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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들레르

머리카락 속에 반구(半球)

  그대의 머리카락 냄새를 오래오래 들이마시게 해주오. 갈증 난 남자가 샘물 속에 얼굴을 묻고 있듯, 그대 머리카락 속에 내 얼굴을 푹 묻고, 내 손으로 그대의 머리카락을 향기 나는 손수건처럼 흔들게 해주오, 추억들을 공중에 흔들기 위해.
  내가 그대의 머리카락 속에서 보는 모든 것을 그대가 알수만 있다면! 내가 느끼는 모든 것을! 내가 듣는 모든 것을! 다른 사람들의 넋이 음악 따라 여행하듯, 내 넋은 향기를 타고 여행을 떠난다.
  매혹적인 그대의 머리카락에는 돛과 돛대들로 가득찬 꿈이 모두 깃들어 있다. 그대의 머리카락에는 망망대해가 깃들어 있다. 거기에 부는 계절풍이 나를 그곳의 매혹적인 풍토로 실어다 준다. 그곳의 하늘은 더욱 아름답고 더욱 깊으며, 그곳의 대기는 나무 열매와 잎사귀들과 사람의 살갗 냄새로 향기롭다.
  그대 머리카락의 바다 속에서 나는 어떤 항구를 본다. 우수 어린 노래와 온갖 인종의 힘센 남자들, 그리고 영원한 뜨거움이 깃들어 있는 끝없는 하늘 위로 정교하고 복잡한 구조를 이루어놓은 온갖 형태의 배들로 가득 찬 항구를.
  머리카락을 애무하면서 나는 회상한다. 아름다운 선실 속 긴 의자 위에서 보낸 달콤한 우수의 그 긴 시간을, 화분과 찬물 그릇 사이에서 항구의 희미한 요동에 의해 조용히 흔들리며 보낸 시간을.
 화로 같은 그대의 머리카락 속에서 나는 아편과 설탕이 섞인 담배 냄새를 맡는다. 그대 머리카락의 어둠 속에서 나는 열대 지방의 무한한 창공이 빛나는 것을 본다. 그대 머리카락으로 덮인 바닷가에서 나는 코코아와 사향과 역청이 섞인 냄새에 취한다.
  그대의 무겁고 검은 머리 타래를 오랫동안 깨물게 해주오. 그대의 탄력 있고 억센 머리카락을 깨무노라면, 나는 추억을 씹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든다.

보들레르, 파리의 우울, 17 머리카락 속에 반구(半球)

/안락한 소파나 침대, 혹은 기차 안에서 (동행자)의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이 글과 내가 보고 네가 보는 것들을 속삭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
/머리를 감기는 머리카락을 헹구는 일이면서 머리 속 잡념을 씻어내는 일인 것 같다는 대화가 떠오른다.
/너의 냄새를 쫓아 폭포에 다다랐던 산행을 잊을 수 없다.









그려보고 싶은 욕구

인간은 불행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욕망에 시달리는 예술가는 행복하다! 마치 밤 속에 떠밀려 가는 여행자 뒤에 애석하게도 사라져버린 어떤 아름다운 것처럼. 나는 그토록 드물게 나타났다가는 그토록 재빨리 달아나 버린 그녀를 그리고 싶은 욕망으로 불타오르고 있다. 그녀가 사라져버린 지 벌써 얼마나 오래되었던가!

그녀는 아름답다. 아니 아름다운 것 이상이다. 그녀는 놀랍다. 그녀 속에는 어둠이 넘쳐흐른다. 그녀가 생각게 해주는 모든 것은 깊은 밤의 세계다. 그녀의 눈은 신비가 어렴풋이 반짝이는 두 개의 동굴이요, 그녀의 시선은 번개처럼 빛난다. 그것은 어둠 속에 폭발하는 불꽃이다. 만일 빛과 행복을 퍼붓는 검은 천체를 상상할 수만 있다면, 나는 그녀를 이 검은 태양에 비기리라. 그러나 그녀는 차라리 달을 생각게 해준다. 달은 분명 그 몹시 무서운 영향력을 그녀에게 끼쳣따. 차가운 신부를 닮은 전원의 흰 달이 아니라, 폭풍우의 밤하늘 깊숙이 걸려 몰려가는 구름에 떼밀려, 취한 듯한 저 불길한 달이다. 평온한 사람들의 잠자리를 찾아오는 조용하고 조심스러운 달이 아니라, 테살리아의 마녀들에 끌려 공포에 떠는 풀 위에서 춤을 추어야 하는, 패배하고 반항적인, 하늘에서 쫓겨난 달이다!

그녀의 작은 이마에는 강한 의지와 먹이에 대한 애착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벌름대는 두개의 콧구멍이 미지와 불가능을 들이마시고 있는 이 불안한 얼굴 아래에선 화산 지대에 피어난 기적의 꽃을 꿈꾸게 해주는 붉고 하얀 달콤한 큰 입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교태를 보이며 웃음을 터트린다.

세상에는 정복하고 싶고 즐기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여인들이 있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있는 이 여인은 그 시선 밑에서 서서히 죽어가고 싶은 욕망을 일으킨다.

보들레르, 파리의 우울, 36 그려보고 싶은 욕구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에서 오스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리워하지 않고서는 그사람을 저렇게 잔뜩 그릴 리가 없다." 그림을 그리는 일, 행복하지 않을 수 없다. 다분히 감상적이었던 고등학생 시절에 썼던 연설문의 내용이 떠오른다. 챙피해서 그 내용을 말 할일 없겠지만 아무튼 누군가를 오래 보고 그려내는 시간은 어쩌면 행운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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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한시에 마침내 혼자가 되었다.
늦어진 역 마차 두 서너 대가 기진해서 달려가는 소리만이 들려온다.
지금부터 몇 시간 동안 휴식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조용한 시간을 가질 수가 있다.
마침내지긋지긋한 인간의 얼굴도 사라져 버렸고, 이제는 나로 인한 고뇌만이남아 있을뿐이다.
이제 비로소 나는 어둠에 묻혀 느긋하게쉴 수가 있다! 우선이중열쇠를 채운다.
열쇠의 회전수에 따라 나의고독은더욱 깊어지며,
나를 이처럼 이 세상에서 동떨어지게 하고있는 장벽은 더한층 견고해지는 느낌이 든다.
가증스런 삶! 공포의 도시!
그러면 오늘 하루를보낸 일을 한번 생각해 보자.
몇몇의 문인들은 만나 보았다. 이들중 한명은 육로로 러시아로 갈 수 있느냐고 내게물었다.
그리고 어느 잡지사의 편집장과 크게 다투었다.
그는 나를 공격할 때마다 "우리 잡지사에는 신사들만 모였단 말씀입니다." 라고 대꾸하곤 했다.
마치다른 신문이나 잡지는 불한당들의 손으로편집되어 있다는 듯한 어투였다.
그리고 한 20여명의 사람을 만났다.
이들중 15명은초대면. 일일이 악수를 나누다 보니 장갑을 준비해 두지 않은 게 큰 실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나기가 내리는 동안 시간을 보내느라 어느 바람둥이 여자에게 들렸다.
그녀에게서 베뉴스트르 의상을 디자인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어느 극장 지배인을 인사차 찾아갔다. 떠나려하자 그는 말했다.
"Z를 만나 보면 좋을 겁니다. 우리 극장 작자 중에서는 누구보다도 둔감하고 어리석지만 누구보다 유명하거든요.
그 친구와 얘기하다보면 뭔가 얻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좌우간 만나보십시오. 그 뒤에 또 만납시다."
나는 이때껏 해본 적 없는 여러 가지 우행을 저질렀으며 즐겨 저지른 몇가지 일들을 비겁하게도 부정했다.
허세부리는 죄와 세상의 평판을 두려워하는죄 - 친구들로부터 대단치도 않은 것을
부탁받고 이를 거절한반면 한 환벽한 얼간이에게는 추천장을 주었다.
그건 그렇고 이것으로 오늘 하루 일은 끝이던가?
한결같이 불만스럽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불만이다.
밤의 정적과 고독 속에서 나는 자신을 되찾고 , 그리고 다소의 자만을 맛보고 싶다.
내가 사랑한 자들의 넋이여, 내가 노래한 자들의 넋이여, 나를 강하게 해다오.
받들어 다오. 내게서 세상의 허위와 열병을 일으키는 독자를 멀리하게 해다오.
그리고 그대, 나의 주인인 선이여! 내가 인간 쓰레기가 아니며,
바로 이 내가 경멸하는 자들보다 못하지 않다는 것을,
내 자신에게 증명할 수 있는 몇 줄의 시구를 낳도록 힘을 주소서.