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빡 잠이 들었었나 봅니다 기차를 타고 가다가 푸른 골짜기 사이 붉은 밭 보았습니다 고랑 따라 부드럽게 구불거리고 있었습니다 이상하게 풀 한포기 없었습니다 그러곤 사라졌습니다 잠깐이었습니다 거길 지날 때마다 유심히 살폈는데 그 밭 다시 볼 수 없었습니다
무슨 일 때문인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엄마가 내 교과서를 아궁이에 쳐넣었습니다 학교 같은 건 다녀 뭐하느냐고 했습니다 나는 아궁이를 뒤져 가장자리가 검게 구불거리는 책을 싸들고 한학기 동안 학교에 다녔습니다 왜 그랬는지 모릅니다
타다만 책가방 그후 어찌했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 밭 왜 풀 한포기 내밀지 않기로 작정했는지 그러다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가끔 한밤중에 깨어보면 내가 붉은 밭에 누워 있기도 했습니다
ㅡ
빨간 다라이
외갓집은 도라지 꽃밭 위에 없다
외갓집은 지금
부흥수퍼 전망부동산 위 3층에 있다
북두칠성 아래 감나무와 수국나무 사이
우물도 없다
그 자리엔 흑장미비디오가 있다
외삼촌은 빚더미 위에 있고
장턱거리 밭은 가압류 중이고
구불거렸던 길은 곧게 펴졌다
외갓집은 지금 서기 2000년이고
부엌엔 김치냉장고와 정수기가 있고
엿 밥풀강정 술찌게미 따위는 없다
얼어 죽었다는 애꾸 김석출
때문에 무서워 외면하고 건너뛰던
도랑은 사라졌다
아라비아식 지붕을 모자처럼 올려놓은
모텔이 서 있다
방앗간은 연성공업사가 되었고
간판엔 이렇게 써 있다
각종 플라스틱 통
저수조 물탱크 함지박 빨간 다라이 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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