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제멋대로 흐르게 놔둔 시큰둥한 성향이 자신들을 어디로 이끌지 그들은 알지 못했다. 시간이 대신해 선택해 주었다. 물론, 그들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무엇인가에 온전히 자신을 바치고 싶었을 것이다. 흔히 사람들이 천직이라 부르는 내부의 강력한 이끌림을 느끼며, 그들을 뒤흔들 만한 야망, 충만케 해줄 열정을 느끼며 자신을 쏟아붓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그들은 단 하나만을 알았다. 더 잘살고 싶다. 이 욕망이 그들을 소진했다.
47
이들이 갖는 수치심과 오만함은 같은 성격이어서 같은 환멸, 같은 분노를 내포하고 있었다. 온종일 사방에서 슬로건, 포스터, 네온사인, 불 밝힌 진열장이 그들의 머릿속에 자신들이 늘 사다리의 아래에 있다고, 언제나 사다리의 너무 낮은 곳에 있다고 세뇌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잘 깨닫고 있었다. 한술 더 떠, 가장 나쁜 몫이 아닌 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51
이 잊지 못할 취기 어린 날의 기억에는 무엇인가 아련한 알 수 없는 흥분과 모호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마치 한잔하러 간 일이 근본적인 몰이해와 끈질기게 따라붙는 분노, 도저히 떨쳐 낼 수 없을 듯한 단단한 모순을 자극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78
변한 것이 있다면, 전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너무도 모호한 것이었다. 그들의 남다른 삶의 방식, 몽상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들은 지쳤다. 그들은 늙었다, 그랬다. 어떤 때는 자신들이 인생을 채 시작하지도 않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그들의 삶이 위태롭고 덧없이 흐르는 것 같았다. 마치 채워지지 않은 욕망, 불완전한 기쁨, 잃어버린 시간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기다림과 궁색함, 편협함이 자신들을 마모시켜 무기력하게 만들었다고 느꼈다.
가끔은 모든 것이 이대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계속되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냥 흘러가게 놔두면 될 일이었다. 삶이 그들을 달래줄 것이다. 몇 달이고 몇 년이고, 변화도 없고 그들을 구속하는 법도 없이, 인생은 계속될 것이다. 낮과 밤이 조화롭게 이어지는 가운데, 거의 미미한 변화만 있을 뿐, 같은 주제가 끝없이 되풀이되며 행복이 계속될 것이다. 어떤 동요, 비극적인 사건이나 예기치 못한 사건도 흔들어놓지 못할 영원한 감미로움을 맛볼 것이다.
그러다가도 어떤 때는 더 이상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맞서 싸우고 정복하고 싶었다. 싸워서 그들의 행복을 쟁취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싸울 것인가? 누구에 맞서서? 무엇에 맞서? 그들이 사는 세상은 낯설고 화려했다. 자본주의 문화로 번쩍이는 세계, 풍요로움이 감옥처럼 둘러싸고, 행복이라는 매력적인 덫이 놓인 세계였다.
위험은 어디에 있는가? 위협은 어디에 있는가? 과거에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빵을 얻기 위해 싸웠고, 지금도 여전히 싸우고 있다. 제롬과 실비는 체스터필드 소파를 얻기 위해 사람들이 싸울 수도 있다고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을 가장 손쉽게 동원할 수 있는 명령어일 수도 있었다. 어떤 것도 그들을 일정이나 계획으로 묶어둘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조기 퇴직, 휴가 연장, 무료 점심, 주당 30시간 근로를 우습게 여겼다. 그들은 그 이상의 여유를 원했다. 클레망 디스크 플레이어, 그들만을 위한 백사장, 세계 일주, 화려한 호텔을 꿈꿨다.
적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들 안에 있었다. 그들을 타락시키고, 부패시켰으며 황폐화시켰다. 그들은 속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조롱하는 세상의 충실하고 고분고분한 소시민이었다. 기껏해야 부스러기밖에 얻지 못할 과자에 완전히 빠져 있는 꼴이었다.
84
이틑날 고단한 삶이 그들을 다시금 짓누르기 시작하여 광고계라는 거대한 기계가 돌아가고, 자신들이 미미한 소모품으로 느껴질 때에도, 전날 저녁의 열에 들뜬 탐험으로 눈뜨게 된, 희미하지만 남모를 경이로움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무비판적으로 상표나 슬로건, 이미지를 맹신하는 사람들, 채소 향과 헤이즐넛 향에 입맛을 다시면서 비곗덩어리 고기를 먹는 사람들을 앞에 두고 앉았다. (이유를 정확히 모르는 채 불안하리만치 이상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 김빠진 것처럼 왜 이제는 이러저러한 포스터가 멋지다고, 슬로건이 기막히다고, 영화 예고편이 훌륭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하는 점이었다.) 그들은 자리에 앉아서 녹음기를 켜고, 인터뷰에 걸맞은 목소리 톤으로 이야기하고, 내용을 조작하고 분석을 아무렇게나 대충 해치웠다. 그들은 막연히 다른 것을 꿈꿨다.
85
9장
어떻게 해야 떼돈을 벌 수 있을까? 도무지 풀리지 않는 문제였다. 하지만 그들이 보기에 자신과 상관없는 사람들은 제 몫을 잘 챙기며 날마다 이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는 것 같았다. 예가 될 만한 사람들, 이들은 프랑스의 살아있는 지성이자 정신의 영원한 증인으로서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고, 사려깊으며 지혜로웠다. 적극적이고 건강미 넘치며 단호함과 결손함을 지닌 이들은 정체된 채 늘 제자리걸음만 하며 성질이 급해 실패만 하는 사람들에게 훌륭한 표본이자 인내심의 거룩한 예였다. 성공담. 일확천금이나 도둑질을 상상하는 것. 우울함.
97
그들의 몸과 몸짓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시선은 고요하고 마음은 숨김이 없었다. 미소는 순수했다.
극치의 순간에 웅장한 궁궐이 들어서는 것을 보았다. 편평한 대지 위해 수천 개의 환희의 불빛이 밝혀지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메시아를 합창하러 모여들었다. 광대한 테라스에서 수만의 브라스 밴드가 베르디의 레퀴엠을 연주했다. 시가 산기슭에 새겨져 있었다. 정원이 사막 한가운데 만들어졌다. 도시 전체가 프레스코화와 다름없었다.
눈부실 정도로 한꺼번에 나타나는 장면들은 그들이 어쩌지 못할 만큼 빠른 속도로 지칠 줄 모르고 몰려드는 파도처럼 흘러들어 왔다. 현기증이 날 것같이 빠른 빛과 승리의 광경이 놀라운 인과관계를 이루며 연쇄적으로 생겨나는 것처럼 보였다. 경이에 찬 그들의 눈앞에 끝없는 조화를 이루며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이 같은 완벽한 풍광, 경이롭고 자랑스러운 총체로서의 완벽한 모습은 그들이 마침내 이해하고 해독할 수 있게 된 모순 없는 세계였다. 그들의 감각은 확장되고, 보고 느끼는 능력이 한없이 열려, 눈부신 행복이 그들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 끼어들고, 걸음걸이에 흥을 돋우며 삶에 스며들었다. 세상은 그들의 것이었다. 그들은 세상을 맞이하러 나갔다. 새로운 세상을 끝없이 발견했다. 그들의 삶은 사랑과 취기에 어렸다. 그들은 열정은 끝을 몰랐고, 자유는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았다.
하지만 산더미처럼 쌓여 가는 세세한 형상 가운데 그들은 질식해 버렸다. 내용은 빛을 잃고 희미해져 갔다. 어렴풋하고 모호하며, 빈약하고 강박적이며, 어리석고 별 볼 일 없는 몇 가지 단상만이 남았다. 더 이상 전체적인 움직임이 아니라 동떨어진 그림으로, 흠 없는 총체가 아니라 조각난 파편으로, 모든 이미지들이 저 멀리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모호하고, 나타나자마자 스러져버리는 암시적이고 환영에 찬 반짝임처럼, 먼지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가장 걸맞지 않은 욕망의 우스꽝스러운 투사, 손에 잡히지 않는 희미한 빛의 반짝임, 도저히 손에 넣을 수 없는 꿈의 조각에 불과한 것 같았다.
그들은 행복을 상상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 마음껏 만들어낸 멋진 공상은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세상을 적셨다. 그들의 발걸음이 행복하려면 걷기한 하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들은 홀로 꼼짝없이 쓸쓸하게 남았다. 잿빛의 살얼음 언 대지, 황폐한 초원, 그 어떤 궁궐도 사막의 초입에 들어서지 않았으며, 그 어떤 광장도 지평선을 대신하지 않았다.
행복에 대한 도를 넘어선 이런 종류의 추구, 순간이지만 행복을 엿보고 행복을 알아냈을 때 느꼈던 경이의 감정, 환상적인 여행, 확고부동한 어마어마한 성취, 새롭게 발견한 지평, 미리 맛본 유희, 불완전한 꿈 아래 가능했던 모든 것들, 여전히 어색하고 당혹스럽지만 이미 장전된 총알처럼 준비되었던 비약,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새로운 감정, 새로운 요구. 그들이 경험한 이 모든 것들에서 남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그들의 목소리를 다시 듣고, 상대방의 알아들을 수 없는 중얼거림, 녹음기 모터의 윙윙거리는 속삭임을 다시 들으려 애썼다. ...
그리고 한참 후, 그들 자신이 프라타너스가 양옆에 늘어선 회색의 좁은 국도 위에 있었다. 자신들이 길고도 검은 자동차 길 위의 반짝이는 작은 점이 되었다. 그들은 풍요의 바다 위에 떠 있는 한 점 궁핍한 섬이었다. 자신들을 둘러싼 광활한 황금빛 밀밭과 군데군데 조그만 붉은 점처럼 흐드러진 개양개비 꽃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압도당한 느낌이었다.
118
얼마 안가 삶 전체가 그들 안에서 멈춰버릴 것 같았다. 시간은 동요 없이 흘렀다. 더 이상 어느 것도 그들을 이 세계에 붙잡아 두지 못했다. 때늦게 들어오는 신문들이 선의의 거짓말이거나 혹은 이전 삶의 추억, 다른 세계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닐까 하고 의심할 정도였다. 그들은 스팍스에 살고 있고 앞으로도 살 것이다. 더 이상의 계획, 더 이상의 조바심도 없었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늘 멀기만 한 휴가나 프랑스로 돌아가는 일조차 꿈꾸지 않았다.
기쁜도 슬픔도 심지어 권태도 느끼지 않았다. 자신이 살고 있는 것인지, 과연 실제로 살고 있는 것인지 자문하는 일까지 있었다. 이 실망스러운 질문으로부터 어떤 특별한 만족도 얻지 못했지만, 이따금 혼란스럽고 모호하게나마 이곳에서의 삶이 부눗에 맞고, 심지어 역설적이게도 이런 삶이 그들에게 필요하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들은 무의 한가운데, 직선으로 난 길과 누런 모래, 석호, 잿빛 야자수로 된 무인도에,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라려 들지도 않을 세계에 살고 있었다. 그들은 이전까지 한 번도 다른 경치나 기후, 다른 삶의 방식에 자신들을 맞추고 변화시키지 위해 준비를 해본적이 없었다. 단 한순간도 실비는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교사상에 걸맞은 적이 없었다. ... 무만이 감돌았다. ...
그들의 삶은 마치 고요한 권태처럼 아주 길어진 습관 같았다. 아무것도 없지 않은 삶.
...스팍스를, 우울한 거리를, 그 무의 상태를 탈출하고 싶었다.
추레한 척박한 멍청해보이는 희끗한 야생에 가까운 무너져 내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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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없는 세계, 추억 없는 세상. 헤아리지 않아도 무미건조한 날과 주, 시간은 여전히 흘러갔다. 그들은 더는 욕망하지 않았다. 무심한 세계. 기차가 도착했다. 배가 항구에 정박해서 공작기계, 약품, 볼 베어링을 하역하고 인광석과 올리브유를 실었다. 짚을 실은 트럭이 도시를 가로질러 척박한 남부지방으로 향했다. 일상은 똑같이 반복되었다. 수업, 레장스 카페에서의 에스프레서, 저녁 시간에 보는 영화 두 편, 신문, 낱말 맞히기. 그들은 몽유병자나 다름없었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 이상 알지 못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상실했다.
예전에, 이 예전이라는 것이 세월에 따라 하루하루 후퇴하는 시간이어서 마치 그들의 이전 삶이 전설이나, 비현실 혹은 모호함 속으로 파묻히는 것 같았다. 예전에 그들은 적어도 무언가를 소유하고 싶은 광기에 휩싸인 적이 있었다. 이런 강렬한 욕구가 그들의 삶을 지탱해 주기도 했다. 앞쪽으로 팽팽히 당겨진 듯한 조급하고 욕망에 사로잡힌 느낌으로 살았다.
그리고? 무엇을 했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무엇인가, 아주 천천히 파고드는 조용한 비극과 같은 것이 그들의 느려진 삶 한가운데 자리 잡았다. 아주 오래된 꿈의 파편 가운데, 형태 잃은 잔해 가운데 그들은 방향을 잃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들은 경주의 끝, 6년 동안 삶이 굴러온 모호한 궤도의 끝, 어느 곳으로도 인도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은 우유부단한 탐색의 끝에 서 있었다.
...
서른이 채 되지 않은 나이다. 그들 앞에 삶이 펼쳐질 것이다.
...
솔직히 말해 그들이 맛볼 식사는 밋밋할 것이다.
ㅡ
페렉의 네 가지 밭. 사회학적 글쓰기, 사물들, 로마네스크적 글쓰기, 인생 사용법, 유희적 글쓰기, 실종, 자서전적 글쓰기, W 또는 유년의 기억(시작도 없고 끝고 없었다. 더 이상 과거도 없었고 아주 오랫동안 미래도 없었다. 그냥 지속되기만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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