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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트월드


한나 아레트가 사회적 공간이 사라지고 도로와 상업적 공간밖에 없어 사막이라고 표현했던, 그래서 사람이 살고있지만 비어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고스트 월드인 미국의 서버브에 고등학교를 갖 졸업하고 내팽겨쳐진 방황하는 두 소녀의 성장기라고할까요?1990년대판 '호밀밭 파수꾼'이라는 평을 받는 작품입니다. 

냉소도 성장의 일부 – 『고스트 월드』

김낙호(만화연구가)

누구나 성장과정에 있어서 한번쯤 겪게 되는 세계관의 변화가 있다. 그것은 바로 세계가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크지 않고, 대단하지 않고, 한 마디로 별 볼 일 없다는 것. 당연한 일이다. 내가 당장 그 전에는 못하던 것들을 이제는 해낼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어릴 때 동경하던 그 엄청난 것이 아니라, 알고 보면 다 사람 사는 것이 거기서 거기고 세상 돌아가는 것도 결국 그런 사람들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 완전히 실망할 만큼 자신이 잘나지도 않았다는 것이 비극이라면 비극이겠지만. 그 괴리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냉소다. 아예 좀 더 성장하다보면 자기 자신의 한계에 대해서도 점차 확실하게 인식을 하고 그 세상 속에서 자신이 살아가야한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기 시작하며 다시금 세계관이 바뀌기에, 그 도발적인 냉소는 전환기의 미묘한 지점에서 생겨나는 독특한 현상이다. 이렇게 볼 때, 세상을 냉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성장의 일부인 셈이다.

『고스트월드』(댄 클로우즈/박중서 옮김/세미콜론)은 90년대 미국이라는 현실 속에서 이런 냉소를 현미경처럼 관찰하는 성장물이다. 주인공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이후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두 여성 친구들이다. 하지만 세상은 너무나 별 볼일 없는 곳이고 사람들은 위선과 천박함으로 도배되어 있기 때문에 굳이 신경써서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적지 않은 고역이다. 연애를 하는 것 조차 유치하게 생각하는 이 둘에게, 유일한 의지할 만한 것은 결국 서로 밖에 없다. 그렇다고 서로에게 어떤 끈적한 연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냉소적 시선으로 잡담을 나누는 것이 바로 그들의 우정의 끈이다. 내 친구인 너도 나와 같이 이 세상의 하찮음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듯한 자세로 말이다. 이들이 바라보는 세상과 그 세상 속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유령같이 희미하고 신기루 같은 것이어서, 만화의 차갑게 바랜 푸른 2도 색조 마냥 건조하고 무의미하다. 작품은 이들이 주변인들과 더불어 몇 가지 크고 작은 일들을 겪으며 십대의 불안을 애써 억누르다가, 결국 그런 삶의 방식을 벗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귀결인 ‘성장’과 이별으로 끝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렇게 이야기하고 나면 많은 이들이 『호밀밭의 파수꾼』을 떠올릴 것이다. 실제로 미국에서도 이 작품을 “호밀밭의 파수꾼이 이전 세대에 주었던 느낌을 현재 세대에 주는 작품” (빌리지 보이스) 으로 평가하곤 한다. 하기야 성장 과정의 어떤 순간을 특정 짓는 그 냉소적 시선은 세대나 장소를 초월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으니까. 하지만 나름대로 격동기를 거치고 평화로 접어드는 50년대의 미국과는 달리, 『고스트월드』의 90년대 미국의 일상 공간은 그만큼 드라마틱하고 막나가는 무언가가 있을 법한 흥미진진한 곳이 아니다. 변변치 않은 인생들이지만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지도, 너무 위악적으로 포기하면서 “우리에게 내일은 없어”를 외치지도 않는 어중간함이 두 주인공의 매력이다. 그러나 어쩌다가 한번쯤, 견고하게 봉인한 괴리감이 살짝 감정적으로 터져 나오기도 하는데, 그럴 때는 속절없이 혼자 이유 없이 운다. 그것이 바로 이들이 스스로 유령 같은 곳이라고 선포한 그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법이다.

하지만 두 주인공은 세상의 천박함을 비웃으면서도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자신들에 대한 자괴감을 느끼지 않으며 살아가는 법을 한 가지 파악하고 있다. 바로 구닥다리 하위문화에 대한 이상한 애정이 그것이다. 이들이 바라보는 세상은 고상한 척 신선한 척 하는 위선으로 가득하기에, 구닥다리 속에서 가치를 발견하는 것을 멋진 것으로 여기는 것. 구닥다리 하위문화의 많은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도 충분히 자각하고 있기에 그 촌스러움 역시 비웃음의 대상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경멸의 냉소가 아니라 순수한 유치함을 즐기는 쾌감에 가깝다. 그렇기에 어설픈 50년대식 레스토랑을 찾고, 성인용품점에서 사온 가죽가면을 뒤집어쓰고 놀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비웃음과 애정, 집착과 거리감은 생각보다 가깝게 붙어있다. 하기야 냉소로 표현되는 성장의 한 지점 자체가 그 만큼 복합적일 수 밖에 없다.

만화를 관통하는 바랜 푸른 색감의 2도 인쇄는 이러한 세계를 냉정하게 묘사해낸다. 여기에는 최소한의 낭만적 과장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여기에 작가 특유의 경직된 듯 한 가는 선의 필치로 묘사하는 짜증스러운 표정들이 결합하자, 독자들 역시 두 주인공들 만큼 갑갑해진다. 대사가 너무 많아서 다른 만화에서 흔히 느낄 법한 정상적(?) 독서속도 자체가 불가능한 대화 위주의 연출 역시 그 갑갑함의 일부가 되어준다. 벗어나고 싶지만 마냥 꿈 많은 소녀처럼 박차고 떠나기도 굳이 귀찮은 동네에 대한 세부적 묘사는 보너스다. 형식이 내용과 좋은 호응을 이룰 때 주는 깊이 있는 독서감이야 말로 가장 훌륭한 수준의 만화를 만들어내는 비법이다.

『고스트월드』의 한국어판은 번역자의 노고가 특히 돋보인다. 원작의 거칠면서도 나름대로 고상하게 냉소를 보내는 여고생 언어의 뉘앙스를 전달하기 위하여 비속어를 자유롭게 활용하면서도, 흔한 유행어 따위에 의존하지 않는 균형을 잡아가고 있다. 반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러 미국 대중 문화적 맥락에 대해서는 친절하게 주석을 달아주는 것 역시 세심하다 (물론 가끔은 ‘지나칠 정도로’ 친절해서 독서 흐름이 끊길 정도인데, 이왕이면 각주보다 미주로 처리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한다). 한국의 독자들은 좋은 작품에 대해서 이 정도의 작업으로 예우를 해준 번역자와 출판사에 감사를 보내야 마땅할 것이다 – 특히 이 작품의 영화판이 국내에 들어왔을 때의 부실한 번역자막을 기억하시는 분들이라면 더욱 더 말이다(제목부터 무려 ‘판타스틱 소녀백서’였으니…).

세상을 그렇게 냉소하던 이니드는 결국 동네를 벗어나게 되고, 그렇게 해서 떠나간 이니드는 동네에 남아서 점원으로 일하는 레베카를 먼 발치에서 지켜보며 끝난다. 사람에 대해서든 세상에 대해서든, 성장의 과정을 겪은 후 내리는 최선의 ‘성숙한’ 선택은 결국 적당한 거리감인지도 모르겠다.

PS. 주인공 이니드의 본명은 ENID COLESLAW인데, 이것은 작가의 이름 DANIEL CLOWES를 재조합한 것. 역시 이니드의 시니컬 대마왕급 세계관의 진짜 주인공은 작가 자신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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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 Copyleft 2007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고스트 월드
대니얼 클로즈 글.그림, 박중서 옮김/세미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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