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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

들판을 달리는 토끼 -준규에게

토끼라는 이름을 가진 이 소리는

당신이 밤새 두드리는 머릿속의 열기 한가운데 너른 벌판

을 열고 뛰어나올지 모른다

토끼라는 것이 가벼운 발과

소리나지 않는 입과

가늘게 찢어진 눈 옆에 길고 뾰족한 두 귀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당신은 불만을 표시해도 괜찮고

박수를 치며 환영해도 나쁘지 않다

토끼는 어쩌면 당신이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질문에 대한 대답일 수 있으므로

 

토끼는 달린다

토끼는 달린다

 

당신이 원하는 바로 그 대답이 아닌 토끼도 달리고

당신이 원하던 바로 그 토끼도 빠른 발로 대답하며 달아난다

여전히 대답하지 않는 저 먼 시간의 침묵까지 짊어진 토끼는

자기가 토끼라는 사실을 잊기 위해서라도 달린다

자기가 토끼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라도 달린다

 

토끼가 달린다

토끼는 달리면서 자꾸만 토끼 아닌 것이 된다

토끼 아닌 것이 된 토끼가

오래도록 토끼가 되기 위해 달리고 또 달린다




토끼가 달리는 이곳은 당신이나 내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어느 바닷가여도 좋고

토끼를 바라보는 그 눈이 수십 년 전에 첫 음을 터뜨린 어느

음악 속의 귀 쓰라린 진공이어도 좋다

토끼는 유일한 한 마리가 더욱 좋을 수 있으나

토끼가 유일한 한 마리라는 건

토끼를 더더욱 사랑할 수 없는 유일한 조건이 된다

토끼가 달린다

사랑할 수 없는 토끼가 달리고

달리면서 토끼는 자꾸만 사랑하고 싶은 토끼가 된다

토끼가 토끼 바깥은 달린다

토끼의 바깥에서 토끼는 오래도록 토끼가 되기 위해 달린다

 

토끼는 달리면서

새가 되기도 하고

가랑잎처럼 쓰러지기도 하고

동전이 되어 구르다가

자동차 앞바퀴에 깔려 제 생의 모든 슬라이드 필름을 상영

해버린 생쥐마냥 내장을 드러내기도 한다

토끼 이외의 것이 될 수 없는 토끼는

토끼 이외의 것들을 살피면서

李箱이 되고

金洙暎도 되고

李小龍도 되었다가

골문 앞에서 요동치는 朴智星처럼 뛰어올라

다시 바람이 되어 사라지지만

토끼는 아무래도 토끼 아닌 것들 속에서

스스로의 이름을 발놀림보다 빠르게 잊어버리는 게

무엇보다 토끼다울 따름이다


무엇보다 토끼다운 토끼가

넓은 들판을 달린다

토끼가 달릴수록 들판은 더 넓다

토끼가 달리기에도 넓고

토끼가 달리지 않기에도 넓고 넓은 들판은

토끼라는 소리가 불러온 토끼 아닌 것의 새로운 이름이다

토끼는 자신의 빠른 발이 도무지 우리에게 어떤 존재로 불릴지에 대해 관심이 없다

 

토끼가 달린다

토끼가 들판을 달리면서 들판을 지운다

지워진 들판이 자꾸만 토끼를 불러 토끼를 지운다

지워진 토끼가 지워지지 않으려고 달리고 또 달린다

 

앞발이 내딛는 삼백만 분의 일 초 사이에서

토끼는 문득 절벽이 되고

뒷발이 밀리는 오백만 분의 일 초 사이에서

토끼는 불현듯 새로운 별을 임신한 채 멀고 먼 은하에서 실족한다

토끼는 밤새 달리지만

밤새가 밤새도록 울어 텅 비워낸 밤의 한복판에서

토끼는 언제나 첫울음 우는 별들의 앳된 주먹이나 핥으며

평생토록 달리며 지워야 할 들판을 낳는다

평생토록 달려도 지워지지 않을 들판을 그린다

 

토끼가 달린다

토끼가 들판을 달린다

들판을 달리는 토끼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들판을 달리는 토끼가

모든 걸 보아버렸기 때문이다

 

토끼가 달린다

토끼가 달린다

달릴 수 없는 토끼가

죽을 때까지 달릴 수 없는 들판을 달린다








낮잠, 바람의 묘지

 

축 늘어진 태양이 속살을 헤집는다 입김 하나가 바꿔놓은

바람의 방향을 추적하면 당신이 오래 전에 적어놓은 미래의

기별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골목 어귀에 숨어 오수에 빠진

고양이의 갈색 털 한 가닥이 얕게 가라앉은 시간의 등피를

간질인다 영원이 들려주는 음악이란 이토록 가벼운데 창 밖

에서 쿵쾅쿵쾅 대기를 지압하며 넘어오는 피아노 소리는 숨막히게

슬픈 곡조만 헛된 꽃가루처럼 날려댄다

 

슬픔이 이토록 구차한 것인 줄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오래

전에 사막으로 건너가 뜨거운 피를 말렸을 것이다 세월이 빠

져나간 몸뚱이는 병든 바다처럼 오래된 물길을 떠올리며 미

지근해진 머릿속의 잔해들을 헤쳐나간다 몸이 지난 자리마다

고여 있는 기억들을 수시로 처가는 건 내일에 속하는 그때의

바람일 뿐, 영원한 현재 속에 갇힌 이 짧은 죽음은 잠에서 깬

고양이가 다른 골목으로 불현듯 사라지는 모습처럼 도대체

정체가 없다 오로지 빚을 진 데라고는 죽음밖에 없는 내가 순

간마다 바뀌는 바람의 방향 속에 모든 죽음을 완성해버린 것

이라면 그토록 가혹한 부채탕감이 또 있겠는가

 

이 길고도 얕은 잠은 당신이 미리 써버린 과거의 내 일기

라는 걸 알더라도 나는 여전히 당신을 아는 척할 수 없다 늦

은 밤 집 앞에서 다시 만난 갈색 고양이의 푸른 눈빛이 무언

가 알려준다 하더라도 밤이 되도록 끊이지 않는 이 검은 피아

노의 하소연에 응해줄 대답을 나는 오래 전에 다 뱉어버리고

말았다 피아노 소리가 멈추고 나서야 고양이 눈 속에 숨은 당

신은 비로소 나의 기록들을 전부 펼쳐 보이겠지만 지금은 바

람이 없기에 깨어남도 망가짐도 없다 뚜렷하게 죽어 있느니

혼란스레 사라지리라

 




오래된 자화상

 

빗물이 두 눈을 꿰뚫고 오랫동안 알고 있던 그가 비로소 낯설다

나는 그를 내 인생의 카피본으로 읽었었다

우산 없이 고백하는 그의 길고 긴 얘기를 들으며

젖은 몸이 비로소 물이 될 때까지

나는 숨을 쉴 수 없다

 

눈을 감고 한쪽 귀에서 다른 쪽 귀로 빠져나간 바람이

발끝을 툭 치며 달아나는 소리를 듣는다

사방에서 짖어대는 개들은 이 길고 긴 밤의 주인이

자신과 닮지 않은 새끼들을

수태시키는 광경을 목격했다

 

누군가 떨어져나간 어둠 한 귀퉁이에 그는 여전히 서 있다

흐르는 빗물에 드러누운 해

끝끝내 젖지 않는 밤의 저편에서

낯선 짐승들이 태양의 뒷덜미를 물어뜨는 모습이 상연된다

나는 말라붙어 동공이 빠친 채로 사후의 강 너머에서 발견될 것이다

사라진 몸에서 사라짐을 지우며 오랫동안 짐승들과 함께 할 것이다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

 

그가 내게 처음 한 말은

물이 모자라 거죽이 붉게 부르튼 어느 짐승에 관한 얘기다

듣고 보니 말이라 했지만,

그 짐승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사람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다

비이거나 혹은 바람이거나

아직도 살 만큼 물이 충분한 내 몸에 파충류의 피륙 같은

돌기가 솟았던 걸 보니

짐짓 실체가 없는 무슨 진동 같은 거였는지 모른다

말이거나 비이거나 바람이거나

생각해보니 그것은 내 촉수를 자극해 조금씩 부풀면서

존재를 확인하려고 하면 사라지고 만다

만져지는 대신

시간과 시간 사이에서 무성생식한 우주의 굵은 탯줄만 낡은 가구들 틈에 끼여

목청껏 다른 만들을 웅얼거리는데

이 다른 말이라 하는 것도,

듣고 보니 말이라 했지만,

책에 쌓인 먼지라거나

같이 있다 방금 자리를 뜬 사람의 미진한 온기 따위인지도 모른다

내 체온이 닿았던 것들은 나 이후로는

사망의 시간 속에 스며들어가

전혀 다른 종류의 생물로

내 체온이 발원하는 지점 깊숙이 파고든다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

냉온이 빠르게 교차하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나라고 하는 건

한갓 누군가의 원망을 대신 실현하려

파리나 모기 따위에게로 쏠리는 식욕을 감춘 채 인간의 영역에 파견된

짐승과도 같다는 것

들려주려니 말이 자꾸 새끼를 치지만,

내가 들려주려는 말이 결국 내 체온을 액면 그대로 종이 위에 처바르는 일이듯

붓끝에서 뭉치거나 흩어진 물감들이

공기의 흐름을 타고 저 나름의 궤도로 일렁이면서 시간의

어느 정점을 물들이면

나는 곧 나로부터 이탈되어 본래의 땅으로 돌아간다

들려주려니 땅이라 이름 붙였지만,

인간도 아니고 인간 아닌 것도 아닌 만물이 때 되면 허물

벗어 다른 생을 낳는 그곳을

허공이라 한들 어떠리








/
나쁜취향










고등어 연인


이 고등어 살을 발라 먹던 여자가 살짝 웃던 날이었다

입술에 묻은 고등어 기름이 낡은 암자의 처마처럼 햇빛을 받고 있었다

사진기를 들이대며

자꾸 웃어 보이라던 여자가 이내 눈물을 흘렸다

배 속에 삼킨 고등어가 알이라도 까는지

물컹물컹 낯선 감정들이 몸 안에 물길을 내고 있었다

여자는 입술을 핥던 혀로 내 얼굴을 핥았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기가 심장에 넘쳐흘렀다

여자는 일그러진 내 얼굴을 향해 연신 셔터를 눌렀다

시간이라는 평상에 톡톡 금이 가고 있었다

발라낸 고등어 뼈를 냄새 맡던 고양이와

고등어 냄새를 물씬 풍기는 내가 한 프레임 안에서

여자의 밥이 되었다

갈라진 평상 위에서 여자가 파랗게 웃고 있었다

내 심장을 꺼내 햇볕 아래 펼처놓고 있었다

먼 나라에서 돌아오는 대한항공 여객기의 비행운이

지구 밖의 시간을 떨어뜨렸다

배부른 고양이가 화들짝 놀라 잠을 깨던

지상의 마지막 오후,

여자가 찍은 풍경들이 새로운 어족의 표본으로 떠올랐다

하늘을 나는 고등어를 우리는 사랑이라 부르기로 하며 긴 슬픔을 우렸다

처음 마주한 밥상에서 서로에게 영원한 미지로 남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