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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뭔가 할 말을 생각해보려 했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전에도 이런 느낌이 든 적이 있었다. 마비 상태나 무지근한 절망마저 넘어선 어떤 느낌. 세상이 날것 그대로의 핵심으로, 앙상한 문법적 뼈대로 쪼그라든 느낌. 망각으로 빠져든 사물들을 천천히 뒤따르는 그 사물의 이름. 색깔들. 새들의 이름. 먹을 것들. 마침내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들의 이름마저.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만큼 덧없었다. 이미 사라진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 지시대상을, 따라서 그 실체를 빼앗긴 신성한 관용구. 모든 것이 열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어떤 것처럼 스러져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깜빡 하고 영원히 꺼져버리는 어떤 것처럼.

 

이번에는 깨어나기가 너무 싫은 풍요로운 꿈들. 지금의 세상은 모르는 것들. 추위 때문에 남자는 어쩔 수 없이 불을 손보러 갔다. 그녀가 젖가슴에 달라붙는 얇은 장밋빛 가운을 입고 이른 아침에 잔디를 가로질러 집으로 오던 기억. 남자는 떠오르는 모든 기억이 그 기원에 어떤 폭력을 행사한다고 생각했다. 파티의 게임에서처럼. 말을 다음 사람에게 전달하는 게임에서처럼. 따라서 아껴야 한다. 기억하면서 바꾸어버리는 것에는 알든 모르든 아직 어떤 진실이 담겨 있으니까.

 

한때 산의 냇물에 송어가 있었다. 송어가 호박빛 물속에 서 있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지느러미의 하얀 가장자리가 흐르는 물에 부드럽게 잔물결을 일으켰다. 손에 잡으면 이끼 냄새가 났다. 근육질에 윤기가 흘렀고 비트는 힘이 엄청났다. 등에는 벌레 먹은 자국 같은 문양이 있었다. 생성되어가는 세계의 지도였다. 지도와 미로. 되돌릴 수 없는 것, 다시는 바로잡을 수 없는 것을 그린 지도. 송어가 사는 깊은 골짜기에는 모든 것이 인간보다 오래되었으며, 그들은 콧노래로 신비를 흥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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