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을 열고 들어가니 거울 안에 어머니가 앉아 계시고 거울 열고 다시 들어가니 그 거울 안에 외할머니가 앉으셨고 외할머니 앉은 거울을 밀고 문턱을 넘으니 거울 안에 외증조할머니 웃고 계시고 외증조할머니 웃으시던 입술 안으로 고개를 들이미니 그 거울 안에 나보다 젊으신 외고조할머니 돌아 앉으셨고 그 거울을 열고 들어가니 또 들어가니 또 다시 들어가니점점점 어두워지는 거울 속에 모든 웃대조 어머니들 앉으셨는데그 모든 어머니들 나를 향해엄마엄마 부르며 혹은 중얼거리며입을 오물거려 젖을 달라고 외치며 달겨드는데젖은 안 나오고 누군가 자꾸 창자에바람을 넣고내 배는 풍선보다더 커져서 바다 위로이리 둥실 저리 둥실 불리워 다니고거울 속은 넓고넓어지푸라기 하나 안 잡히고번개가 가끔 내 몸 속을 지나가고바닷속에 자맥질해 들어갈 때마다바다 밑 땅 위에선 모든 어머니들의신발이 한가로이 녹고 있는데청천벽력.정전. 암흑천지.순간 모든 거울들 내 앞으로 한꺼번에 쏟아지며깨어지며 한 어머니를 토해내니흰 옷 입은 사람 여럿이 장갑 낀 손으로거울 조각들을 치우며 피 묻고 눈 감은모든 내 어머니들의 어머니조그만 어머니를 들어올리며말하길 손가락이 열 개 달린 공주요!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문학과지성사 1985)
슬픈 서커스
그녀는 의자 앞에 대걸레를 세운다 대걸레의 손잡이는 푸른 플라스틱 바께쓰에 담겨 있다 푸른 바께쓰는 물 찬 신발 같다 바께쓰의 검은 땟물이 대걸레의 손잡이를 감싼다
그녀는 화장실 옆 의자에 앉는다 의자에 앉아선 자신의 유니폼 푸른 재킷으로 걸레를 감싼다 조금 전까지도 바닥을 닦던 걸레의 머리털에선 땟국물이 줄줄 쏟아진다 그녀는 그 걸레의 머리털 위에 모자를 하나 씌운다 그녀는 웃으며 자신의 팔 하나를 떼어 걸레의 팔에 달아준다 시궁창에서 놀던 십 년 전 남동생을 안듯 그녀는 걸레를 안는다 마치 의자 위엔 그녀가 앉고 그녀의 무릎 위엔 한 남자가 안겨 있는 것 같다 그녀는 대걸레 남자의 포켓에 손수건 하나 끼워준다 행복한 여자의 머리 위에서 손수건 꽃이 저절로 핀다
여자는 걸레를 안고 잠이 든다 걸레도 손을 들어 그녀의 꽃을 만져준다 그들은 너무 사랑하므로 포개어진 두 손은 하나처럼 보인다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보아도 둘이 합해 그들은 팔이 두 개다
푸른 바께쓰 신발이 그녀의 다리 사이로 파고든다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문학과지성사 1994)
이 시는 노동계급 여성의 아름다운 낮꿈을 대신 꾼다. 바께쓰에 대걸레를 거꾸로 세우고 모자를 씌웠다. 대걸레는 이제 남자가 된다. 그 다음 “그녀는 웃으며 자신의 팔 하나를 떼어 걸레의 팔에 달아준다”에서부터 이 시는 재현(현실)의 단계에서 구축(환상)의 단계로 넘어가고 시인의 유려한 개입을 통해 ‘그녀’의 결핍은 상상 속에서 충족된다. 그녀의 대걸레 남자는 폭력적인 남성성을 갖고 있지 않아서 “십 년 전 남동생” 같고, 덕분에 그녀는 능동적으로 그 사내를 “그녀의 무릎 위에” 앉힐 수가 있다. 그녀가 대걸레 남자의 포켓에 행커치프를 끼워주는 장면은 그녀의 욕망에 숨겨져 있는 계급적 무의식조차 암시한다. 김혜순의 80년대 시들과는 달리 이 시는 충만한 결합을 보여준다. 앞에서 읽은 「이 시대의 사랑법」(『우리들의 음화』)이 “아무래도 우린 다리가 너무 많아”라는 문장으로 끝났던 것을 떠올려 보면 “둘이 합해 그들은 팔이 두 개다”라는 이 시의 마무리는 확실히 낙관적이다. 이제는 폭력이 아니라 포옹이다. 이 상상 속에서 그녀는 “행복한 여자”가 되고, 마지막 구절은 성적 결합의 뉘앙스를 풍기며 이 ‘행복한 서커스’의 종착점으로 독자를 이끈다.
그러나 이 시는 정확히 반대로 읽힐 수도 있다. 충만한 사랑이 아니라 불가능한 사랑을 말하는 시로. 그렇게 읽으면 이 시는 사랑은 환상의 형식으로만 가능하다고 말하는 시가 된다. 그렇지 않은가. ‘대걸레 남자’는 대걸레이지 남자가 아니다. 그녀가 제 팔 하나를 떼어주지 않으면 관계는 성립되지 않는다. 폭력적인 남성성의 기억으로부터 이 환상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대걸레 남자를 ‘남동생’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게다가 대걸레가 정말로 남자가 되어 그녀의 꽃을 만져주고 그녀의 다리 사이로 파고드는 것은 그녀가 잠이 든 뒤, 그러니까 낮꿈이 아니라 진짜 꿈속에서다. 그렇다면 이 시가 그리고 있는 것은 행복한 사랑이 아니라 슬픈 자위가 아닌가. 이 모든 환상이 끝나면 그녀는 노동계급 여성의 삶으로 되돌아갈 밖엔 없다. 그래서 “행복한 여자”를 그리고 있음에도 이 시의 제목은 ‘행복한 서커스’가 아니라 ‘슬픈 서커스’이다. 서커스란 무엇인가. 인간이 제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벌이는 곡예다. 그러니 서커스는 본래 슬픈 것이 아닌가. 이 시는 얼핏 김혜순의 시 세계에 갑자기 튀어나온 행복한 연애시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사랑의 불가능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시로도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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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말씀이 아니다. 말하는 형식이다. 그러므로 장르는 운명이다. 나는 시라는 장르적 특성 안에 편안히 안주한 시들은 싫다. 자기만의 형식이 없고 목소리만 있는 시들도 싫다. 나는 시라는 운명을 벗어나려는, 그러나 한사코 시 안에 있으려는, 그런 시를 쓸 때가 좋았다. 그 팽팽한 형식적 긴장이 나를 시쓰게 했다.
이리 와요 아버지 내 음부를 하나 나눠드릴게 아니면 하나 만들어드릴까 아버지 정교한 수제품으로 아버지 웃으세요 아버지 아버지의 첫날밤 침대 맡에는 일곱 어머니의 창자로 짠 화한이 붉디 푸르게 걸려 있잖아요 벗으세요 아버지 밀봉된 아버지 쇠가죽처럼 질겨빠진 아버지의 처녀막을 찢어드릴게 손잡이 달린 나의 성기로 아버지 아주 죽여드릴게 몇 번이고 아버지 깊숙이 손잡이까지 깊숙이 아버지 심장이 갈래갈래 터져버리는 황홀경을 아버지 절정을 아버지 비명의 레이스 비명의 프릴 비명의 란제리로 밤단장한 아버지 처년 척하는 아버지 그래봤자 아버진 갈보예요 사지를 버르적거리며 경련하는 아버지 좋으세요 아버지 아버지로부터 아버지를 뿌리째 파내드릴게
_김언희, 「가족극장, 이리 와요 아버지」 전문 (『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 저 여자』, 민음사, 2000)
김언희에게 남자는 ‘좃대가리’이고 여자는 ‘구멍’이고 모든 관계는 ‘섹스’다. 그녀의 눈으로 보면 인간, 사랑, 가족, 문명 따위는 모두 허위에 불과한 것이 된다. 모든 것은 ‘좃대가리와 구멍의 섹스’로 환원될 수 있다고 그녀는 믿는다. 환원되지 않는 것은 관념이거나 가상일 것이다. 이 점을 증명하기 위해 그녀는 주도면밀한 시적 난교를 행한다. 아버지와도 하고 어머니와도 하며 시체와도 한다. 한두 편의 위악적인 시 정도는 누구나 쓸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어째서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써야 한단 말인가, 라고 말하는 타입이다. 너무나 명쾌하고 너무나 집요하다. 소월의 「진달래꽃」과 오규원의 「한 잎의 여자」를 패러디한 두 편의 시를 읽어보는 것으로도 족하다. “너는 나를 뿌려진 나를 밟고 간다 즈려밟는 발이 내 몸 속에 푹푹 빠진다.”(「역겨운, 역겨운, 역겨운 노래」) “나는 한 구멍을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 같은 쬐끄만 구멍, 그 한 잎의 구멍을 사랑했네.”(「한 잎의 구멍」) 그녀가 그리는 섹스에는 그 무슨 생산, 풍요, 열락 같은 것이 들어설 틈이 없다. “도살장”(최승호) 아니면 “지옥도”(남진우)다. 이런 방식으로 그녀는 이전의 여성시 대부분을 내숭으로 만들었고 이후의 여성시 상당수를 아류로 만들어버렸다.
위의 시는 그 중에서도 각별히 선명한 전략을 내장하고 있어 인용할 만하다. 두 가지 유혹을 피해야 할 것 같다. (1)우선 피해야 할 것은 속류 정신분석학적 독법이다. 그녀가 이토록 아버지에게 적대적인 것은 그만큼 아버지에 대한 애착이 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의 시는 실패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소산이다 운운. 그러나 김언희의 시 행간에서 무의식적 진실을 찾아내려는 시도는 별 소득이 없는 일이 될 공산이 크다. 그녀의 시는 지극히 의식적이고 전략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그녀는 확신범이다. (2)더불어 피해야 할 것은 그녀의 시를 알레고리로 간주하는 독법이다.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니고 딸은 딸이 아니며 섹스는 섹스가 아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의 ‘기표’일 뿐이며, 그녀의 본의는 그 기표들 너머에 있다 운운. 그러나 이런 독법은 텍스트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독자를 위한 것이다. 그녀의 고통스러운 텍스트를 여하간 견딜 수 있을만한 것으로 만드는 방법이다. 텍스트는 격렬하게 섹스를 하고 있는데, 왜 그 텍스트를 발기부전과 불감증의 텍스트로 만들어야 하는가.
이 시의 힘은 두 가지 전략과 더불어 생겨난다. 첫째, 남성과 여성의 섹스를 아버지와 딸의 섹스로 치환하기. 정상적인 섹스와 근친상간적인 섹스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섹스의 근저에는 타자의 타자성이라는 심연이 있고, 그 심연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주체와 타자 사이에는 지배와 종속의 관계가 형성되며, 그 관계는 이를테면 부녀관계를 재생산하는 것으로 귀결될 수 있다. 가장 정상적인 섹스가 가장 근친상간적인 섹스일 수 있다, 라고 이 시는 말한다. 둘째, 근친상간으로 치환된 섹스의 현장에서 다시 남성과 여성의 위치를 전복하기.이 시의 수사학은 남성의 성적 언어를 여성 화자가 빼앗아 오면서 형성된다. “아버지의 첫날밤”, “아버지의 처녀막을 찢어드릴게”, “아버지 아주 죽여드릴게”, “처년 척하는 아버지 그래봤자 아버지는 갈보예요”, “아버지 좋으세요?”와 같은 식이다. 이 술어들의 성별은 모두 남성이다. 남성이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하고 정복할 때 사용하는 술어들이다. 남성에게서 그 술어들의 소유권을 박탈하라, 그리고 그 술어를 그들에게 모욕적인 방식으로 되돌려주어라. 문화비평에서 흔히 재전유(再專有, reappropriation)라고 부르는 바로 그 작업이다.
인용한 시에는 이와 같은 치환과 전복의 이중 전략이 선명하게 구현되어 있다. 김언희의 다른 시들에서도 이 전략은 많건 적건 활용된다. 덕분에 그녀의 시에서 두 이성애자들의 아름다운 결합이라는 부르주아적 섹스 관념은 가차 없이 조롱당한다. 그 섹스가 근친상간, 시간, 사이버섹스, 자위 등으로 분방하게 치환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아울러 섹스의 과정에서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남성과 여성의 역할분담이 교란된다. 가장 내밀한 순간에 흘러나와 남성과 여성의 성적 위치를 규정해주는 성적 술어들(예컨대, 남성의 “좋아?”와 여성의 “좋아!”)의 성별을 전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성성과 여성성의 관례를 재생산하는 시는 공허하다. 그런 시는 남성과 여성 어느 쪽도 오르가즘을 느끼지 못하는 섹스와 다르지 않다. 섹스를 했으나 하지 않은 것과 같다. 김언희는 아버지 위에 올라타고서, 한다. 이것은 기승위의 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