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돌에 새긴 별자리를 아낀다. 우주를 느끼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거대하고 성능 좋은 천체 망원경이 없더라도, 인간은 원시시대부터 맨 눈으로 밤하늘을 우러렀고 반짝이는 별들을 돌판에 새겼다. 나는 고인돌에 파인 검은 점들을 손끝으로 어루만지며 묻곤 했다. 왜 이 원시인은 밤하늘의 별을 고인돌로 옮겼을까. 어디서 태어났고 누구를 사랑했으며 무슨 일을 겪은 후에 제일 슬펐고 또 언제 가장 행복했을까. 다른 질문들은 선뜻 답하기 어렵지만, 마지막 질문엔 내가 그인 듯 속삭이곤 했다. “밤하늘의 별들을 정확히 고인돌에 새길 때 저는 행복합니다.” ‘정확히’란 단어에 힘을 준다. 각 별의 크기는 물론이고 별과 별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기 위해, 그는 얼마나 많이 고개를 치켜들었다가 숙였을까.
‘숲에서 우주를 보다’를 읽자마자 별자리를 고인돌에 새긴 원시인의 사려 깊은 손길을 떠올렸다. 이 책은 숲 일기다. 데이비드 조지 해스컬은 테네시 주 남동부의 경사진 숲을 오가며 1년을 보냈다. 월든 호수가의 데이비드 소로처럼 현대문명과 단절한 채 은거한 것이 아니라, 대학교수 생활을 하면서 일주일에 서너 차례 숲으로 갔다. 그곳에서 해스컬은 아름다우면서도 ‘정확히’ 기록하고자 노력하였다.
숲에는 미생물부터 식물과 동물까지 다양한 생명체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해스컬은 그 중에서, 별자리 하나를 고르듯, 오늘 유심히 살필 숲의 구성원을 정한다. 2월 28일엔 도롱뇽이고 8월 26일엔 여치다. 이 녀석들을 딱 그 날에만 만나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는 없다. 그가 숲으로 간 날 도롱뇽과 여치가 우연히 등장했을 뿐이다. 그들과 만나지 못했다면, 그 날의 일기는 다른 생물로 채워졌으리라. 물론 해스컬은 계절에 따라 어떤 생물이 숲에 자주 등장하는지 알지만, 숲은 인간의 예측을 항상 충족시켜주진 않는다. 비나 눈이 오거나 먹구름이 잔뜩 끼면 아무리 눈 밝은 원시인이라도 뭇별을 우러를 수 없는 것처럼.
해스컬은 숲에서 만난 생물을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연구실로 돌아와서 그와 관련된 최신 연구를 찾고 문학 작품에서 그 생물의 쓰임까지 확인하여 숲 일기에 녹인다. 해스컬이 아무리 박식해도, 도롱뇽을 보자마자 숲에 쭈그리고 앉아 양서류의 역사를 매끄럽게 써내려가진 않았을 것이다. 숲에서 만난 친구를 풍부하게 담기 위해 숲 안팎에서 정성을 다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백화보’라는 꽃에 관한 그림책을 쓴 김덕형 역시 꽃을 ‘정확히’ 담고자 최선을 다했다. 서문을 쓴 박제가에 따르면, 김덕형은 꽃 아래 자리를 마련하고 누운 채 꼼짝도 않고 관찰하였다고 한다. 누구나 아는 꽃도 여러 각도로 집중해서 본 후 그렸으니, ‘꽃의 역사’에 공헌한 공신이 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고인돌 별자리, 숲 일기, 꽃 그림책 등 결과물은 제각각이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을 옮겨 적기 위한 고군분투는 마찬가지다. 나는 이번 주에 이 세 사람과 세 개의 작품을 놓고 환생놀이를 즐겼다. 방법은 간단하다. 해스컬이 원시시대에 태어나서 별을 사랑했다면 고인돌에 별자리를 새겼을 것이고, 김덕형이 미국 테네시 주에서 자라며 숲을 즐겼다면 ‘숲에서 우주를 보다’와 같은 숲 일기를 썼으리라. 셋은 결국 몸은 다르지만 쌍둥이처럼 닮은 영혼인 것이다.
소설을 쓰고 싶다는 이들을 부쩍 많이 만났다. 발단부터 결말까지 구조를 치밀하게 짜거나 등장인물을 다채롭게 묘사하거나 갈등을 강력하게 키우는 법을 배우고 익히면, 언젠간 작가가 될 것이라고 막연하게 기대하는 습작생들이 의외로 많다. 그들에게 앞에서 거론한 세 사람의 목소리를 하나로 모아 화음으로 들려주고 싶다. “우선 책상을 떠나 자신이 가장 아끼는 대상에게 가십시오. 한 번만 가지 말고 시도 때도 없이 가서 그 대상을 바라보십시오. 일상으로 돌아온 후에도 그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 정성을 쏟으십시오. 그러고 나서 무엇인가를 써보았다면, 나는 당신이 작가수업을 충분히 받았다고 인정하겠습니다. 그 글의 수준과 무관하게 당신은 이미 작가입니다.”
김탁환 소설가
한국일보 [문화산책]작가수업 2014.07.11 21:22
http://www.hankookilbo.com/v/6b82c133695940eaa9cc775fe204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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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점에 이르는 그의 스케치를 뒤지면서 든 생각이다. 일상에 대한 소묘도 많았고 기억 속의 풍경에 대한 그림들도 있었고 여행스케치도 있었다. 다양한 그림들 속에서 내가 흥미롭게 본 그림들은 하나의 도시에 대한 구상안이었다. 일종의 여러 가지 마스터플랜이 나왔다. 누가 의뢰한 것들도 있었고 그저 자신이 꿈꾸는 도시를 그려낸 것들도 있었다. 나는 그 몇 장의 스케치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사실 미술적인 완성도로 평가한다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그저 낙서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스케치들을 그릴 때의 정기용의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자신의 인생 대부분을 바친 무주 안성면에 대한 계획을 보여주는 이 그림은 특히 사랑스럽다. 나름 무주 안성면에 대한 마스터플랜인 것이다. 1999년 3월 17일에 그린 이 스케치는 1/25,000의 스케일로 작성되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든 정보가 다 들어있다. 나는 이 스케치를 보며 ‘한 번도 꿈꾸어보지도 욕망해보지도 않은 걸 욕망하는 자가 건축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론 모든 건축가가 이러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주어진 도시와 공간에 살며 그것에 의존하여 영화를 찍는다. 건축가 정기용은 빈 땅을 보면서 거기에 사람들의 새로운 삶의 공간을 꿈꾼다. 그 꿈은 한낱 몽상에 불과하고 불필요한 것일 수도 있다. 한 남자가 색연필들을 들고 빈 종이에 가득 자신이 꿈꾸는 도시와 공간을 흥분하며 그렸을 그 집중된 순간을 상상해보면, 한편으로는 웃음이 나오고 또 한편으로는 나는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또 다른 자아의 열정을 느끼게 된다.
한 인간의 꿈과 몽상과 마스터플랜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나는 왜 이런 꿈을 꾸지 못하는 단지 기록하는 사람인가하는 자괴감이 밀려온다. 사실은 어렵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빈 종이 한 장을 펼쳐 들고 뭔가를 계획해보면 되는 것이다. 창에서 보이는 저 건너편 동네를 내가 주무를 수만 있다면 나는 저기에 무엇을 그리고 싶은가? 저 동네에 무엇이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하는가? 저기 사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삶이 필요할까? 그저 그런 불필요한 생각들로 종이 한 장을 채워보면 될 일이다.
내 마음속의 미술(31) 몽상을 위한 시간, 건축가 정기용의 스케치 / 정재은(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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