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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보선, 나라는 말

엔터는 나중에

나는 나라는 말을 썩 좋아하진 않습니다 내게 주어진 유일한 판돈인 양 나는 인생에 나라는 말을 걸고 숱한 내기를 해왔습니다 하지만 아주 간혹 나는 나라는 말이 좋아지기도 합니다 어느날 밤에 침대에 누워 내가 나라고 말할 때 그 말은 지평선처럼 아득하게 더 멀게는 지평선 너머 떠나온 고향처럼 느껴집니다 나는 나라는 말이 공중보다는 밑바닥에 놓여 있을때가 더 좋습니다 나는 어제 산책을 나갔다가 흙길 위에 누군가 잔가지로 써놓은 '나'라는 말을 발견했습니다 그 누군가는 그 말을 쓸때 얼마나 고독했을까요 그 역시 떠나온 고향을 떠올리거나 홀로 나아갈 지평선을 바라보며 땅 위에 나라고 썼던 것이 겠지요 나는 문득 그 말을 보호해주고 싶어서 자갈들을 주워 주위 에 빙 둘러 놓았습니다 물론 하루도 채 안돼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어서 혹은 어느 무심한 발길에 의해 그 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요 나는 나라는 말이 양각일 때보다는 음각일 때가 더 좋습니 다 사라질 운명을 감수하고 쓰인 그 말을 나는 내가 낳아본 적도 없는 아기처럼 아끼게 됩니다 하지만 내가 나라는 말을 가장 숭배할 때는 그 말이 당신의 귀를 통과하여 당신의 온몸을 한바퀴 돈 후, 당신의 입을 통해 너라는 말로 내게 되돌려질 때입니다 나는 압니다 당신이 없다면 나는 나를 말할 때마다 무(無)로 향하는 컴컴한 돌계단을 한칸씩 밟아 내려가겠지 요 하지만 오늘 당신은 내게 미소를 지으며 '너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지평선이나 고향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나는 압니다 나는 오늘 밤 내게 주어진 유일한 선물인 양 너는 말이야 너는 말이야를 수없이 되뇌이며 죽음보다는 평화로운 잠속으로 서서히 빠져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