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처럼 일렁이던 지난 기억의 파편, 순간들, 그 후... -알레산드르 코모딘 감독의 <자코모의 여름>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국제경쟁에 오른 알레산드르 코모딘 감독의 <자코모의 여름>은 환영처럼 일렁이던 어떤 기억의 파편들, 사라진 순간들에 대한 인상적인 스케치다.
영화가 시작되면 어두운 화면위로 (상대적으로) 긴 크레딧이 뜨고 진다. 그 어둠너머로 새소리인 듯, 바람소리인 듯, 희미한 소리가 아련히 들려온다. 어디서 들려오는 소리일까? 라는 궁금증을 싹둑 자르기라도 하듯 보청기를 낀 뒷모습의 남자(그는 청각장애인이다)가 드럼을 두드린다. 딱히 어떤 리듬을 연상시키지는 않는 그 두드림이 멈추고 나면 10대 후반쯤의 한 남자, 자코모(아직 소년의 티를 벗어나지 못했다)와 한 여자, 스테파니가 숲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걸 카메라가 뒤따르고 있다). 여느 때와 달리 다른 길을 선택한 그들이 헤매듯 걸어간 길 끝에는 서프라이즈처럼 강이 있다.
어느 누구도 쉽게 찾아내 가보지 못할 강처럼 그 강의 풍경은 비현실적이다. 그 강에서 남자와 여자는 수영을 하고 모래장난을 치고 티격태격 거리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두 남녀의 행위나 에피소드는 별 드라마없이 파편처럼 이어지지만 친구인 듯한 두 사람의 감정은 미묘하게 부딪치면서 한 여름날의 공기를 만든다. 휴식을 취하러 나온 두 사람은 간식을 먹은 후, 여자는 음악을 들으며 오수에 잠겼고 남자는 아이팟을 뒤적인다. 말 그대로 피크닉의 오후.
이 강가 씬을 기준으로 과거를 회상하는 듯, 자코모와 스테파니가 친구처럼, 연인처럼 함께 한 여러 순간의 장면들이 나열된다. 여자, 스테파니를 탐색하면서 무언가 모를 초조와 긴장에 의해 새침하거나 질투하기도 하는 ‘소년’같은 모습의 남자, 자코모의 시선을 중심으로 서투른 몸짓과 어색한 순간들이 두 사람사이를 묘하게 공전한다.
다시 강가의 두 남녀. 물놀이를 하고 신경전 비슷한 티격태격거림이 과격해질 무렵, 여자가 남자에게 행복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노을을 뒤로 한 채 자전거를 타고 숲길을 나오는 두 남녀를 비추며 여름날 어느 피크닉은 끝이 난다.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숲길을 빠져나오는 둘의 모습을 앞에서 정면으로 잡을 때를 제외하곤 연신 뒤에서, 옆에서, 또는 멀리서 제3자의 (객관적인) 시선인 것처럼 비춘다. 카메라의 이런 움직임은 등장인물이나 드라마에 감정이입을 시키지 않는다. 카메라는 천천히 느리게 진행되는 영화의 리듬과 함께 지루함을 무릅쓰고 두 남녀를 관찰하는 자리에 관객을 동참시킨다.
영화 내내 상당한 시간, 두 남녀가 친하지만 어색한 듯, 익숙하지만 무료한 듯, 함께 한 시간을 파편처럼 보여주면서 관객들에게 이런 관찰자의 시선을 요구한 까닭은 무엇일까?
강가 씬의 마지막 장면, 클로즈업 된 얼굴의 스테파니가 화면 밖 자코모에게 말한다. 행복은 사소한 것들에 있다고. 너는 사소한 것들에 만족할 줄을 몰라 행복을 모른다고. 너무 노골적일수도 있는 이 전언에 대한 무언의 공감인지 깨달음인지 모를 시간을 지나 그들은 그 자리를 떠나온다, 아니 내내 그들 가까이를 맴돌던 카메라가 이제 그들에게서 멀어져 가며 그 시간에 마침표를 찍는다. 또 다른 여자가 등장해 다시 영화가 이어질 때까지.
영화는 지루하게 바라보았던 그 드라마틱하지 않던 시간들이 사실은 이제는 사라져 버린, 소소하지만 반짝반짝 빛나던 순간들이었다는 것을 역으로 상기시킨다. 어색하게 주춤거렸지만 의미없는 듯 투닥거리던 몸짓이나 표정, 함께한 시간, 그때 빛나던 햇살이나 나무, 길의 촉감, 숲의 냄새나 소리까지 소소하지만 반짝였던 그 모든 감성과 순간들 위에 현실의 우리가 서 있음을 알린다.
특히나 아직 소년의 티를 벗어내지 못하고 모든 것이 서툴고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첫 사랑의 감정처럼 우왕좌왕하던 자코모가 좀 더 성숙한 남자로 보여지는 마지막 장면은 어색한 몸짓과 작은 긴장이 가져다주던 충만한 사랑의 감정이 점프한 시간을 대면하게 하면서 어제의 그 강가가 현재에 지속되지만 사뭇 다를 수 있음에 대해 보여준다.
알레산드르 코모딘 감독의 첫 영화, <자코모의 여름>은 어렴풋한 어떤 시절, 또는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장면엔 반짝거리는 감성으로 서툴게나마 설레고 떨렸던 어느 한 여름, 희미하게 감지되는 순간과 기억들에 대한 인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