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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 멜랑콜리아, 정육점 여주인

-멜랑콜리아
그는 나를 달콤하게 그려놓았다 뜨거운 아스팔트에 떨어진 아이스크림 나는 녹기 시작하지만 아직 누구의 부드러운 혀끝에도 닿지 못했다 그는 늘 나 때문에 슬퍼한다 모래사막에 나를 그려놓고 나서 자신이 그린 것이 물고기였음을 기억한다 사막을 지나는 바람을 불러다 그는 나를 지워준다 그는 정말로 낙관주의자다 내가 바다로 갔다고 믿는다



_정육점 여주인
유리창 밖으로 붉은 눈발 날린다
커다란 칼을 들고 다정한 눈망울로 바라보는 수소를 힘껏 내리치던
때가 있었지, 요즘엔 아무 일도 없다
냉기로 달아오르는 난로 옆에서 그녀는 중얼거린다
천장에 오래 켜놓은 형광등이 깜빡인다, 칼은 녹슬었고

 

오늘 밤에는 들판에 나가야겠다
풀 먹인 하얀 앞치마에 가득히 떨어지는 별을 받으러,
장미 성운에서 온 것들이 쇠 다듬는 데 최고라니까
그녀는 왼쪽 유방의 부드러운 뚜껑을 열고
하얀 재를 한 움큼 쥐어본다

 

유리창 밖 풍경은 거대한 얼음 창고 안에 갇혀 있다
눈보라 속 나무들이 공중에 냉동고기처럼 검게 달려 있고
유리창에 입김을 불어가며 그녀는 바라본다
붉은 눈송이들이 녹아 흐르며
피범벅된 송아지 같은,
제대로 일어서지 못하는 물렁한 세계를,

 

미리 갈아놓은 칼로 겨울의 탯줄을 끊어야 한다
길고 부드러운 혀로 떨고 있는 어린 것들을 핥아주는 일.

 

여자가 성에 낀 유리창을 활짝 연다
눈이 그치고 맑은 하늘에 토막 난 붉은 구름 떠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