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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순간을 포착하는 일. 사진 속의 우리는 그 순간에 멈춰있지만,현실의 시간을 계속해서 흘러간다. 김수린의 시간도 그랬다. 패션 사진작가를 꿈꾸던 16살 소녀가 파슨스 디자인 스쿨에 들어가고, 라이언 맥긴리(뉴욕 휘트니 뮤지엄 사상 최연소로 개인전을 연 천재 포토그래퍼) 스튜디오에 무작정 찾아가 일을 구했다. 그 당시 이야기를 담은 ‘청춘을 찍는 뉴요커’라는 책을 통해, 사람들 머릿속에는 스물 한 살의 김수린이 기억됐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김수린은 계속해서 사진을 찍었고, 꿈을 꿨고, 노력하고 있었다. 한국 잡지 Vogue girl, Ceci, 엘르와 함께 일하고, 미국 아트잡지 Juxtapox와 패션 잡지 NYLON GUYS에도 사진을 실었다. 뉴욕, 러시아, 한국에서 5차례 그룹 전시회에 참여했고 얼마전 한국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마치 오래된 친구에게 문득 안부를 묻듯 그녀에게 메일을 보냈다. 훌쩍 커버린 그녀의 낯익은 이야기를 듣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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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01
Save
A Virgin
삶에는 정해진 길이란 것도, 완벽하게 보장된 미래라는 것도 없어. 특히 우리 같은 나이 또래에는 더욱 그렇잖아. 그래서 나는 매일 생각해. “내가 원하는 삶은 어떤 삶일까?” 눈을 감고 5년, 10년, 15년 후의 내 모습을 매일 그리고 또 그려. 굉장히 먼 미래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인생의 그림을 크고 넓게 보다 보면 눈앞의 세부적인 것들이 저절로 결정될 때가 많아. 그 작은 선택들을 모아 또다시 미래의 나를 그리곤 하지.
그래서 학교에 다닌다는 핑계로 전시회 같은 작품 활동을 소홀히 할 수가 없었어. 예전에 서울에서 Lightless light라는 주제로 했던 단체전이 생각나. 장님이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싶은 것들을 사진으로 담았지. 러시아에서 한 전시의 주제는 뉴욕의 뮤지엄에 있는 화가들의 인물을 사진으로 만드는 것이었어. 기말고사 기간이랑 겹쳐서 정말 정신없이 바빴던 게 기억난다. 다행히 러시아에서 굉장히 반응이 좋았어. 내 개인전 때문에 오프닝에 참석 못했지만 낸 골딘(Nan Goldin, ‘1980년대 언더문화의 상징적 존재들을 사진에 담아 시대를 표현하고자 노력했’던 미국의 사진작가)의 뒤를 이을 새로운 세대라는 얘기까지 들었대.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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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사는 거, 힘들긴 힘들어. 삼시 세끼도 제대로 못 챙겨 먹거든. 특히 저번 학기에는 학교 공부하고, 한국에서 열릴 개인전 준비하느라 정말 힘들었어. 주제는 Save A Virgin이었는데, 여기서 virgin이란 단어는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어. 나는 사진 찍을 때 어떤 보이지 않는 얇은 경계선을 담고 싶다고 생각해. 팽팽하게 당겨진 아주 얇은 줄 위에 서 있는 무언가를 사진으로 찍고 싶어. 보는 사람에 따라 의미가 확연하게 달라질 수 있는 그런 것들 있잖아. 난 그걸 재미있어하고, 때로는 집착하기도 해. 내 피사체가 주로 소녀인 것은, 그런 이유인 것 같아. 물론 앞으로도 소녀만 찍겠다는 건 아냐. 다만, 흘러 넘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는 경계선 위에서의 작업을 계속하고 싶어.
사실 전시를 제의받은 건 거의 1년 전이었어. 만들어 놓은 사진이 어느 정도 있는 상태였는데 준비하다 보니 성에 안 차더라고. 그래서 반년 동안 계속 사진을 찍으러 다녔지. 사람들이 보기엔 전시가 그냥 벽에 사진을 걸어두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그게 아냐. 사진이 어디 걸려있는지, 어떻게 걸려있는지, 아주 작은 것까지 세심히 준비해야해. 사진과 사진 사이의 간격이 1cm만 달라져도 표현의 차이를 만들어내니까. 하나하나 생각하다보니 할 일이 너무 많았어. 한국이랑 시차가 안 맞아서 새벽에 늘 전시 때문에 전화 통화를 하고, 그래서 잠도 못 잔 채로 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정말 죽겠더라. 한 번은, 전시회에 걸릴 내 몸집보다도 큰 프린트 박스를 들고 뉴욕 한복판을 걷다가 주저앉아 운 적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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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많다는 것이 힘든 건 아니었어. 아직 학교 안에서는 학생이지만, 학교 밖에서는 한 명의 아티스트로서 모든 일을 프로페셔널하게 해야 하잖아? 그게 너무 어려웠어. 그냥 다 때려치우고 산 속으로 들어가서 숨고 싶단 생각을 적어도 일주일에 세 번은 하는 것 같아. 하하. 물론 그건 상상일 뿐이고, 사실은 좀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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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진들, 그건 전부 계산된 것들이야. 카메라에 담을 장면 전부를 계획한다기보다, 내가 머릿속에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떤 느낌으로 어떻게 담을 것인가를 계획하고 그 생각이 늘 통일되어 있다고 하는 게 맞는 것 같아. 항상 손에 카메라를 쥐고 1000장쯤 사진을 찍어 그 중 5장을 골라내는 사람이 있다면, 난 그 반대야. 내 머릿속이 정리되어 있어야만 카메라를 잡아. 내가 담고 싶은 게 확실할 때만.
사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건, 중학교 1학년 때 샀던 20만원도 안하는 카메라야. 남들이 아무리 카메라 좀 바꿔라, 렌즈 좀 좋은 것으로 사라, 말해도 처음 샀던 그 카메라가 아니면 늘 찍던 그 느낌을 담을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 그리고 사람들이 내 사진을 보고 저런 사진을 찍기 위해 많은 돈이나, 특별한 무언가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길 바라는 마음도 있어. 그럼 누군가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아”라며 사진을 시작한다든가, 굳이 사진이 아니라도 그걸 계기로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찾아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계기가 될 수 있을 테니까. 내 사진과, 사진을 찍어오며 달려온 내 삶 자체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꿈을 줄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게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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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렇게 살아서 그런지 몰라도, 난 인생을 소중히 할 줄 모르는 사람이나 남을 시기하는 사람이 싫어. 잘되는 사람은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거든. 보이지 않는 노력이란 것도 있으니까. 그리고 꿈이란 건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런 착한 마음을 갖고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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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02
순수의
시대
나와 사진의 접점이 생기기 시작한 곳이 어디냐고 물으면 참 애매해. 아주 어릴 때부터 난 그냥 사촌 동생들을 데리고 사진 찍으면서 놀았어. 그게 그렇게 재미있더라. 엄마가 내가 찍은 사진을 현상해 오시면, 함께 사진을 보면서 칭찬해주셨어. “우리 수린이는 천재인가보다. 어린애가 이런 사진도 찍고.” 너무너무 기뻤지. 사실 지금도 칭찬 받는 걸 굉장히 좋아하긴 해. 비밀이지만, 가끔 칭찬 안 해준다고 엄마랑 싸우기도 하고 그래. 애같지?
난 지금까지 ‘사진’이라는 커다란 빛 하나에 이끌려서 모든 것을 의지해 온 것 같아. 어쩌면 사람들은 내 삶을 보며 “김수린은 정말 꿈꾸는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사람 같다”고 말할지도 몰라. 하지만, 그게 아냐. 꿈꾸는 것들을 이루기 위해 포기한 부분이 사실 굉장히 많아. 난 원하는 사진을 찍기 위해서라면 남들이 당연히 누릴 수 있는 부분도 포기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든.
연애나 누군가를 만나는 것에 있어서도 그래. 난 그런 부분에 굉장히 신중한 편이야.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하는 일로 인해서 내가 원하는 삶이나 인생, 내 사진 자체가 흔들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사람과의 만남으로 인해 내 삶 자체가 통째로 흔들리게 된다면… 뭐, 그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기 때문에 삶이 재미있는 걸 수도 있지만! 조심하고 싶은 거야. 삶이, 사진이 그만큼 내게 중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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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삶을 통제하는 것이 절대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야. 여전히 굉장히 어렵고 고통스럽기도 하고, 매번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고민도 많이 해. 하지만 내가 찍고 싶은 사진을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래야 내 사진이 나올 수 있는 거라고. 내게 많은 것을 주는 사진이란 존재를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어. 그래야 언젠가 다시 되돌려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사실은 고백할 게 하나 있어. ‘청춘을 찍는 뉴요커’ 책에 너무도 자신만만하게 썼듯이, 나는 화려한 사람들 속에서 화려한 사진을 찍는 패션 사진작가를 꿈꿔왔어. 그런데, 그 꿈이 달라졌어. 패션 사진이란 게,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더라. 메이크업 해주는 사람, 옷을 입혀주는 사람, 모델 등등… 여러 사람과 함께 해야 하는 일이었어.
그런 작업들을 하면 할수록, 느껴지는 것이 있었어. 내가 사진을 좋아하는 이유는 사진으로 내가 원하는 이야기를 할 수 있고, 내 카메라에 담길 모든 것들이 나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라는 것. 내가 진짜 꿈꿨던 건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 모르고 있었던 거지,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순수 사진을 찍는 일이라는 것을.
결국 몸으로, 마음으로 부딪히면서 찾아낸 나의 길이라고 생각해. 난 여전히 사진을 너무나도 사랑하고, 원하는 사진을 찍기 위해 내 삶 자체 또한 그만큼 사랑하고 있어. 그건 이제까지도,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부분이라 믿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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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린 作
1 Soorin Kim, Save a Virgin, 2009, C-Print, 120 x 80cm
2 Soorin Kim, Save a Virgin, 2009, C-Print, 120 x 80cm
3 Soorin Kim, Save a Virgin, 2009, C-Print, 190 x 127cm
4 Soorin Kim, Save a Virgin, 2009, C-Print, 80 x 120cm
5 Soorin Kim, Save a Virgin, 2009, C-Print, 30.4 x 20cm
6 Soorin Kim, Save a Virgin, 2009, C-Print, 63.5 x 94.4cm
7 Soorin Kim, Save a Virgin, 2009, C-Print, 40 x 60cm
8 Soorin Kim, Save a Virgin, 2010, C-Print, 27.9 x 45c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