독학자의 눈으로 한국 사회의 ‘쓸쓸한 퇴폐’를 포착했고, 후자는 우울한 기자의 눈으로 ‘무서운 슬픔’을 보고했다. 90년대는? 풍요로웠지만 고요했다. 2000년대가 시작되고도 한동안은 그랬다.

그 무렵 황병승의 ‘여장남자 시코쿠’(2005)가 나왔다. 괴물 신인의 괴팍한 등장이었다. 불온한 붉은 빛깔의 시집은 단숨에 기념비가 되었다. 매력적인 정체불명의 캐릭터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들, 이해되기 이전에 먼저 빨아들이는 수사들, 비문(非文)의 근처에서 아슬아슬하게 쓰이는 문장들, 격렬한 분노와 황량한 슬픔이 뒤엉켜 있는 정서들이 시의 막장에서 쏟아져 나왔다. 몇몇 동료들이 그와 더불어 각개약진 했다. ‘2000년대 시’ ‘미래파’ ‘뉴웨이브’ 등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기념비 주위에 화환들이 쌓여갔다.

1970년생이니까 문태준과 동갑이다. 공통점은 그것뿐이다. 문태준이 유토피아의 순간적 현현(顯現)을 도모하는 서정의 사도라면, 황병승은 언어의 모험과 정체성의 실험이 같은 것이라고 믿는 전위의 척탄병이다. 전자가 내실을 보살핀다면 후자는 외연을 넓힌다. 이것은 모든 시사(詩史)를 관류하는 두 개의 근원적 기질이다. ‘시’의 이름으로 ‘시 아닌 것’들을 솎아내는 야금술의 길이 있고, ‘시 아닌 것’들을 긁어모아 ‘시’가 될 때까지 밀고 나가는 연금술의 길이 있다. 문과 황은 당대 한국 시의 남북극에 있는 전진기지다. 둘 사이의 거리가 곧 최근 한국 시의 넓이다.


메리제인.
우리는 요코하마에 가본 적이 없지
누구보다 요코하마를 잘 알기 때문에

메리제인. 가슴은 어딨니

우리는 뱃속에서부터 블루스를 배웠고
누구보다 빨리 블루스를 익혔지
요코하마의 거지들처럼.
다른 사람들 다른 산책로

메리제인. 너는 걸었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도시,
항구의 불빛이 너의 머리색을
다르게 바꾸어놓을 때까지

우리는 어느 해보다 자주 웃었고
누구보다 불행에 관한 한 열성적이었다고
메리제인. 말했지

빨고 만지고 핥아도
우리를 기억하는 건 우리겠니?

슬픔이 지나간 얼굴로
다른 사람들 다른 산책로

메리제인. 요코하마

_「메리제인 요코하마」 전문

인용한 시가 황병승의 본령은 아니지만 비교적 온건한 입구쯤은 된다. 태생적이라고 해야 할 비주류 의식을 여기서 본다. “뱃속에서부터” 블루스를 배웠다질 않는가. ‘그들 안의 블루’가 그것을 연주한다. 끼리끼리 모여 “빨고 만지고 핥아”가며 견딘다. “우리를 기억하는 건 우리”뿐이라서, 그들이 “다른 사람들” 즉 ‘타자’라서 그렇다. 그러니 그의 시에 출몰하는 이국의 인명과 지명은 모국어에 대한 불경이 아니다. 노동계급에게 조국이 없듯, 그들에게는 국적이 없다. 내 나라의 ‘꼰대’들이 아니라 ‘요코하마의 거지들’이 그들의 동포다.

그런 이들이 세계 각지에서 모여들어 “슬픔이 지나간 얼굴로” 말문을 연다. “나의 또 다른 진짜는 항문이에요”라고 고백하는 게이가 있다. 입술을 뜯어버리고 얼굴을 갈아버릴 테니 제발 사랑해 달라고 그가 말할 때 우리는 어쩐지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된다. ‘시코쿠’라는 크로스드레서는 “그대여 나에게도 자궁이 있다 그게 잘못인가”라고 냉소하고, 어느 트랜스젠더는 “눈을 씻고 봐도 죄인이 없으니 나라도 표적이 될래요”라고 쓸쓸히 자조한다. 이들은 실로 한국 시가 처음 경험하는 주체들이다.

그는 마이너리티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마이너리티가 그의 시에서 말한다. 이것이 그의 괴력이다. 세 군데 이상의 학교를 다녔고 세 장르의 예술을 넘나들고 있는 이 시인은 시를 ‘혼자 할 수 있는 최고의 놀이’라고 정의한 적이 있다. 즐겁고 슬픈, 이상한 놀이다. 그의 시에서 ‘즐거운 놀이’만을 본다면 그것은 절반밖에 못 본 것이 아니라 전부를 못 본 것이다. 어서들 오시라, 이곳은 한국시의 신개지(新開地)다.

_『경향신문』 2007.1.26


1. 자아 말고 다른 어떤 것이

세계를 주유하면서 그것들을 동일화하고 내면화하는 능력은 자아의 것이다. 대상은 비유의 그물에 걸려들고 그것은 이미지화되어 자아의 일용할 양식이 된다. 동일화 혹은 내면화는 궁극적으로 자아 그 자신에 대한 배려와 양육으로 귀결된다. 대상들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재확인하고 그를 통해 자기를 보존한다. 자아는 본질적으로 방어적이며 자아의 주유는 ‘자기’의 배려와 양육이라는 예의 목적을 훼손하지 않는 한에서만 이루어진다. 그래서 자아의 외출은 신데렐라의 그것처럼 언제나 자정이 되면 끝난다. 그래서 세계의 자아화는 ‘충만한 현재’ 혹은 ‘영원한 현재’를 도래시키기도 하지만 그것은 ‘가상적 현재’이자 ‘일시적 현재’임을 면치 못한다. 진리는 시계가 자정에 도달할 때 더불어 도착한다. 자정 이전에 이루어지는 어떤 종류의 발화도 자신의 무대복을 완전히 벗기지는 못한다. 오히려 왕자(독자)에게는 신데렐라(서정적 자아)의 그 조심스러움과 소박함이 그녀의 또 다른 매력으로 다가올 것이다. 신데렐라가 스스로 그 자신의 무대복을 벗어던지기는 어렵다. 그것은 자아의 본래적 속성이기 때문이다. 지배 권력이 자아에게 있는 한 자아가 도달할 수 있는 최대한의 시간은 자정 직전이다. 서정시의 시간은 대개 11시 59분 59초에서 멈춘다.

……그러나 황병승의 시에는 황병승이 없다.


2. 고백 말고 다른 어떤 것을

미셸 푸코
개인은 오랫동안 다른 이들의 신원보증과 타인과의 유대(가족, 국적, 후원자)에 대한 표명을 통해 자기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아 왔으나, 그 다음에는 그가 자기 자신에 관해 말할 수 있거나 말해야 하는 진실의 담론을 통해 존재의 정당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진실의 고백이 권력에 의한 개체화 절차의 핵심에 자리잡은 것이다.”(『성의 역사1』, 76쪽)
“서양에서, 사람은 고백의 동물이 되었다. 거기에서 아마 문학상의 변모가 유래했을 것이다. 용기 또는 거룩함의 시련을 중심으로 한 영웅담 또는 초자연적인 이야기에 집중되어 있던 이야기하고 듣는 쾌락에서, 고백이라는 형식 자체에 의해 어른거리는 신기루처럼 제시될 뿐인 진실을 자기 자신의 마음속으로부터 말들 사이로 떠오르게 하려는 한없는 노력에 따라 규제되는 문학으로 이행된 것이다.”(같은 책, 77쪽)

가라타니 고진
“고백이라는 형식 또는 고백이라는 제도가 고백해야 할 내면 또는 ‘진정한 자기’라는 것을 만들어낸 것이다.”(『일본 근대문학의 기원』, 구판, 104쪽)
“왜 항상 패배자만 고백하며 지배자는 고백하지 않는가. 그것은 고백이 왜곡된 또 하나의 권력의지이기 때문이다. 고백은 결코 참회가 아니다. 고백은 나약해 보이는 몸짓 속에서 주체로서 존재할 것, 즉 지배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같은 책, 116쪽)


3. 권태는 도착(倒錯)을 낳고
도착은 멜랑콜리를 낳고

참고 작품 ) 「사성장군협주곡」

(…) 90년대 초반 이후 한국사회에서 20대를 보낸 세대들에게 큰 타자의 심급은 아예 없었거나 거의 무력했다. 이 세대들에게 전통적인 가부장적 부권의 압력은 미약했고 상징적 아버지라고 할 수 있을 이데올로기 역시 치명적으로 위력적이지는 못했다. 정치적 억압과 성적 금기는 약화되었지만 너무 많은 자유가 있었기 때문에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자아가 힘을 얻었고 ‘구별 짓기’에의 욕망은 커졌지만 미디어의 영향력 때문에 자아들은 균질화되었고 무차별성은 증대되었다. 현실이 전반적으로 가상화(virtualization)되면서 실재(the real)에 대한 열망은 강해졌고 그것은 도착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드러났다. 그들은 사라져가는 ‘나’를 확인해야 했고 구별되지 않는 ‘나’를 증명해야만 했을 것이다. 이런 곤경이 얼마간 도착증적 태도를 초래했고 이런 환경이 새로운 시를 촉발했다. 나를 말할 수 없다는 불가능의 상황이 역설적이게도 나를 다르게 말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고 해도 좋다.

참고 작품) 「에로틱파괴어린빌리지의 겨울」

(…) 이 시는 권태와 도착과 슬픔이 뒤엉켜 있는 현대 젊은이들의 내면(그 내면의 주소가 ‘에로틱+파괴+어린’ 빌리지일 것이다)의 파편을 수습한 시처럼 보인다. 이 마을에서는 권태가 도착을 부르고 도착이 슬픔을 남긴다. 물론 이 악순환은 황병승의 시 전반을 관류하고 있는 구도이기도 하다.

(…) 후반부에 이르면 이 시는 말 그대로 ‘폭발’해 버린다. 이 대목에서부터 이 시는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의 현대적 변용처럼 보인다. 창세기에서는 여호와가 “유황과 불을 비처럼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창세기 19:24) 저 도착의 왕국을 멸망시켰지만, 이 시에서는 빌리지의 중심부라 할 수 있을 스윗 숍에서 저절로 불길이 타올라 마을을 삼켜버린다. 그리고 이 멸망의 풍경을 바라보는 자의 목소리는 이렇다. “누가 만든 불일까, 잘 탄다.” 이 대목이 관건이다. 시의 문맥으로 보면 이것은 “태양남자”의 말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빌리지 외부에 있는 자의 말이라면, 이를 신의 말이자 시인 자신의 말로 이해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의 어조가 묘하다. 어차피 더 나빠질 것도 없었다는 식의 기묘한 해방감과 누가 이 비주류들의 파멸 앞에서 떳떳할 수 있는가라는 식의 억눌린 서글픔 같은 것을 동시에 실어 나른다. 이 멸망은 자폭인가 응징인가. 데이비드 린치 풍의 ‘과잉’의 이미지로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를 변주하여 그 어떤 윤리적 판단도 없이 밀어 붙이면 이런 시가 된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이 한 번 더 심상치 않은 여운을 남긴다. “저팔계 여자는 순돈육 자지를 달고 불 속을 걸었다.” (…) 저팔계 여자는 이 빌리지에서도 가장 황량한 주체였다. 그런 그녀가 모조 남근을 달고 불길 속을 걸으면서 빌리지의 멸망을 증거한다. 이것은 남근에 대한 최후의 필사적인 조롱 같기도 하고, 심판의 불길에도 굴하지 않고 빌리지의 본분을 지키겠다는, 도착에 대한 위악적인 긍정 같기도 하며, 비록 여자이지만 남자가 되고 싶었던, 그러나 끝내 ‘자기 자신이 되는’ 데 실패한 어떤 소수자의 슬픈 소망처럼 보이기도 한다. (…)


4. 마이너리티

Sexual minority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A sexual minority is a group whose sexual identity, orientation or practices differ from the majority of the surrounding society. The term was coined most likely in the late 1960s under the influence of Lars Ullerstam's ground breaking book "The Erotic Minorities: A Swedish View" (Grove, 1966) which came strongly in favor of tolerance and empathy to uncommon varieties of sexuality. The term was used as analogous to ethnic minority.

Initially the term referred primarily to lesbians and gays, bisexuals and transgender people. These four categories (lesbian, gay, bisexual and transgender) are often grouped together under the rubric LGBT. Others referred to as "sexual minorities" include fetishists and practitioners in of bondage and discipline, domination & submission, and/or sadomasochism (collectively referred to as BDSM). The term may also include asexuals and people who may be strictly heterosexual and whose choice of actual sex acts may be vanilla, but whose choice of partner or partners is unusual, such as swingers, polyamorists or people in other nonmonogamous relationships, people who strongly prefer sex partners of a disparate age or people who engage in mixed race relationships.

Usually, the term sexual minority is applied only to groups who practice consensual sex: for example, it would be unusual to refer to rapists as a sexual minority, but the term would generally include someone whose sexuality gave a major, fetishized role to consensual playing out of a rape fantasy. Also, someone who very occasionally incorporates of kink or same-sex activity into a largely vanilla, heterosexual sex life would not usually be described as a sexual minority.

참고 작품) 「커밍 아웃」 「여장남자 시코쿠」 「대야미의 소녀_황야의 트랜스젠더」


5. 서바이벌 심리학

참고 작품) 「곰뱀매거진18호」 「조금만 더」

황병승은 어떠냐 하면, 나는 약자이므로 강자들에게 상처를 받지 않으려면 강자들의 심리를 꿰뚫어보고 속지 말아야 한다는 절박한 경계심 같은 걸 가끔 드러내 보일 때가 있다. 특히 그런 구절들이 서늘하게 좋다. (…) 황병승의 그런 구절 두어 개 읽어볼까. <그러나 당신은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니고, 잠시 약해졌을 뿐>(「곰뱀매거진18호」) <넌 항상 날 인정해줬지/ 넌 항상 인정했어/ 그것은 네가 날 속이고 있다는 감정을 갖게 해>(「조금만 더」) 뭐 이런 식이다. 나는 여기에 ‘서바이벌 심리학’이라는 이름을 붙여봤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알아두어야만 하는 심리학 매뉴얼.” _앞의 좌담 중


6. 캠프 (not 키치)

부록 참고


7. 부서지고 고장 난 서사로

리좀적인 서사성?

참고 작품) 「트랙과 들판의 별」

‘트랙과 들판의 별’이라는 제목 자체가 이 시의 형식적 특성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각각의 별들이 처한 생의 ‘트랙과 들판’을 비선형적인 서사들로 나열하며, 그 별들의 관계를 통해 ‘미래가 없는 우리’의 이상한 ‘연대’를 보여주는 방식. 어쩌면 그것은 이 시집의 전체적인 배치와 각 시들의 구성을 암시해주기도 한다.
황병승의 이야기 구조는 수목(樹木)형이 아니라, 리좀(rhizome)의 형태를 갖는다. 하나의 뿌리로부터 뻗어 나온 가지들이 아니라, 각각의 뿌리들이 자유롭게 접속하는 복수성의 운동. ‘트랙과 들판의 별’의 이야기성은 그런 리좀적인 서사성을 드러낸다. _이광호, 「숭고한 뒤죽박죽 캠프」

포스트모던 T. S. 엘리엇?

참고 작품) 「눈보라 속을 날아서」, 「썸 비치들의 노래」

후고 프리드리히가 『현대시의 구조』에서 엘리엇의 「황무지」에 대해 설명해 놓은 부분. 그는 말라르메와 발레리 이후 현대시에서 ‘파편’ 개념이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파편 문체는 실재 세계로부터 조각들을 떼어내어 그것들을 다양하게 다듬기는 하지만 그 단절면들이 서로 꼭 끼지 않게 하는 조작 방식에서 드러난다.” 조각들을 떼어내서 서로 어긋나게 배치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스타일을 체계화한 것이 엘리엇이라는 게 그의 논지다. 좀 길지만 읽어보겠다. “파편 문체는 엘리엇 시의 법칙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진술들로 구성된다. 짤막한 이야기로 시작되다가, 갑자기 단절되며, 내적 독백 속에서 계속 이어지다가 아무런 연관 없이 섞여든 인용문에 의해 중단되며, 그 후에는 흐릿한 파트너들 사이에서의 대화 조각이 뒤따른다. 한 구절에서 진술된 것이 바로 다음 구절에서 허물어지거나 잊힌다. 이것은 이미지들이나 사건들의 경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이것들은 하나의 장소나 시간에 편입됨 없이 이질적인 유래를 가진 파편들의 몽타주다.” 자, 방금 읽은 대목에서 주어를 엘리엇이 아니라 황병승으로 바꾼다 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 엘리엇은 90년이 지난 지금 읽어봐도 정말 대단하다. 그리고 그 파편들에 한 시대의 절망과 분노가 촌스러운 부르짖음 하나 없이 밀도 있게 쟁여져 있다. 황병승의 시에 현대사회의 절망과 분노가 버티고 있는 것처럼. _신형철 · 황병승 · 김민정 좌담, 『자음과모음』 2010년 여름호 중


8. 시, 결국은 어떤 정서를 창조하는 작업

참고 작품) 「리타의 습관」 「불쌍한 처남들의 세계」 「웨이트리스」


부록
_수전 손택 Susan Sontag, 「캠프에 관한 단상(1964)」(『해석에 반대한다』)에서 발췌

1. 캠프는 세계를 일종의 미적 현상으로 보는 한 가지 방법이다. 이 방법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인위성의 정도, 스타일화의 정도에 기초를 두고 있다.
2. 스타일을 강조한다는 것은 내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내용을 중립적으로 대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캠프의 감수성이 비참여적이며 비정치적이라는 점, 최소한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점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7. 캠프에 속하는 모든 물건 모든 사람들한테는 인위적인 요소가 넘쳐난다. 자연에는 캠프가 될 만한 것이 전혀 없다.
8. 캠프는 과장된 것, 벗어난 것, 제 상태가 아닌 물건을 선호하는 것이다. 가장 좋은 예는 가장 전형적이고 가장 성숙한 캠프 스타일인 아르누보에서 찾을 수 있다.
9. 사람에 대한 취향을 보자면, 특히 캠프는 눈에 띠게 수척하고 엄청나게 과장된 사람들에게 반응을 나타낸다. 확실히, 양성성 소유자는 캠프적 감수성의 가장 중요한 이미지로 꼽힌다. (…) 캠프 취향은 (…) 가장 세련된 형태의 성적 매력은 당사자의 본래 성을 거스름으로써 만들어진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10. 캠프는 모든 것을 인용부호 속에서 본다. 그냥 램프가 아니라 ‘램프’이며, 그냥 여자가 아니라 ‘여자’다. 사물과 사람에게서 캠프를 알아본다는 것은 어떤 존재를 역할 수행자(Being-as-Playing-a-role)로 이해하는 것이다.
16. 캠프적 감수성은 어떤 것 안에 들어 있는 이중적 의미를 재빨리 알아차리는 감수성이다.
17. 캠프를 행한다는 것은 일종의 유혹―이중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현란한 태도, 다시 말해서 감정가에게는 재기발랄한 의미로, 문외한에게는 그와는 좀 더 다른 일반적인 의미로 느껴질 이중성이 철철 넘치는 제스처를 행하는 방법이다.
18. 우리는 천진난만한 캠프와 의도적인 캠프를 구분해야 한다. 순수한 캠프는 항상 천진난만하다. 스스로 캠프라고 생각하는 캠프는 흔히 만족스럽지 못하다. (…) 오페라 작품들의 줄거리에 대부분 등장하는 신파조의 부조리함을 오페라 작곡가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전통적인 오페라들이 그렇게 만족스러운 캠프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25. 캠프의 특징은 무절제의 기질이다. 캠프는 3백만 개의 깃털로 장식된 드레스를 입고 돌아다니는 여자다. (…) 때때로 캠프에는 작품 자체의 스타일만이 아니라, 그 야망에도 그 성격상 터무니없는 뭔가가 존재하곤 한다. 가우디가 바르셀로나에 세운 지나치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건물들―가장 주목할 만한 건물은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다―이 캠프인 이유는, 그 스타일 때문만이 아니라, 그 건물들 자체가 한 세대 한 문화 전체에 걸쳐서나 성취될 수 있을 만한 일을 수행하려 했던 한 사람의 야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26. 캠프는 본래 자신을 진지하게 제시하는 예술이지만, ‘너무 지나치기’ 때문에 전혀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예술이다. (…) 드골이 대중을 대하는 매너와 수사학은 순수한 캠프다.
27. 한결같지 않거나 열정 없이 과장된 것은 캠프가 아니다. 억누를 수 없는, 실질적으로 제어되지 않는 감수성에서 용솟음친 것이 아닌 것도 캠프가 될 수 없다. 열정이 없으면 사이비 캠프―그저 장식적이고 안일한 것, 한마디로, 멋 부린 것―밖에 되지 못한다.
31. 캠프 취향이 소중히 여기는 그렇게 많은 대상들이 유행에 뒤처지고 시대에 뒤처지고 구닥다리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오래된 것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는 건 아니다. 다만, 세월을 거치며 그 활력이 저하되는 과정 자체가 그 대상에 대한 초연함을, 혹은 연민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다.
38. 캠프는 세계를 시종일관 탐미적으로 체험하는 감수성이다. 캠프는 내용에 대한 스타일의 승리, 도덕주의에 대한 탐미주의의 승리, 비극에 대한 아이러니의 승리를 일컫는다.
39. 캠프와 비극은 대립한다. 물론 캠프에는 엄숙함이 있으며 때로는 비애감도 스며있다. 맹렬한 고통도 캠프의 主調에 속한다. 헨리 제임스의 작품에 캠프의 요소가 들어 있는 이유는 그의 상당수 작품에 고통이라는 특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캠프에는 비극적 요소가 전혀, 절대로 없다.
41. 캠프의 진짜 요지는 엄숙함을 폐위시키자는 것이다. 캠프는 놀기 좋아하며 엄숙함에도 반대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캠프는 ‘진지한 것’과 새롭고도 좀 더 복잡한 관계를 맺는다. 하찮은 것에 진지할 수 있으며 경건한 것을 사소하게 여길 수 있는 것이 캠프다.
45. 초연함은 엘리트의 특권이다. 19세기에는 문화라는 사안에 관한 한 ‘댄디’가 귀족의 대리자였듯이, 캠프는 현대의 멋쟁이다. 캠프는 대중문화의 시대에 어떻게 멋쟁이가 될 것인가에 대한 답이다.
48. 구식 멋쟁이는 천박함을 혐오했다. 신식 멋쟁이, 즉 캠프를 사랑하는 사람은 천박함을 높이 산다. 구식 멋쟁이가 끊임없이 기분 나빠하거나 따분해 하는 곳에서 캠프의 감정가는 끊임없이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49. 캠프 취향이 곧 동성애 취향인 것은 아니지만, 둘 사이에 뭔가 특별한 유대감이 존재하고 어느 정도 겹치는 부분이 있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 전반적으로 보면, 동성애자들이 캠프의 전위세력을 구성하고 있다.
53. 동성애자들이 캠프 취향의 전위 세력이긴 하지만, 이런 취향은 분명 동성애 취향 이상의 것이다. (…) 사람들은 동성애자들이 캠프를 어느 정도 창조하지 않았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캠프를 창조해냈으리라고 여길 것이다. (…) 문화와 관련된 귀족적인 태도는 완전히 사라질 수 없기 때문이다.
54. 캠프를 향유하려면 고급 문화의 감수성이 고상함을 독점한 것은 아니라는 위대한 발견에서 출발해야 한다. 캠프는 좋은 취향이 단순히 좋은 취향인 것은 아니라고, 실제로 나쁜 취향에 관한 좋은 취향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나쁜 취향에 관한 좋은 취향을 발견하면 사람은 아주 큰 자유를 얻는다.
55. 캠프는 진지한 것이 나쁜 취향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캠프는 매우 인상적으로 엄숙함을 드러내는 데 성공한 사람에게 코웃음 치지 않는다. 단지 열정적인 실패에서 성공을 찾아내려 할 뿐이다.
56. 캠프 취향은 일종의 사랑, 인간 본성에 대한 사랑이다. (…) 캠프 취향은 자신이 즐기고 있는 대상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57. 캠프 취향은 어떤 대상과 개인적 스타일에 이르게 되는 사랑을 먹고 자란다. 이런 사랑이 없기 때문에, 『페이튼 플레이스(Peyton Place)』나 티시먼 빌딩[@맨해튼] 같은 키치 예술이 캠프가 아닌 것이다.


































'언어를 대한 태도' 언어가 메세지를 투명하게 전달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THE REAL를 표현할 수 있는 전위 시인들 가짜서사x절망x희망 필사적인 자기암시 영원히 떨린다. 다시 삐뚤어진다 하찮은 소시민의 일상안의 에너지. 번듯하는 것은 쉽다
수필쓰듯한 나이브한 서정시는 시가 아니다. 다른 식으로 장르 변활 될 수 없어야 한다. 시를 선택했다면 시로만. 목소리 없는 시들은 싫다. 미학적 자의식은 언어를 신뢰하지 않는데에서 나온다.
불가피하게 어려운 시는 좋은시일 수 있다. 몰라서 어려운시와 어려울 수 밖에 없어서 어려운 시를 구별할 수 있는 안목.
아방가르드의 정치적 디레마 영구 혁명 또 혁명 또 삐뚤어지게하는-시의 정치적 힘 정치보다는 미학,, 정치와 미학..위계, 전략적 동반자관계, 정서적 교감에 서툴러.
직접적으로ㅈ ㅓㅇ치적이면서첨예하게ㅁ ㅣ학적

『창작과비평』 2009년 가을호
정치적 진보주의와 미학적 보수주의
―창비시선 300번 기념시집 『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빛나다』 서평

‘창비시선’이 300호를 돌파했다. 많은 이들이 감회에 젖어 경의를 표했다. 올해로 36세가 된 창비시선보다 젊은 나에게도 어설픈 소회가 없지 않아서 짧은 글을 한 편 썼다. 그 글에서 나는 36년 역사에 우선 경의를 표하되 그간 이 시리즈에 가져왔던 아쉬움을 토로하는 데 더 무게를 실었다. 예외가 없지 않았지만 대개 창비시선의 기조는 ‘민중적 서정시’라는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 “묘사와 발견과 교훈이 편안한 문장들로 엮어진 (…) 단아한 서정시들”이 대종을 이룬다는 것, 과연 이것이 창비가 표방해 온 ‘진보’라는 가치에 가장 부합하는 예술적(시적) 형태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을 갖고 있다는 것 등이 대강의 논지였다. 서구 문학사에서 정치적 좌파와 (비록 애증의 관계였을지언정) 결합한 것은 대개 과격한 아방가르드였는데, 어째서 우리 쪽에서는 ‘서정’이 진보적인 시의 표준문법이 된 것인지 의아했던 터였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문학인들이 미학적으로는 보수적인 틀을 고수해 온 것은 한국문학 특유의 현상” 운운하기까지 했다. 이 입장을 철회할 생각은 없지만 얼마간 거친 논변이었음을 부인하지 않겠다. ‘서정시 vs 전위시’라는 구도가 도드라졌다면 그 역시 사려 깊지 못했다. 이번에는 더 근원적인 층위, 그러니까 ‘언어’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다.

참조가 될 만한 한 사례를 살핀다. 망명 시기 활동을 대표하는 시집 『스벤보르 시편(Svendborger Gedichte)』(1939)에 수록돼 있는 시 「후손들에게」에서 브레히트는 이렇게 적었다. “이 무슨 시대란 말인가. 나무에 관한 대화가 그 많은 범죄행위에 대한 침묵을 내포하므로 거의 범죄처럼 되어버렸으니.” 파시즘의 시대에 자연(나무)을 노래하는 것은 범죄나 다름없다는 탄식이다. 이후 여러 시인들에게서 참조·인용된 구절이거니와, 그 중에서도 압권은 첼란의 것이다. 시집 『눈 구역(Schneepart)』(1971)에 수록된, 제목은 없고 ‘브레히트를 위하여’라는 구절만이 부제처럼 붙어 있는 한 시에서, 첼란은 이렇게 응수한다. “이 무슨 시대란 말인가. 대화가 그 많은 말해진 것을 내포하므로 거의 범죄처럼 되어버렸으니.” 이 구절이 압권인 것은 ‘무엇을 말할 것인가’로 요약될 브레히트의 강압적인 질문에 답하기보다는 질문 자체를 전복해서 이렇게 되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말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첼란은 묻는다. 역사의 비극에 대해서라면, 그것이 나무에 관한 대화이건 아니건, 도대체가 말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죄악이 아닌가. 그러니 그 많은 죄악의 말들을 반복하는 ‘말들의 말’ 역시도 죄악이 아닌가. 나는 브레히트가 아니라 첼란에게서 진정으로 급진적인 태도를 본다.

브레히트가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말할 때 첼란은 진실을 말들로부터 지켜내야 한다고 말한다. 진실은, 그것이 참으로 진실인 한에서,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인은 함부로 진실을 진술하기보다는 진실이 거주하는 고도의 언어적 구조물을 구축해야 한다. 시는 진실이 표현되(면서 훼손되)는 장소가 아니라 은닉되(면서 보존되)는 장소다. 첼란의 비의적인 언어들은 세상의 말들로부터 아우슈비츠의 진실을 지키기 위한 필사적인 철책이다. 요컨대 문제는 언어를 대하는 태도다. 우리가 보기에, 재현해야 할 진실이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언어는 그 진실을 투명하게 담아낼 수 있다는 느슨한 믿음은 미학적으로 보수적이다. 반대로 언어가 사태를 객관적으로 재현하고 진실을 투명하게 포착할 수 있다는 믿음을 의심하는 태도는 미학적으로 진보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시인의 코기토(cogito)를 ‘나는 언어를 의심한다, 고로 나는 시인이다.’라는 명제에서 찾는다. 그 의심은 미학적으로 어떻게 드러나는가. 시는 도대체가 그것이 시이기 위해서는, 그러니까 그저 행과 연을 나눈 수필에 머물지 않고 언어를 의심하면서 겨우 한 줄씩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자해를 감당해야 할 때가 있을 것이다. 형태파괴, 실험, 그로테스크, 난해, 소통불능 등등의 언사들은 그래서 공허하다. 그것들은 그 무슨 비정상성의 징후가 아니라, 시가 자기 자신을 최선을 다해 의심할 때 나타나는 어떤 진정성의 표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서정시 vs 전위시’와 같은 따분한 구도 이전에 먼저 언어에 대한 태도가 있고, 그 태도가 미학적 진보와 보수를 규정한다.

창비시선으로 상징되는 한국의 진보적인 시는 바로 이런 측면에서 그 내용과 무관하게 미학적으로 보수적이었다. 300호 기념시집 『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빛나다』를 읽으면서 새삼 느낀 것도 그것이다. 말들로부터 진실을 지켜낼 줄 아는 뛰어난 서정시들이 십여 편 남짓 있어 감동적이지만, 대다수를 이루는 소위 ‘민중적 서정시’들에는 언어에 대한 의심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시들은 정형화된 서정적 문법 안에서 너무 투명하고 편안하고 또 안이하다. 때때로 이 특질들이 독자들에 대한 겸손함의 표지로 간주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언어에 대한 의심은 진실에 대한 경외와 나란히 가는 것이어서, 언어에 대한 태만은 진실에 대한 오만을 낳는다. 그 오만은 시의 언어, 언술, 형식에 대한 고민을 생략하게 만든다. 어떤 의미에서는 가부장적이라 할 수 있을만한 태도로, 그저 독자에게 삶의 (진실에 미달하는) 지혜를 가르치려고만 한다. 그런 시들은 단번에 손쉽게 읽힐 뿐 두 번 읽히지 않는다. ‘한번 읽기’와 ‘다시 읽기’ 사이의 시간이 사유의 시간이다. “묘사와 발견과 교훈이 편안한 문장들로 엮어진” 시 앞에서 독자는 사유할 필요가 없다. 사유의 부담을 덜어주는 그런 특질들은 ‘진보적’이라기보다는 그저 ‘대중적’인 것이다. 이 특질들이 한때는 ‘민중주의’라는 이름으로 옹호될 수 있었지만, 이제는 동일한 것이 ‘대중주의’로 비판받게 될 것이다. 예술에서 진보는 대중과 함께 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대중을 창조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일반론으로 마무리하자.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우리는 세 개의 명제를 얻었다. 1845년 봄에 맑스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적었다. 1873년에 19세의 랭보는 “사랑은 다시 발명되어야 한다”(「헛소리1」)라고 쓰면서 ‘삶을 바꿔야 한다’는 명제를 제시했다. 20세기 초 프랑스와 러시아 등에서 창궐한 아방가르드는 맑스와 랭보의 명제에 공감하면서 이에 덧붙여 ‘예술을 혁신해야 한다.’는 명제를 제시했다. 그들 이후의 세계를 사는 우리가 시행착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 세 명제를 쇠사슬로 묶어 두어야 한다. 요컨대 제도와 인간과 예술의 동시다발적 혁명이 필요하다는 것, 정치학과 윤리학과 미학은 한 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하나의 ‘규제적 이념(regulative idea)’으로서 늘 우리 앞에 존재해야 한다. 예술은 가능한 차선이 아니라 불가능한 최선을 지향해야 하기 때문이다. 동시다발이 어렵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뒤에서 앞으로 진행돼야 한다. 예술이 제도의 혁명에 먼저 나서면 나머지 두 혁명이 유예된다. 한국에서 ‘진보’를 자임한 문학이 대개 그러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술의 길이 아니다. 예술은 먼저 예술 자체를 혁신하면서 우선 인간을 바꾸고 멀게는 제도의 변혁에 기여하겠다는 ‘가망 없는 희망’에 헌신해야 한다. 그래야 셋 다 바뀐다.



자료 6) 좋은 시의 세 가지 가치

모든 훌륭한 예술작품에는 최소한 다음 세 가지 종류의 가치가 따로 또 같이 존재한다.
물론 시의 경우도 그렇다.

첫째는 인식적 가치다. 훌륭한 예술작품은 인간과 세계에 대해서 우리가 미처 몰랐던 무언가를 알게 한다. 그 ‘무언가’는 과학, 철학, 종교 등이 제공하는 인식적 가치와 함께 갈 수도 있고 그것들을 거스를 수도 있지만, 최상의 경우에는 그것들과 무관한 곳에서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 경우 그 인식적 가치는 과학, 철학, 종교의 언어들로 잘 번역되지 않을 것이다. 좋은 시에서 인식적 가치는 그 시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때 시는 내용물을 꺼내려하면 부서지고 마는 도자기와 같다.

둘째는 정서적 가치다. 훌륭한 예술작품은 우리를 기쁘게 혹은 슬프게 한다. 기쁨이 필요한 사람에게 기쁨을, 슬픔이 필요한 사람에게 슬픔을 제공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시에 요구되는 것들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 시는 기쁨을 슬프게 하고 슬픔을 기쁘게 해서 낯선 정서를 창출해내기도 한다. 그 경우 우리는 익숙한 정서를 시에서 재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시가 제공하는 낯선 정서에 서서히 젖어 들어가게 될 것이다. 어떤 정서는 특정한 시인의 특정한 시 안에서만 느낄 수 있다. 시는 정서의 창조다.

셋째는 미적 가치다. 훌륭한 예술작품은 아름답다. 시의 경우 그 아름다움은 대개 모국어의 조탁(彫琢)과 선용(善用)에서 생겨나는 아름다움이고 내용과 형식의 긴밀한 조화가 뿜어내는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 시는 우리가 흔히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을 전복하는 추의 미학을 보여주기도 하고 미와 추를 분별하기조차 어렵도록 심드렁한 방식으로 이상한 아름다움에 도달하기도 한다. 아름다움을 더욱 아름답게 하는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지만,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다.

좋은 시들에는 어떤 식으로건 앞서 말한 세 가지 가치가 포함돼 있겠지만 그 가치가 전달되는 방식은 제각각일 수 있다. 그것이 먼저 찾아오기 때문에 마중을 나가기만 하면 될 때도 있고, 독자가 그것을 만나기 위해 낯선 길을 더듬어 찾아가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분명하게 눈에 보여서 편안하지만 그래서 재미가 덜 할 때도 있겠고, 너무 희미해서 과연 그것이 있기는 한가 수상쩍어 보일 때도 있을 것이다. 대개 전자를 ‘고전적’이라 하고 후자를 ‘실험적’이라 한다. 그러나 오늘의 고전은 어제의 실험이었고 오늘의 실험은 내일의 고전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열린 마음으로 시의 넓이를 가늠해 보시길. 그것이 곧 우리 삶의 넓이이기도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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