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살 땐가, 재가한 엄마를 찾아 가출한 적이 있었다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거리 한복판에서 나는 오줌을 싸고 울었다
그날 이후, 나는 길치가 되기로 결심했다
고등학교 땐 한 여자의 뒤를 따라다녔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에서 막차를 놓치고 대신 잭나이프와 장미 가시를 얻었다
무허가 우리 집이 헐리고, 교회 종소리가 공중에서 무너져 내리고
나는 골목마다 뻗어나간 길들을 모두 묶어 나무에 밧줄처럼 걸고
거기에 내 가느다란 목을 동여맸다
노랗게 익은 길 하나가 툭, 하고 끊어졌고 나는 어두운 소나무밭에서
어둠의 뿔 끝에 걸린 뾰족한 달을 보았다
대학을 떨어지고 나는 온몸에 이끼가 끼어 여인숙에 누워있었다
손 안에 마지막까지 쥐고 있던 길 하나를 태워 물고 있었다
미로 속에 쥐를 가두고 쥐가 어떻게 길을 찾아가는지를 연구하는 실험은
쥐들의 공포까지는 배려하지 않지만
눈 내리는 숲속의 막다른 미로에서 내가 본 것은
얼굴이 하얀 하나님과 술병을 들고 물로 걸어 들어간 우리 아버지였다
폭설과 안개가 번갈아 몰려오는 춘천
그 토끼굴 같은 자취방을 오가며
대학을 졸업하면, 나는 아이들에게 길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은백양숲에선 길을 잃어도 행복했다
은백양나무 이파리를 펴서 그 위에 빛나는 시를 쓰며
세상에서 길을 잃었거나, 스스로 길을 유폐시켰던 자들을 나는 그리워했다
길들을 함부로 곡해했고 변형시켰으며
그중 어떤 길 하나는 컵에 심은 양파처럼 길게 자라
달까지 가 닿았다, 몇 번이고 희망은 희망에 속았다
달에 들어가 잠시 눈 붙이고 난 어느 늦은 봄날
눈을 떠 보니, 나는 마흔이 넘은 사내가 되어 있었다
몇 번의 사랑도 있었으나
길에서 나누는 사랑, 그건 길짐승들이나 하는 짓거리였던 것
안녕, 길에서 나누는 인사를 나누며
내비게이션으로도 찾아갈 수 없는 절벽을 몇 번이고 눈앞에 두었었다
누군가 정해놓은 노선이 사람들을 실어 나른다, 그리고
사람들은 체포당한 것처럼 길에 결박된다
풍찬노숙의 삶을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고 다시 막차를 놓쳤을 때
나는 알게 되었다, 더는 가고 싶은 길도, 펼쳐보고 싶은 지도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이 허무맹랑한 길로 다시 돌아오기까지 마음은 늘 고아와 객지였으니
엄마, 엄마아, 쥐새끼처럼
울고 있던 어린 나에게 따귀라도 올려부쳤어야 한 건 아니었는지
낡은 담장에 길 하나를 간신히 괴어놓고 서있던 늙은 벚나무에선
꽃들이 와르르,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길을 잃기로 작정한 사람에게 신은 더 많은 길을 잃게 하는 법
제 몫의 길을 모두 흔들어 떨어버린 늙은 벚나무는 이제 말이 없고
무덤에서 요람까지, 길에서 길까지
지상에는 길들이 흘리고 간 흙비가 종일 내리는 것이다
---
허리 가는 미녀들이 뱀처럼 득실대는 미개한 섬도 좋고
아무 나무에나 달라붙어 벌레처럼 종일 과일을 갉아먹을 수 있는 열대의 어느 나라도 좋다
아무튼 나는 연금도 없고 직장도 없고
밤마다 꿈을 꾸면 나타나 엉엉 한국식으로 우는
오래전 죽은 내 아버지도 싫다
주민등록증 말고는 증명할 게 없는
가난한 친척들이 싫다
만날 전쟁이 터질듯 떠들어대는 텔레비전 고정출연의
잘 싸우는 미국도 못 싸우는 북한도 그리고
나보다 잘생긴 탤런트들도 싫다
동 없어 죽은 조상귀신들이 나무열매처럼 주렁주렁 열린 밤하늘이 싫다
머리 길게 풀어헤치고 판소리가락으로 우는 것들이 싫다
아리고 아린 아리랑이 싫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세금 내고
내가 꼴등인 걸 자꾸 확인시키면서 거기 싸인하라 하고
그것도 다 민주주의라고 우기는 대한민국 헌법이 싫다
나는 어떻게 하든 여길 뜰 것이다
우선, 비참하지만,
팔자에 복이 될 만한 손금 하나 없는
내 무국적의 손바닥을 여권 삼아
이렇게 적는다
‘삥 뜯을 생각 마라, 나는 지금 여기에 없는 놈이다’
---
자신의 집이 속절없이 노출되고, 은근히 마모되거나 돌이킬 수 없이 훼손되며, 마침내 황량하게 버려지는 경험을 원하는 이들 (김영민 jk.n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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